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왕후(顯德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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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18년(태종 18)~1441년(세종 23) = 24세]. 조선 5대 왕인 문종(文宗)의 비(妃)이자, 6대 왕인 단종(端宗)의 어머니. 휘호는 인효순혜현덕왕후(仁孝順惠顯德王后)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권전(權專)이고, 어머니 해주 최씨(海州崔氏)는 서운부정(書雲副正)최용(崔鄘)의 딸이다. 문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문종 즉위 후 왕후에 추존되었다.

문종의 즉위와 왕후 추존

1418년에 태어난 현덕왕후는 14세가 되던 1431년(세종 13) 왕세자였던 문종의 후궁으로 뽑혀 궁에 들어와서 승휘(承徽)가 되었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3년 3월 15일, 세종 23년 9월 21일] 당시 문종은 두 번째 혼인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첫 번째 혼인은 1427년(세종 9)에 세자빈 김씨(金氏)와 하였으나, 세자빈 김씨가 남자를 미혹하는 압승술(壓勝術)을 사용하는 것이 발각되어 1429년(세종 11)에 이혼을 하였다.[『세종실록』세종 11년 7월 20일] 이어 얼마 후 문종은 세자빈 봉씨(奉氏)와 두 번째 결혼을 하였다.[『세종실록』세종 11년 10월 15일] 그런 가운데 1433년(세종 15) 현덕왕후가 첫째 딸을 낳았으나, 그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세종실록』세종 15년 3월 3일] 이후 현덕왕후는 양원(良媛)이 되었고, 1435년(세종 17) 둘째 딸인 경혜공주(敬惠公主)를 낳았다.

이런 가운데 문종의 세자빈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 행각을 벌인 것이 발각되어 폐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세종실록』세종 18년 10월 26일] 그러면서 조정에서는 새로운 세자빈을 물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해 12월 현덕왕후가 세자빈에 봉해졌다.[『세종실록』세종 18년 10월 26일, 세종 18년 12월 28일] 당시 조정에서는 두 번이나 이혼한 문종의 배필로 새로운 사람을 찾는 것보다 이미 검증된 인물들인 후궁들에서 고르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현덕왕후와 또 다른 후궁인 홍 승휘(洪承徽) 가운데에서 세자빈을 간택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이미 출산한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현덕왕후를 간택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세종 18년 12월 28일]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441년(세종 23) 현덕왕후는 아들을 출산하였는데, 이 아들이 바로 단종이었다.[『세종실록』세종 23년 7월 23일] 그러나 불행히도 현덕왕후는 단종 출산 후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당시 나이 24세였다.[『세종실록』세종 23년 7월 24일] 이에 세종은 행실이 안팎에 보인 것을 현(顯), 충화(忠和)하고 순숙(純淑)한 것을 덕(德)이라 한다면서 현덕왕후에게 현덕(顯德)이라는 시호를 내렸다.[『세종실록』세종 23년 9월 7일]

한편 문종은 이후 세자빈을 들이지 않다가, 1450년(문종 즉위년) 2월 조선의 5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에도 왕후를 들이지 않던 문종은 그해 7월 현덕왕후를 현덕빈에서 현덕왕후로 추숭하고, 소릉(昭陵)의 능호를 내렸다.[『문종실록(文宗實錄)』문종 즉위년 7월 1일, 문종 즉위년 7월 8일]

