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공주(敬惠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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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6(세종 18)~1473(성종 4) = 38세]. 조선문종(文宗)의 딸. 봉호는 경혜공주(敬惠公主).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이며, 친동생은 단종(端宗)이다. 해주 정씨(海州鄭氏)인 참판정충경(鄭忠敬)의 아들, 영양위(寧陽尉)정종(鄭悰)과 혼인하였다. 정종은 세조(世祖) 즉위 후 <사육신(死六臣)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유배 생활을 하다가, 이후 반역을 도모한 혐의로 능지처참(陵遲處斬)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공주의 작호가 박탈되고, 가재(家財)가 모두 적몰되었으나, 곧 적몰된 재산을 돌려받았으며, 이후 작호 또한 회복되었다. 자녀로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정미수(鄭眉壽)이다.

출생 및 성장

경혜공주는 1436년(세종 18)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는데, 1433년(세종 15)에 태어난 문종과 현덕왕후의 첫째 딸은 태어난 직후 곧 죽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경혜공주가 큰 딸의 역할을 하였다. 출생 당시에는 아버지 문종이 아직 동궁이었고, 어머니는 동궁의 후궁이었던 관계로 현주(縣主)가 되었다. 그러나 문종의 두 번째 부인인 세자빈 봉씨(奉氏)가 궁녀와 동성애 행각을 벌인 것이 발각되어 폐출되면서, 그 해 12월 경혜공주의 어머니인 양원 권씨(良媛權氏)가 세자빈이 되었고, 이에 경혜공주도 평창군주(平昌郡主)의 작호를 받았다. 당시 조정에서는 두 번이나 이혼한 문종의 배필을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보다 이미 검증된 인물들인 후궁들에서 고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양원 권씨와 또 다른 후궁인 승휘 홍씨(承徽洪氏) 가운데에서 세자빈을 간택하고자 하였는데, 이미 출산한 경험이 있는 양원 권씨가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441년(세종 23) 세자빈 권씨는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이 아들이 바로 단종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자빈 권씨는 단종 출산 후 바로 다음날 산후병으로 사망하였고, 이후 문종은 다시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평창군주는 어머니가 사망한 후, 재액을 피하기 위하여 궁궐을 나와 조유례(趙由禮)의 집으로 옮겨 살았는데, 조선시대에는 궁궐 내에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종종 궁궐 밖으로 나가서 살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던 가운데 평창군주는 15세가 되던 1450년(세종 32) 1월 24일에 순의대부(順義大夫) 정종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임금이자 평창군주의 할아버지였던 세종(世宗)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자 급하게 혼처를 정하여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세종이 세상을 떠났다. 이어 문종이 즉위하면서 평창군주는 경혜공주로 책봉되었으며, 정종은 공주와 혼인한 부마에게 주는 종1품 품계인 숭덕대부(崇德大夫)에 임명되었다.

한편 세종의 3년상 때문에 경혜공주의 출합(出閤)은 세종의 소상(小祥)이 끝난 1451년(문종 1) 이후에야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 문종은 경복궁(景福宮)창덕궁(昌德宮) 사이에 위치한 양덕방(陽德坊)에 경혜공주의 살림집을 장만해 주었는데, 당시 그곳에 있던 인가(人家) 40여 채가 철거될 정도로 큰 공사였던 까닭에 사헌부(司憲府)에서 문제를 제기했을 정도였다. 세종 대 이후 왕자와 공주들이 출합할 때의 살림집 크기 등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적당한 집이 없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옛 집을 수리해서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은 경혜공주에게 새로운 집을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로부터 큰 사랑을 받던 경혜공주는 17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아버지 문종이 사망하고, 동생 단종이 즉위하면서 인생의 큰 격랑을 겪게 되었다.

