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례도감(儺禮都監)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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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례도감 |
한글표제 | 나례도감 |
한자표제 | 儺禮都監 |
상위어 | 권설아문(權設衙門) |
동의어 | 나례청(儺禮廳) |
관련어 | 대나례(大儺禮), 의례(儀禮), 오례의(五禮儀), 외교(外交), 사신(使臣), 칙사(勅使), 영접도감(迎接都監), 관상감(觀象監), 좌우나례청(左右儺禮廳), 모화관(慕華館), 부묘(祔廟), 제사(祭祀), 연회(宴會), 산대(山臺), 채붕(綵棚), 산붕(山棚), 결채(結綵), 방상씨(方相氏), 정재인(呈才人), 재인(才人), 광대(廣大), 풍류(風流), 헌가(獻架), 잡상(雜像), 침향산(沈香山), 희자(戲子), 상원일(上元日), 체용(體俑), 제웅[草人], 처용희(處容戲), 원일(元日)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왕무 |
폐지 시기 | 인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례도감(儺禮都監) |
귀신을 몰아내는 연희(演戱) 의식인 나례를 거행하던 관서.
개설
나례도감은 나례와 같은 연희의 준비와 진행을 전담하던 관서이다. 나례는 고려시대의 왕실 문화를 계승하여 조선 초기부터 거행되었다. 조선시대 나례는 태조대부터 거행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그 전담 기관인 나례도감은 인조대까지 지속되다가 관상감(觀象監)에서 그 기능을 가져가면서 폐지되었다. 이후 다시 설치되었다가 폐지되기를 반복하였다.
나례도감의 주요 기능인 나례는 고대 중국 사회에서 역귀(疫鬼)를 쫓는 의식이었다. 한국과 일본의 왕실과 민간에서도 그 문화를 받아들여 주로 정월에 그해의 악귀를 내쫒는 나례 의식을 거행했다. 나례는 『논어』「향당(鄕黨)」에 “고장 사람들이 나례를 하면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동쪽 섬돌에 서 있었다.”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기원을 전국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되었다. 나례의 기원과 유래가 장구하듯이 조선시대 나례의 설행 과정도 의례화되었으며, 이런 배경하에 나례도감이 설립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나례도감은 조선 초기부터 왕의 행차나 궁궐 내의 잔치에 필요한 연희, 종묘와 사당에서 거행하는 제사에 시행되는 나례를 위해 설치한 중앙 관서이다. 나례도감의 기능이 국가 의례와 왕실 행사 시행과 관련되었으므로 나례도감은 왕족과 지배층을 위한 기관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반면, 외국 사신의 영접을 위해 준비하던 모습을 통해 조선시대 예술 문화의 보존과 개발을 위해 존재하던 문화 기관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례도감의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나례가 태조대부터 거행되었으므로 나례도감의 설치도 조선 초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1393년(태조 2) 태조가 계룡산에 행행했다가 숭인문(崇仁門)으로 돌아올 때 채붕(綵棚)과 나례를 시좌궁(時座宮) 문 밖에 설치하였으며, 성균관의 학관(學官)이 여러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가요(歌謠)를 불러 맞이하였다. 태종의 경우에도 1401년 환궁할 때 여러 신하들이 산붕(山棚)·결채(結綵)·나례·백희(百戲)를 베풀고 신료들이 공복(公服)으로 숭인문 밖에서 맞이하였고 성균관의 생도와 교방(敎坊)의 창기(娼妓)들도 가요를 드리면서 하례했다. 이처럼 나례는 조선 초기부터 왕의 행차에 등장하는 의례였다. 따라서 나례도감의 설립은 조선 초기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례는 국가 행사와 왕실 연회에 동원되는 성격상 주로 궁궐에서 거행되는 횟수가 많았다. 왕이 정사를 보는 편전(便殿)이나 침실을 구분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궁궐 내 적절한 장소에서 실시되었다. 따라서 나례도감은 주로 궁궐 내에서 직무를 시행했으며 왕실 의례를 담당하던 곳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초부터 활약이 많았던 나례도감은 세종대에 이르러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일었다. 사림이 정계에 다수 진출하면서, 귀신을 쫓는 나례가 풍속을 해치며 남녀귀천의 신분제를 훼손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세종대 나례가 거행될 때 부녀자들이 고려시대의 유습에 따라 길거리에서 나례를 구경하려고 하여 부도(婦道)를 떨어트린다고 지적하였다. 이런 이유로 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가뭄이나 홍수 같은 재해가 있을 때에는 나례를 정지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나례의 시행을 윤리적인 문제로 중지시키지 않았다. 오히려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례이므로 굳이 막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를 보였다.
