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정(權應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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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8년(연산군4)∼1564년(명종19) = 67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자는 사우(士遇)이고, 호는 묵암(默菴)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거주지는 성주(星州)이다. 관찰사권희맹(權希孟)의 아들이며 권응창(權應昌)의 형이고, 여한경(呂漢卿)의 외손자이다.

종종 시대의 활동

1528년(중종23)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정자(正字)에 선발되어,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들어갔다가,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로 전직되었다. 공조 좌랑 · 병조 좌랑 ·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겼다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 의정부 검상(檢詳)으로 추천되었고, 이어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사간(司諫) · 군자감(軍資監)정(正) · 군기감(軍器監) 정을 거쳐서, 특별히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올랐다.

명종 시대의 활동

1547년(명종2)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재직 중에,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에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정권을 잡으니, 이기(李芑) 등이 권력을 잡고 농단한다.”라고 비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기 등은 봉성군(鳳城君)이완(李岏) · 이언적(李彦迪) ·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등을 배후로 지목하면서 권응정과 권응창 형제도 같은 당류라고 탄핵하고 귀양보냈다. 처음에는 유배지를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정하였다가, 나중에 함경도 단천(端川)으로 옮겨,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1553년(명종8)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 성주로 돌아왔다. 1557년(명종12) 경주부윤(慶州府尹)에 기용되었고, 1561년(명종16)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역임하였다.

사후의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성주 오도종리(吾道宗里)에 있는데, 박충원(朴忠元)이 지은 비문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농암집(聾巖集)』
  • 『퇴계집(退溪集)』
  • 『을사전문록(乙史傳聞錄)』
  • 『간재집(艮齎集)』
  • 『고봉집(高峯集)』
  • 『양곡집(陽谷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송계만록(松溪漫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