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향선농의(親享先農儀)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왕이 동대문 밖에 있는 선농단에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에게 몸소 제사하며 풍년을 기원하던 의례.

개설

경칩 후 해일(亥日)에 왕이 선농단에서 고대 중국의 제왕(帝王)이자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알려진 신농씨와, 요(堯)임금의 농관(農官)이었던 후직씨에게 향사(享祀)하는 의례이다. 살아서 행한 공덕(功德)을 인정받아 사후에 신으로 모셔진 대상을 ‘인귀(人鬼)’라 하고, 인귀에 대한 제사를 ‘향(享)’이라 한다. 제사의 규모는 중사(中祀)이지만, 민생의 안정과 밀접한 농업과 관련된 제사이기 때문에 왕이 직접 신에게 첫 번째 잔을 올리는 초헌관(初獻官)으로 참석한다. 왕이 참석하기 때문에 희생(犧牲)은 일반적인 중사(中祀)와 달리 소, 돼지, 양을 올린다. 폐백은 봄과 동쪽을 상징하는 푸른색 저포(苧布)를 사용한다.

연원 및 변천

선농에게 제사하는 의식은 삼국시대에도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입춘 후 해일에 선농에게, 입하 후 해일에 중농(中農)에게, 입추 후 해일에는 후농(後農)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제삿날이나 명칭은 중국의 선농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중농과 후농에 대한 제사는 신라의 독자적인 의례로 짐작된다. 이 의례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초기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414년(태종 14)에 중농과 후농에 대한 제사를 폐지하고 선농에만 제사하도록 하였다는 기록(『태종실록』 14년 4월 14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1411년(태종 11)에는 신에게 올리는 폐백으로, 자의 일종인 조례기척(造禮器尺)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푸른색 저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1년 8월 25일). 이후 『세종실록』 「오례」와 성종 연간에 간행된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에서는 이 규정을 따르고 있으나, 영조대에 편찬된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서는 11척 6촌 7푼으로 변경하였다.

왕이 몸소 제사를 지내는 친향선농의는 1475년(성종 6)에 처음으로 거행되었다(『성종실록』 6년 1월 25일). 1413년(태종 13)에 이미 선농에 대한 제사를 중사로 정하였으나(『태종실록』 13년 4월 13일), 왕이 초헌관으로 직접 참석하였으므로 희생으로 돼지와 양을 쓰는 일반적인 중사와 달리 소 1마리, 양 2마리, 돼지 2마리를 사용하였다. 이는 『세종실록』 「오례」 서례에서 규정한 소 1마리, 돼지 1마리, 양 1마리(『세종실록』 오례 길례 서례 생뢰)보다도 많은 것이었다.

절차 및 내용

의식은 의례를 거행하기 전의 준비 과정과 제사 당일의 의례 절차로 구분된다. 준비 과정은 재계(齋戒), 진설(陳設), 성생기(省牲器) 등이고, 당일의 의례는 사배례(四拜禮), 전폐(奠幣), 궤향(饋享), 삼헌(三獻), 음복수조(飮福受胙), 철변두(徹籩豆), 망예(望瘞)의 순서로 진행한다.

재계는 예조(禮曹)의 요청에 따라 총 5일간 행한다. 3일 동안은 산재(散齋)라 하여 평소처럼 일하면서 음식과 행동을 삼가고, 2일 동안은 치재(致齋)라 하여 오직 제사와 관계된 일만 행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친향 선농의 재계). 진설은 3일간 이루어진다. 제사 3일 전에는 왕과 신하가 각각 임시로 사용할 장막인 대차(大次)와 막차(幕次)를 설치하고, 2일 전에는 제단을 청소하고 제사에 사용할 집기 및 그것을 보관할 장막을 설치한다. 1일 전에는 제사에 참석하는 모든 구성원의 자리 및 의례를 행할 자리를 정하고, 신위를 놓아두는 신좌(神座)를 설치한다. 이 모든 것이 진설에 포함된다(『세종실록』 오례 길례 의식 친향 선농의 진설). 성생기는 제사에 사용할 희생인 소 1마리, 양 2마리, 돼지 2마리 및 음식을 담는 찬구(饌具)가 합당한지 살피는 것을 말한다. 희생이 의례에 사용하기에 적당하면 잡아서 털과 피는 쟁반에 담아 둔다.

제사 당일에는 축시(丑時) 5각(刻) 전에 신농씨와 후직씨의 신위를 설치하고, 제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과 헌관(獻官)은 축시 전에 정해진 자리로 나아간다. 헌관이 자리에서 4번 절하면 참석자들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4번 절하며 신을 맞이하는데, 이를 사배례라고 한다.

전폐는 초헌관인 왕이 세 번 향을 올린 뒤 미리 준비한 폐백을 신위 앞에 놓는 일을 가리킨다. 폐백으로는 조례기척을 기준으로 1장 8척 길이의 푸른색 저포를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차례로 올린다. 폐백이 끝나면 미리 준비해 두었던 희생의 털과 피를 담은 모혈반을 신위 앞에 올린다. 그 뒤 올렸던 모혈반을 거두고, 삶아 놓은 희생을 생갑(牲匣)에 담아 소, 양, 돼지의 순으로 신위 앞에 올리는데, 이를 궤향이라고 한다. 삼헌은 신에게 술잔을 3차례 올리는 것이다. 첫 번째 잔을 초헌, 두 번째 잔을 아헌, 세 번째 잔을 종헌이라 하고, 초헌관,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이 각각 잔을 올린다. 초헌 때는 정위(正位)인 신농씨의 신위 앞에 먼저 잔을 올린 뒤 축문을 읽고, 마치면 배위(配位)인 후직씨의 신위 앞에 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아헌과 종헌 때는 축문을 읽는 절차 없이, 먼저 신농씨의 신위 앞에 잔을 올리고 다시 후직씨의 신위 앞에 잔을 올린다. 제사를 지내는 데 사용한 술은 복주(福酒), 고기는 조육(胙肉)이라고 하는데, 헌관이 복주를 받아서 마시고 조육을 받는 절차를 음복수조라고 부른다. 여기까지는 신을 모시고 경건하게 예를 행한 뒤 복을 받는 절차이다.

음복수조 후 모신 신을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의 절차가 철변두이다. 철변두는 제기인 ‘변(籩)’과 ‘두(豆)’를 거둔다는 의미이지만, 실제 의례에서는 변과 두를 조금씩 움직여 놓는다. 그런 다음 헌관이 4번 절하여 송신의 절차를 마치면, 제사에 사용한 축판과 폐백 및 서직반(黍稷飯)을 미리 준비한 구덩이에 묻는데 이를 망예라 한다. 구덩이의 흙을 반쯤 덮으면 헌관이 먼저 퇴장하고, 이후 다른 참석자들도 4번 절하고 나간다.

의례를 마치면 왕은 대차에서, 신하들은 막차에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적전에서 친경례(親耕禮)를 거행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춘관통고(春官通考)』
  • 한형주, 『조선 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 이욱, 「조선시대 친경례의 변천과 그 의미」, 『종교연구』3,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