단종의 즉위와 계유정난(癸酉靖難)

1452년(단종 즉위) 5월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을 대왕대비(大王大妃)와 대비(大妃)가 없었던 까닭에 단종은 친정(親政)을 해야만 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리하여 문종은 죽기 직전 김종서(金宗瑞)와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단종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고명대신(顧命大臣)의 역할을 하게 된 이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자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단종 보호라는 순수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왕위 찬탈이라는 목적때문이었다. 결국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밤 단종이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수양대군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우선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기습하여 김종서와 그의 아들을 제거하고, 이후 경혜공주의 집으로 가서 김종서 등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며 단종을 위협하여 대신들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그리고 왕명을 받고 오던 황보인 등의 조정 대신들을 살해하고, 이어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자신의 세력에 위협이 될 인물들을 유배 보낸 후 모두 숙청하였다.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이때 단종은 살아남아 왕위를 보전하였으나, 실권은 수양대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단종의 주위에 그나마 남아 있던 친위 세력들을 제거하며, 왕권 탈취를 위한 행동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현덕왕후가 죽은 후 단종을 직접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와 단종에게 호의적이던 금성대군(錦城大君), 그리고 경혜공주를 어렸을 때 양육했던 조유례 등이 역모를 도모하였다며 이들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결국 단종은 1455년(단종 3) 윤 6월 11일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은 각각 청풍(淸風)과 삭녕(朔寧)으로 귀양 보내고, 조유례는 고신을 거둔 후 가두었다. 이어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上王)이 되어 창덕궁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영양위정종 또한 이들과 은밀한 관계였다는 죄목으로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동생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남편 정종이 유배를 떠나자 경혜공주는 충격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단종은 세조에게 이 소식을 전하며 정종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문종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이유로 세조는 정종을 돌아오도록 하였다. 정종이 돌아온 후 경혜공주의 병은 차도를 보이자 조정에서는 다시 정종의 유배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그 해 8월 정종은 비교적 가까운 수원(水原)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이때 공주는 굳이 따라가지 않아도 되는 남편의 유배 길을 따라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그 처벌이 너무 가볍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정종의 유배지는 그보다 조금 먼 김포의 통진(通津)으로 바뀌었고, 공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따라 갔다.

이때 세조는 경혜공주의 편의를 위하여 가마를 내어주고, 노비 및 한양을 왕래할 때의 경비까지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한 사냥에서 잡은 사슴을 경혜공주에게 보내 주기도 하였으며, 정종에게는 주효(酒肴) 및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하사하는 등 경혜공주 부부의 생활을 여러모로 돌봐 주었다. 비록 정종의 고신(告身)을 거두라는 명령을 내리기는 하였으나, 이때 혜빈 양씨와 조유례 등이 모두 교수형에 처해졌던 것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처벌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단종 폐위와 남편의 죽음

세조 즉위 후에도 문종의 딸이라는 이유로 여러 특혜를 받던 경혜공주는, 그러나 일명, <사육신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전까지와는 다른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이 주축이 되어 세조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을 1456년(세조 2) 6월 1일 명(明)의 사신을 환영하기 위하여 세조와 왕세자 및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들이 모이는 연회에서 실현하기로 하였다. 명의 사신들이 있는 곳에서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켜, 명의 사신들이 이를 인정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명회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세조만 이 연회에 참석하게 하는 동시에, 칼을 차고 연회에 참석하게 되어 있던 별운검(別雲劍) 등의 참석을 금지시켰다. 성삼문 측에서는 유응부 등이 별운검으로서 참석하여 세조 일파를 처단하도록 계획하였기 때문에, 별운검의 참석이 불가해지자 이 계획을 취소하였다. 그런데 일이 틀어지자 이 모의에 동참하였던 김질(金礩)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계획을 알리고, 정창손이 다시 세조에게 알리면서 이 계획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 결국 성삼문 등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처형당하였고, 단종은 금성대군의 저택에 유폐되었다. 이어 단종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금성대군과 정종 등은 더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경혜공주는 이때에도 정종을 따라 전라도 광주(光州)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 해에 광주에서 아들 정미수를 낳았다.

그런데 문제는 단종이 상왕으로 존재하는 한 단종 복위 운동은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세조의 측근들은 1457년(세조 3) 6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宋玹壽)와 단종의 후궁 숙의 권씨(淑儀權氏)의 아버지인 권완(權完)에게 상왕을 복위시키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우고, 아울러 성삼문이 심문을 받을 때 상왕이 모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고 말한 것을 들어 단종을 끌어들였다. 이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고, 그 해 10월 결국 사망하였다. 이후 양녕대군(讓寧大君) 등은 정종 또한 처벌할 것을 거듭 요청하였는데, 이에 세조는 정종 등의 감시를 강화하도록 조처를 취하였으며, 11월에는 단종과 정종 등의 자손들을 종친에서 삭제하도록 하였다.