단종의 죽음 및 왕후 폐위

1452년(단종 즉위) 5월 현덕왕후의 아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수렴청정(垂簾聽政)을 맡을 대왕대비(大王大妃)와 대비(大妃)가 없었던 까닭에 단종은 친정(親政)을 해야만 하였으나 그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그리하여 문종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김종서(金宗瑞)와 황보 인(皇甫 仁) 등에게 단종을 잘 보필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데, 고명대신(顧命大臣)의 역할을 맡은 이들에게 자연스레 권력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문종의 동생인 세조(世祖 : 수양대군(首陽大君))가 이들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은 단종의 보호라는 목적에서가 아니라 왕위 찬탈이라는 목적 때문이었다. 결국 1453년(단종 1) 10월 10일 밤 단종이 결혼하여 사저(私邸)로 나간 경혜공주의 집에서 머무는 동안 세조는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김종서와 황보 인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였다며, 이들을 숙청하였다.[『단종실록(端宗實錄) 단종 1년 10월 10일』] 이것이 바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이때 단종은 살아남아 왕위를 보전하였으나, 실권은 세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단종은 1454년(단종 2) 현덕왕후에게 인효순혜(仁孝順惠)라는 존호를 올렸고, 문종의 삼년상이 끝남에 따라 문종과 현덕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단종실록』단종 2년 7월 1일, 단종 2년 7월 15일] 한편 세조의 계획은 실권을 확보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단종에게 호의적이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현덕왕후가 죽은 후 단종을 직접 키운 세종의 후궁 혜빈양씨(惠嬪楊氏), 그리고 경혜공주가 어렸을 때 양육했던 조유례(趙由禮) 등 단종 주변의 인물들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유배 및 사형에 처하였다.[『단종실록』단종 3년 5월 26일, 단종 3년 윤6월 11일, 『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1년 11월 9일, 세조 1년 11월 14일] 이렇듯 단종의 친위 세력들이 제거되면서 결국 단종은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한 후 상왕(上王)이 되어 창덕궁에 거주하게 되었다.[『세조실록』세조 1년 윤6월 11일]

그런 가운데 일명 <사육신 사건>이 발생하였다. 성삼문(成三問)을 비롯한 박팽년(朴彭年), 이개(李塏), 유성원(柳誠源), 하위지(河緯地), 유응부(兪應孚) 등이 주축이 되어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는 <단종 복위 운동>을 계획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계획은 1456년(세조 2) 6월 1일 명(明)나라 사신을 환영하기 위하여 세조와 왕세자 및 한명회(韓明澮) 등의 대신들이 모이는 연회에서 실현하기로 하였다. 명의 사신들이 있는 곳에서 상왕인 단종을 복위시켜, 명의 사신들이 이를 인정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한명회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 채면서 일이 틀어졌고, 결국 이 모의에 동참하였던 김질(金礩)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계획을 알리면서 단종 복위 운동은 만천하에 폭로되었다.[『세조실록』세조 2년 6월 2일] 그러면서 성삼문을 비롯하여 관련자들이 모두 처형되었고, 현덕왕후의 친정에도 큰 여파가 미쳤다. 우선 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현덕왕후의 동생인 권자신(權自愼)과 그 어머니가 처형되었으며, 세상을 떠난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은 고신(告身)을 추탈 당하였다.[『세조실록』세조 2년 6월 8일, 세조 2년 6월 9일, 세조 2년 7월 7일] 이어 현덕왕후의 형부인 권산해(權山海)는 자살을 하였고, 또 다른 형부인 윤영손(尹鈴孫)도 이때 처형되었다.[『세조실록』세조 2년 6월 8일, 『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13년 5월 7일, 정조 15년 4월 12일]

이때에도 단종은 살아있었는데, 이렇듯 단종이 상왕으로 존재하는 한 단종 복위 운동은 언제든지 다시 발생할 여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조의 측근들은 1457년(세조 3) 6월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宋玹壽)와 후궁 숙의권씨(淑儀權氏)의 아버지인 권완(權完)에게 상왕을 복위시키려 하였다는 혐의를 씌웠다. 아울러 성삼문과 권자신이 심문을 받을 때 상왕이 모의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고 말한 것을 들어 단종 역시 끌어들였다.[『세조실록』세조 3년 6월 21일] 이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寧越)로 쫓겨 가게 되었고, 단종이 노산군으로 이미 강봉되었으므로 현덕왕후 또한 폐위하여야 한다는 의정부의 의견에 따라 현덕왕후는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이어 서인의 지위에 맞게 무덤 역시 개장(改葬)이 이루어졌다.[『세조실록』세조 3년 6월 21일, 세조 3년 6월 26일] 또한 왕후의 신분으로 종묘(宗廟)에 모셔져 있던 현덕왕후의 신주 역시 철거되었으며, 고명(誥命)책보(冊寶) 등은 관사에 수장(收藏)되었다가 성종(成宗) 대에 불살라졌다.[『세조실록』세조 3년 9월 7일, 『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7년 4월 15일] 한편 현덕왕후의 아들인 단종은 1457년 10월 1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세조실록』세조 3년 10월 21일]

