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경례(親耕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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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국왕이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적전(籍田)에서 직접 밭갈이 하는 의례.

개설

친경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의식으로 조상 숭배 정신과 권농의 기능을 같이 겸하는 통치자의 중요한 행사였다. 친경의 의식은, 행사 전에 농사를 처음 가르친 고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선농단(先農壇)에서 제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연원 및 변천

한국사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입춘 후 해일(亥日)에 선농(先農)에 제사하고 입하 후 해일에 중농(中農)에 제사하고 입추 후 해일에 후농(後農)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또한 고려 시대에는 983년(성종 2)에 비로소 적전을 두고 친경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의종(毅宗) 때에 선농 적전단에 대한 규모와 의식 등을 자세히 규정한 의주(儀註)가 마련되었는데, 조선 시대에 거행되던 친경 의례는 이때 마련된 의주와 큰 틀에서 같았다.

조선 시대에는 1392년(태조 1) 7월에 문무백관의 제도를 정비하면서 적전의 경작과 전곡 및 사제(祠祭)의 주례(酒禮)와 희생(犧牲)을 진설(陳設)하는 등의 일을 사농시(司農寺)가 담당하도록 하고, 정도전의 건의로 적전영(籍田令)과 승(丞)을 두어 적전의 경작과 제사를 관장하게 하였다. 세종조에 마련된 오례의(五禮儀) 길례(吉禮)에는 ‘친향선농의(親享先農儀)’에 대한 의주(儀註)와 친경에 대한 의주가 마련되어 있지만 세종 때에 실제로 친경을 거행한 기록은 없었다. 친경 의례가 거행된 것은 성종 때였다. 성종 이후 왕의 친경 의례는 다양한 부대 행사, 즉 노주연(勞酒宴)이나 문무 대신들의 진하(陳賀), 귀로(歸路)의 기로연(耆老宴), 유생(儒生)과 여기(女妓)들의 헌시(獻詩)와 헌가(獻歌) 등의 각종 뒤풀이 행사로 인하여 권농 행사라기보다는 하나의 유흥 행사로 전락하는 폐단을 낳기도 하였다.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1739년(영조 15)에 처음 친경 의례를 거행한 이후 총 4차례에 걸쳐 친경을 거행하였다. 특히 1747년(영조 23)에는 적전에서 재배한 보리를 베는 것을 왕이 직접 참관하는 행사인 ‘관예(觀刈)’를 거행하였고, 이후 거의 매년 이 행사가 계속되어 고종조까지 이어졌다. 이 관예 의식은 명(明)나라선종(宣宗) 때의 고사를 원용한 것으로 친경 행사를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여 국왕이 관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장종(藏種)과 헌종(獻種)으로 이어지는 친경 의식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행사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조에 왕세손으로 친경 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던 정조는 관예는 거행하였으나 친경을 거행하지는 않았다. 고종조에는 친경과 관예를 한 차례 거행하였으며 순종대에는 1908년(순종 2) 4월 5일에 동적전에서 친경을 거행하였다. 하지만 이 해 7월 23일에 국가사전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선농단이 사직단에 합사되고 제단과 부지가 국유로 이속되면서 선농단 제사는 폐지되었다. 이에 따라 선농에 제향한 후에 친경하던 의식에서 친경만 남게 되었다. 더구나 행사가 끝난 후 순종황제가 뽕나무, 솔나무, 전나무 등의 나무를 심고 각 대신과 황족들도 따라 심는 행사가 곁들여짐으로써 친경례는 농업과 함께 임업을 권장하는 행사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제병탄 되면서 이 같은 친경의례마저 폐지되었다.

절차 및 내용

『은대조례(銀臺條例)』에 의하면 친경은 중춘(음력 2월)에 선농에서 친향(親享)한 후에 거행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혹 섭행하기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즉 친경을 거행하는 시점은 중춘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이때 친경을 거행할지의 여부는 고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따라 중춘 1개월 전에 예조에서는 왕의 친경 여부를 확인하였다. 친경하기로 결정되면 왕은 친경 직전에 동적전으로 행차하여 선농단에 제사를 올렸다. 이어서 친경을 거행하였는데 이때 왕은 소가 끄는 쟁기를 직접 잡고 다섯 번에 걸쳐 밀었다. 끝나면 왕은 관경단(觀耕壇)으로 물러나 다른 사람들이 밭갈이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왕 다음으로는 세자가 쟁기를 일곱 번 밀었고, 친경에 참여한 관료들은 각각 아홉 번씩 밀었다. 친경 때 가는 밭은 총 100고랑이었다. 밭을 갈고 나면 곡식을 심고 거름을 뿌리고 가마니로 덮어 속히 싹이 날 수 있게 하였다. 미리 준비한 호미, 쇠스랑, 가래 등은 곡식을 심을 때 사용하였고, 삼태기는 마굿간에서 가져온 말똥거름을 나르는 데 썼다.

백성들은 일이 끝난 후 왕에게 네 번의 절을 올렸다. 그러면 왕은 수고한 백성들에게 석 잔의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술은 농주 즉 막걸리였고 음식은 고기를 뼈째 푹 삶은 선농탕이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국왕의 친경 때 백성들에게 하사한 음식이 농민들에게 퍼져 설렁탕으로 발전하였다.

참고문헌

  • 『高麗史』
  • 『親耕儀軌』
  • 『國朝續五禮儀』
  • 『銀臺條例』
  • 박소동, 「친경친잠의궤 해제」, 『국역친경친잠의궤』, 민족문화추진회, 1999.
  • 김문식 외, 『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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