광주에서의 유배 생활이 계속되면서 정종은 불교에 심취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한편, 외부인과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결국 조정에서 이것을 문제 삼았다. 그리하여 1461년(세조 7) 세조는 한양으로 정종을 불러들인 후, 국문 끝에 모반을 꾸미려 하였다며 능지처참에 처하였다. 그리고 바로 경혜공주를 한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종의 족친(族親)에 대해서는 연좌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혜공주에게는 집과 토지와 노비를 주도록 하였다. 경혜공주에 대한 이러한 혜택은 이때뿐만이 아니라, 세조가 죽은 후에도 이어졌다. 그리하여 예종(睿宗)과 성종(成宗), 그리고 성종 때 수렴청정을 하였던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조정 대신들이 정종의 아들인 정미수에 대한 연좌를 주장할 때면 세조의 유교(遺敎)라는 명목을 내세워 반대하였다. 또한 예종은 몰수되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경혜공주의 보물들을 다시 돌려주었으며, 정미수를 종친의 예로 서용하도록 하였고, 녹봉 역시 지아비가 죽은 공주의 예에 맞추어 지급하였다.

이렇듯 왕실의 보호를 받으며 살던 경혜공주가 1473년(성종 4) 12월 38세의 나이로 1남 1녀를 두고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경혜공주의 장례에 부의를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8) 경혜공주의 딸이 혼인을 하게 되자 곡식과 면포를 내려주기도 하는 등 왕실에서는 경혜공주의 가족들을 종친으로서 대하였다. 또한 영양위정종은 영조(英祖) 대에 신원(伸寃)된 후, 정조(正祖) 대에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에 금성대군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한편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정종이 주살(誅殺)된 후 경혜공주가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여승으로 있었으며, 어느 절로 출가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가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자 홍인문 안의 연미정동에 있는 집 대신, 따로 초가를 지어 정업원(淨業院)이라 칭하였었는데, 그곳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혜공주가 1457년 종친에서 삭제된 후, 언제 다시 종친으로 회복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으나, 정종이 죽은 이후 공주로서의 대우를 다시 받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현재 경혜공주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에 있다. 남편 정종의 묘와 나란히 조성되어 있으나, 봉분은 경혜공주의 것만 남아 있고, 정종의 묘는 봉분 없이 묘비만 존재한다.

야사 속의 경혜공주

숙부가 동생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서는 비극을 겪는 바람에 경혜공주에 관해서는 많은 야사가 존재한다. 가장 유명한 야사가 바로 경혜공주가 남편이 죽은 후에 노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는 경혜공주가 순천(順天) 관비(官婢)가 되었는데, 순천부사(順天府使)여자신(呂自新)이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고 하자, 공주가 대청 의자에 앉아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비록 죄가 있어 귀양을 왔지만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하여, 결국 부리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정사(正史)인 실록에는 공주가 관비에 처해졌다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으며, 정종이 능지처참에 처해진 사흘 후에 바로 공주를 한양으로 불러들였다는 점 등으로 인해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또 다른 야사로는 『해주정씨족보(海州鄭氏族譜)』에서 전하는 얘기가 있다. 공주가 임신 중이었을 때 세조가 환관에게 딸이면 데리고 오고, 아들이라면 죽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알고 정희왕후가 다시 그 환관을 불러 문종의 핏줄이라고는 그 임신한 아이밖에 없으니, 공주가 낳은 아이가 아들이라고 해도 데리고 오라며, 임금을 속인 죄는 자신이 직접 감당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주는 아들을 낳았고, 환관이 그 아들을 정희왕후에게 데려다 주자 왕후는 그 아이에게 여자 옷을 입혀 궁중에서 길렀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세조가 그 아이를 보고 흡사 남자 아이와 같다고 하자 그때에서야 왕후가 사실대로 고했고, 세조는 그 아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눈물을 쏟으며 오래 살기를 바라는 뜻을 담아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로 공주의 죄를 용서하여 궁중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대궐 밖에 집을 지어 살게 하고 두 모자를 날마다 문안 들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따르면 정종이 죽어 공주가 한양으로 소환될 때 정미수가 공주를 따라 대궐 안에 들어갔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야사 역시 그대로 신뢰하기는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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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탄선생집(三灘先生集)』
  • 『조선왕조선원록(朝鮮王朝璿源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장릉지(莊陵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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