나례도감은 연산군과 광해군대에 다양한 활약을 하였다. 두 왕이 연회를 즐겨서 나타난 현상이라기보다는 국가 의례로 만들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광해군의 경우 연회를 통해 일반인과 여민동락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연산군대에는 궁궐에서 연회를 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나례도감에서 준비할 일이 많았다. 예컨대 1505년(연산군 11) 정월대보름인 원일(元日)에 나례를 구경할 때에는 채붕(綵棚)을 경복궁 경회루에 만들었다. 이때 2명의 승지가 공사를 독려하게 하였으며, 매년 원일에 채붕을 설비하는 준례를 세웠다. 그런데 나례에서 재인(才人)공길(孔吉)이 『논어(論語)』의 “왕이 왕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연산군을 희롱하자 이후 나례를 폐지하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나례도감에서 나례를 거행할 재인을 각 지방에서 올려 보내도록 하고 재인은 나례도감에 소속시키도록 했다. 또한 도성 외부에 행행하고 돌아올 때에는 도성 내에 나례를 거행하게 하여 신민과 같이 구경하기도 하였다.
이런 광해군의 태도는 결국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앉은 인조 때 나례도감이 폐지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인조대에는 나례도감을 폐지하고 국가적으로 거행하던 나례를 사신 응대에만 이용하는 국한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인조대 명나라와 후금의 사신을 응대하는 데 나례 이외에 별다른 연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례도감은 연희만 거행하는 유희적 기관이 아니었다. 광해군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부묘(祔廟) 뒤 환궁할 때에는 의금부와 군기시에서 나례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또한 선대의 전례에 따라 기로(耆老)의 유생과 교방이 각기 가요를 올리며, 거리에는 결채하고 대궐문 밖에는 좌우로 채붕을 설치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광해군은 국가 의례의 하나로 나례를 시행하고자 했다.
이런 이유로 인조대 축소되거나 폐지되기를 반복하던 나례도감의 기능이 숙종대 이후 부활하였다. 1692년(숙종 18)에는 정월에 거행하던 대나례(大儺禮)를 복구했다. 숙종은 『주례(周禮)』「장몽(掌夢)」을 고찰해 보고서, 관상감에서 『오례의』를 참고하여 복구하도록 했다. 다만 이때 나례는 부활하였지만 나례도감을 복구하지는 못하여 이후 관상감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정조대에 이르러 나례도감이 다시 설치되었다. 나례도감 설치와 관련된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으나 1784년(정조 8) 『조선왕조실록』에 나례도감의 이름이 등장한다. 나례도감에서 음악을 연습할 때 금위영(禁衛營)에서 대년군(待年軍)이 잘못된 규례로 밤중에 화포를 쏘아 방해한 일로 금위대장(禁衛大將)서유대(徐有大)를 파직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정조대 이 사건을 전후로 나례도감에 대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례를 거행하는 것은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 나례도감이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설치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정조대에도 상원일(上元日)의 전야(前夜)에 마을의 저잣거리에서 처용희(處容戲)를 설행하는 것 등에 대해 신료들이 강제로 금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섣달그믐날 밤[除夕]의 나례와 정월 보름날 밤[元宵]의 용희(俑戲)가 모두 고유의 풍속[國俗]이라며 풍습을 헤치지 말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절기를 따라 나례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직 및 역할
1619년 나례도감에서는 전례대로 병조에서 역군(役軍)을 배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왕이 종묘에 친림하여 지내는 제사를 지낼 때 쓸 헌가(獻架) 악기와 잡상(雜像)들을 보관하고 수리하는 일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각 도에 희극을 하는 재인을 보내라고 여러 번 공문을 보냈는데도 보내지 않고 있다며 각 도 관찰사에게 파발마로 공문을 보내 때맞추어 올려 보낼 것도 주장하였다. 또한 나례도감의 등록(謄錄)에 오른 장인들이 모두 다른 도감에 소속되었다며 일이 끝날 때까지 다시 배정하여 공역(工役)에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말하였다. 이때의 나례도감 위상과 조직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 의례의 설행을 준비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중앙 정부의 조직을 통해 움직이고 동시에 지방에서 수시로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지위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외교 사신을 접대하거나 정월 행사에 참여하는 일은 모두 임시적으로 거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나례도감은 늘 운영되지는 않는 권설아문(權設衙門)의 성격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인조 즉위 초인 1623년(인조 1) 나례도감에서 연희할 때 사용하던 침향산(沉香山)을 거리에서 태워 없앨 것을 명령하였다. 광해군대에는 종묘에 행행하여 고유(告由)하고 제사하는 일이 있으면 미리 나례도감에서 헌가와 잡상, 침향산을 만들고 왕이 환궁할 때 구경꾼들과 같이 음악을 듣고 온갖 묘기를 구경하였다. 그래서 인조반정 초기 공개적으로 나례도감의 장비를 태워 더 이상 길에서 연희를 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었다. 그리고 나례도감은 나례청(儺禮廳)으로 규모를 줄이고, 나례청은 임진왜란 이후 임시로 있었던 사역원(司譯院)에서 혜민서(惠民署)로 옮겨졌다. 이후 나례청은 병조의 옛터로 옮겨졌다가, 재차 인경궁(仁慶宮)으로 보내지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1662년(현종 3) 영접도감(迎接都監)의 보고에 따라 나례청을 폐지하고 나례청에 소속되어 궁중무(宮中舞)를 다루던 정재인(呈才人)들을 내보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