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경대(觀耕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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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적전(籍田)에서 몸소 농사를 짓는 친경례(親耕禮)를 행할 때, 신하와 백성들이 경작하는 것을 보기 위해 설치한 대(臺).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이, 경칩이 지난 뒤 길한 해일(亥日)에 선농단(先農壇)에 나아가 풍년을 기원하며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제사를 지냈다. 날이 밝으면 선농단 옆에 위치한 적전에서 직접 쟁기질하는 의례인 친경례를 거행하였다. 이때 왕은 쟁기를 5차례 미는 오추지례(五推之禮)를, 종신(宗臣)과 재신(宰臣)은 7차례 미는 칠추지례(七推之禮)를, 여러 판서(判書)와 대사헌(大司憲) 및 대사간(大司諫) 등은 9차례 미는 구추지례(九推之禮)를 행하였다. 왕은 먼저 오추지례를 행한 뒤 적전의 북쪽에 설치한 대에 올라, 여러 신하들이 밭을 가는 모습과 이후 이어지는 씨뿌리기 등을 관망하였다. 그런 까닭에 ‘밭 가는 것을 보는 대’라는 뜻에서 이 대를 관경대라고 하였다. 5월에 보리를 베는 관예의(觀刈儀)를 행할 때도 왕은 이곳에 마련한 자리에 앉아 행사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았다.

위치

관경대는 선농단과 적전이 위치한 동대문 밖 보제원동 즉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춘관통고(春官通考)』에는 1476년(성종 7)에 선농단 남쪽 10보(步) 지점에 관경대를 설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관경대의 규모나 모습에 대한 자료는 국가 전례서(典禮書) 등에 남아 있지 않다.

형태

관경대의 규모와 형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확인된 것이 없다. 다만 어느 정도 넓이를 갖추었고, 대를 오르내리는 계단이 있었음은 알 수 있다. 관경대 위에 왕이 앉는 자리를 남향하여 설치하고, 의례 중간에 임시로 사용하기 위해 장막을 서쪽 계단 아래에 조금 북쪽으로 남향하여 설치하였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친향 선농의 진설).

변천 및 현황

1747년(영조 23)에 영조는 직접 적전에 나아가 보리 추수를 살펴보는 ‘친림관예의(親臨觀刈儀)’의 의주(儀註)를 마련하게 하였다(『영조실록』 23년 1월 12일). 영조는 친경이 농사를 시작하는 의미라면, 보리를 베는 것을 지켜보는 관예(觀刈)는 농사를 마치는 의미가 있다고 하여 이를 중시하였다. 이때 관경대는 보리 베는 것을 바라본다는 뜻에서 관예대(觀刈臺)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춘관통고(春官通考)』
  • 『친경친잠의궤(親耕親蠶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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