침향산(沈香山)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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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침향산 |
한글표제 | 침향산 |
한자표제 | 沈香山 |
상위어 | 산대(山臺) |
동의어 | 산거(山車), 예산대(曳山臺), 침향산붕(沈香山棚) |
관련어 | 무대(舞臺), 백학(白鶴), 산거(山車), 연화대(蓮花臺), 예산대(曳山臺), 정재(呈才), 청학(靑鶴), 침향산붕(沈香山棚), 향산(香山), 향악정재(鄕樂呈才) |
분야 | 문화/예술/음악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한양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조경아 |
용도 | 이동식 무대 |
재질 | 나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침향산(沈香山)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2년 4월 6일, 『광해군일기』 7년 8월 29일, 『광해군일기』 8년 5월 1일, 『인조실록』 1년 3월 25일 |
조선시대에 궁 밖에서 정재(呈才)를 공연하기 위해 산 모양으로 꾸민 가설무대.
개설
침향산(沈香山)은 궁 밖의 거리에서 정재를 공연하기 위해 만든 가설무대를 말한다. 향산(香山)·산거(山車)·예산대(曳山臺)·침향산붕(沈香山棚)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침향산에는 2개의 연꽃 봉오리가 있어서, 학춤을 추던 학이 연꽃을 쪼면 여자아이[童妓]가 나와 연화대무(蓮花臺舞)를 추었다.
연원 및 변천
침향산은 주로 환궁 의례 때 쓰였다. 세종 때에는 소헌왕후 심씨가 온천에 갔다가 돌아올 때, 교방(敎坊)에서 가요를 아뢰는 기생이 침향산 무대를 끌면서 진행했다(『세종실록』 22년 4월 6일). 또 왕이 신주를 종묘에 부묘(祔廟)하거나, 선농제를 지내고 적전(籍田)을 간 뒤 환궁할 때도 침향산을 만들어 정재를 공연하였다.
광해군은 나례(儺禮) 때 사용한 침향산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했고(『광해군일기』 7년 8월 29일), 침향산의 틈이 많이 벌어지고 퇴색되었다는 이유로 보수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5월 1일). 그러나 인조가 민력을 허비한다는 이유를 들어 침향산을 태워 없애도록 한 뒤에는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인조실록』 1년 3월 25일).
형태
침향산의 형태는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나무판자로 산 형상을 만들고, 전면과 후면에는 피나무[椵木]로 봉우리와 후미진 골을 조각해 붙인다. 또 절·탑·승려·사슴 등 여러 모형을 만들어 넣은 뒤에 모두 채색한다. 앞쪽에는 연못과 난간을 설치하고, 좌우에는 꽃병을 놓고 비단으로 만든 온 떨기의 모란꽃을 꽂는다. 침향산 안에는 큰 연화통을 설치하고, 지당판 아래에는 수레바퀴를 붙여 끌게 한다.
생활·민속 관련 사항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등(燈)’과 결합한 ‘등산(燈山)’을 선호했다. 반면 조선시대에는 불교적인 색채가 없는 봉래산을 상징하는 산대를 축조하였는데, 침향산도 그 일환이었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국립국악원,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 김은영, 「한국의 국왕 행차와 전통연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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