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동(盧叔仝)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노숙동 |
한글표제 | 노숙동 |
한자표제 | 盧叔仝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계승범 |
자 | 화중(和仲) |
호 | 송재(松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 |
출생 | 1403년(태종 3) |
사망 | 1463년(세조 9) |
본관 | 풍천(豊川)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노천계(盧天桂) |
조부 | 노흥길(盧興吉) |
부 | 노언(盧焉) |
모_외조 | 김해 김씨(金海金氏) : 김양귀(金良貴)의 딸 |
처_장인 | 경주 김씨(慶州金氏) : 김점(金點)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남)노윤(盧昀) (2남)노분(盧昐) (1녀)양정(梁楨)의 처 (2녀)김제신(金悌臣)의 처 |
저술문집 | 『송재유집(松齋遺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노숙동(盧叔仝)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7년 6월 8일, 『문종실록』 1년 9월 24일, 『세종실록』 26년 11월 16일, 『문종실록』 1년 9월 2일, 『문종실록』 1년 10월 8일, 『단종실록』 1년 3월 29일, 『세조실록』 1년 11월 24일, 『세조실록』 5년 1월 20일, 『세조실록』 8년 6월 27일, 『세조실록』 8년 12월 2일, 『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세조실록』 3년 4월 13일 |
총론
[1403년(태종 3)~1463년(세조 9) = 61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예문관(藝文館)직제학(直提學)과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호조 참판(參判),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송재(松齋)이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노언(盧焉)이고,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봉상대부(奉常大夫) 군기시(軍器寺) 소윤(少尹)김양귀(金良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 참의(參議)노흥길(盧興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승사랑(承仕郞) 용구현령(龍駒縣令)노천계(盧天桂)이다. 세조가 즉위한 이후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고, 청백리(淸白吏)로도 선정되었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25세가 되던 1427년(세종 9) 친시(親試)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에 보임되었다. 이후 집현전 박사(博士)와 집현전 교리(校理), 사헌부 감찰(監察) 등을 지내며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주해를 단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 수찬에도 참여했다. 30세가 되던 1432년(세종 14)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고, 34세가 되던 1436년(세종 18)에는 중시(重試)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했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문종실록』 1년 9월 24일),[『문과방목(文科榜目)』] 이후 집현전 응교(應敎)와 의정부 사인(舍人), 사간원(司諫院)지사(知事) 등을 지내며 역대 중국 및 한국 국가들의 흥망성쇠를 정리한 『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의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집현전 응교로서는 소헌왕후(昭憲王后) 모친의 상례를 논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소헌왕후의 부친은 심온(沈溫)인데, 1418년(세종 즉위년) 당시 상왕이던 태종(太宗)에게 처형당한 이후 복권되지 못한 상태였다. 이때 세종과 대신들은 소헌왕후 모친에 대하여 인정상 상례를 치르자고 했으나 노숙동은 상례를 치르는 것도 불가하다는 주장을 폈다.(『세종실록』 26년 11월 16일)
문종(文宗) 대에는 집현전 직제학,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보덕(右輔德),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지냈다. 45세가 되던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감호관(監護官)으로서 일본국의 사신이 지나치게 많은 적동(赤銅)을 가져와 대신들이 사사로이 쓰려는 것을 적발했다. 또한 문과 합격자 정원을 조정하는 논의, 관리의 풍습을 개혁하는 논의 등에 참여했고, 경상도 지방의 수조(收租) 방식을 개선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1451년(문종 1)에는 겸(兼)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 자격으로 참여한 『고려사(高麗史)』의 편찬이 완료되어 한 자급 더해졌다.(『문종실록』 1년 9월 2일),[『해동역사(海東繹史)』「예문지(藝文志)」권2] 이후 승정원 동부승지로 임명되어 임금을 보필하였다. 이 때 수양대군(首陽大君)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죄인을 함부로 풀어주거나 많은 추종자들에게 향연을 베푸는 등의 불법적인 행동을 하자 조원희(趙元禧)가 그 죄를 따진 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 대군들을 옹호하기도 하였다.(『문종실록』 1년 10월 8일) 1452년(문종 2)에 완성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여 이석형(李石亨) 등과 함께 기(紀), 지(志), 연표(年表)의 찬술을 담당했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 나아가 맞이하기도 했다.
단종~세조 시대 활동
47세가 되던 1452년(단종 즉위년)에는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다가 곧바로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이후 임금을 보필하며 문무 과방 등의 방을 내걸었고, 책방(冊房)을 철폐하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1453년(단종 1)에는 사헌부에서 임금을 희롱하고 권세를 농락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였던 강맹경(姜孟卿)과 승정원 좌승지박중손(朴仲孫)을 탄핵한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권준(權蹲)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신숙주(申叔舟)는 피혐(避嫌)하며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는데, 승정원 우승지였던 노숙동은 왕명을 받아 사헌부 장령(掌令)조계팽(趙季砰)을 책망했다. 노숙동은 조계팽에게 사헌부의 행동이야말로 반역과 붕당의 조짐으로 볼 수 있다고 책망했으나, 단종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단종실록』 1년 3월 29일)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에는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1454년(단종 2)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
50세가 되던 1455년(세조 1)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후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이에 자신은 대사헌의 직임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직을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무리를 모아 반역을 모의한 죄를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했다.(『세조실록』 1년 11월 24일) 이후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1456년(세조 2)에는 형조 참판이 되었다. 1457년(세조 3)에는 덕녕부(德寧府) 윤으로 임명되어서 단종과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였다. 이후 예조 참판, 호조 참판, 형조 참판, 예문관 제학(提學),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무직(武職)인 도진무(都鎭撫)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54세가 되던 1459년(세조 5)에는 경상도 창원부(昌原府)에 살던 노모를 봉양하고자 판진주목사(判晉州牧事)로 부임했으나, 곧 노모가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 5년 1월 20일) 그 뒤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가 증직되어 중추원 부사(副使) 겸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 57세가 되던 1462년(세조 8)에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며, 같은 해에 중추원 부사홍익생(洪益生)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돌아오다가 의주에 도착해서는 여진(女眞)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고, 또한 명나라에 있던 조선 백성들을 송환해오기도 했다.(『세조실록』 8년 6월 27일),(『세조실록』 8년 12월 2일) 이후 상호군(上護軍)에 임명되었지만, 이듬해인 1463년(세조 9) 서울의 집에서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노숙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노숙동은 입이 무겁고 관직 고하와 상관없이 임금의 고문 역할을 많이 하였다. 1446년(세종 28) 어전에서 공법(貢法)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 집현전 직제학이계전(李季甸)은 노숙동에 대하여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고 평가하였다.(『세종실록』 28년 6월 18일) 의정부(議政府) 사인이 될 때 자급이 부족하였으나 국왕이 특별히 자급을 올려서 임명했고, 노숙동이 세자에게 술을 올릴 때 세조가 명해서 특별히 큰 잔에 받도록 한 적도 있었다. 또한 세조가 평소에도 옛 친구라고 일컬으며 자주 접견했다고 한다. 노숙동은 세조의 아들인 덕종(德宗)의 스승이었는데, 덕종은 노숙동이 일러준 글귀를 벽에 붙여 놓고 그 가르침을 잊어버리지 않고자 했다.(『세조실록』 3년 4월 13일),[『옥계집(玉溪集)』 권3 「증조대사헌공묘비기(曾祖大司憲公墓碑記)」]
전라도 지방에 외직으로 나가 있을 때 의정부 사인사(舍人司)에 있는 제명기(題名記)가 흐려졌다는 얘기를 듣고 『제명책(題名冊)』을 만들어 보냈다. 또한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등 외방에 나가있을 때 각 고을의 풍경을 읊은 시가 다수 전해진다. 충주 지방에 관리로 있을 때에는 장남인 노윤(盧昀)이 그를 보좌했는데, 이때 노윤에게 권면의 의미로 ‘성신, 염공, 근간, 화혜(誠信廉公勤簡和惠)’라고 써 준 여덟 글자가 전한다.[『옥계집』 권3 「증조대사헌공묘비기」],[『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한죽당섭필寒竹堂涉筆」 권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한편 함양의 개평마을에는 김점(金點)이 노숙동을 사위로 맞아들이게 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노숙동이 과거에 급제하고 개평마을에 잠시 들러서 쉬고 있었는데, 그 때 마을에 살던 김점은 용이 승천하는 꿈을 꿨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마침 노숙동이 있어 그를 융숭히 대접하고 사위로 맞아들였다고 전한다.
배향과 후손
숙종(肅宗) 때 풍천 노씨(豊川盧氏)의 집성촌이 있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함양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배향되었다. 그 지방에서는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명현(名賢)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노숙동의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김점의 딸인데, 2남 2녀를 두었다. 1남 노윤은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이고, 2남 노분(盧昐)은 예문관 교리로 뒤에 승정원 도승지가 증직되었다. 1녀는 제릉(齊陵) 직(直)을 지낸 양정(梁楨)과 결혼하였고, 2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김제신(金悌臣)과 결혼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옥계집(玉溪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