현덕왕후의 복위

현덕왕후의 복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1478년(성종 9) 4월로 당시 성종(成宗)이 흙비와 같은 재이(災異)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면서였다. 이에 남효온(南孝溫)은 문종이 홀로 제사 받기를 즐겨할 리가 없다면서, 소릉의 추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도승지(都承旨)임사홍(任士洪)이 신하로서 논의할 수 없는 내용이라며 반대를 표명하였고, 성종도 이 의견에 따랐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9년 4월 15일] 이후 연산군(燕山君) 대에도 김일손(金馹孫), 한훈(韓訓) 등이 소릉 추복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연산군 1년 5월 28일, 연산군 1년 12월 30일]

그러다가 중종(中宗) 대에 들어서면서 현덕왕후에 대한 추복 논의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1512년(중종 7) 11월 하순에 소세양(蘇世讓)이 소릉의 복위를 주장한 이후, 이듬해 3월 초까지 백여 차례가 넘게 소릉 복위에 대한 상소가 올라왔던 것이다.[『중종실록』중종 7년 11월 22일] 이에 왕후는 모반 사건에 직접 관여하지 않으면 폐위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1513년(중종 8) 3월 중종은 소릉을 문종의 능인 현릉(顯陵)으로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현덕왕후의 위호를 추복하고, 신주를 다시 문종의 사당에 배향하도록 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8년 3월 11일, 중종 8년 3월 12일] 또한 1698년(숙종 24) 단종이 복위되면서, 현덕왕후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봉작은 회복되었고, 동생인 권자신도 복관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4년 11월 6일, 숙종 25년 4월 13일]

성품과 일화

현덕왕후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부드럽고 지혜로운 덕(德)과 아름답고 고운 용모를 지녀 윗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아랫사람들에게는 항상 얼굴빛을 부드럽게 하여, 삼가고 화합하는 미풍을 조성하였다.[『세종실록』세종 23년 9월 21일]

한편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네 자식도 죽이겠다.”고 하였는데, 세조가 잠에서 깨자마자 의경세자(懿敬世子 : 덕종(德宗))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에 화가 난 세조가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쳐 버리라고 하여 그 능은 폐허가 되었으나, 한 승려가 바닷가에 있는 현덕왕후의 관곽을 발견하고 풀숲에 묻어두었고, 이 덕분에 훗날 현덕왕후를 복위하였을 때 현덕왕후의 능을 문종 곁으로 이장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문종조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그러나 이 이야기는 의경세자가 단종보다 50일 정도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세조실록』세조 3년 9월 2일] 다만 당시 사람들이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에 대하여 가진 생각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묘소와 후손

1513년 현릉과 합장된 소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6-3에 위치한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에 따라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을 서로 다른 언덕에 조성하였는데, 정자각에서 바라봤을 때 왼쪽이 문종, 오른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과 정자각, 비각 등은 하나씩만 있다. 1970년 사적 193호로 지정되었다.

현덕왕후는 문종과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는데, 1남은 단종이다. 2녀 가운데 첫째 딸은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둘째 딸은 경혜공주로 영양위(寧陽尉)정종(鄭悰)과 혼인하였다. 경혜공주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정종이 유배를 떠나자 따라가서 살다가, 결국 동생인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에 종친(宗親)에서 삭제되었다.[『세조실록』세조 3년 11월 18일] 그러다가 1461년(세조 7) 세조는 모반을 꾸몄다는 죄로 정종을 능지처참(陵遲處斬)에 처한 후,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연좌하지 못하게 하고 경혜공주와 그의 아들 정미수(鄭眉壽)를 서울로 데리고 왔다.[『세조실록』세조 7년 10월 20일, 세조 7년 10월 23일] 이어 경혜공주에게 집과 토지, 노비를 주었으며, 이러한 혜택은 세조 사후에도 이어져서 예종(睿宗)과 성종, 그리고 성종 때 수렴청정을 하였던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조정 대신들이 정미수에 대한 연좌를 주장할 때면 세조의 유교(遺敎)라는 명목을 내세워 반대하였다.[『세조실록』세조 8년 5월 4일, 세조 9년 3월 25일, 세조 10년 2월 14일, 세조 13년 7월 8일, 『성종실록』성종 4년 5월 1일] 또한 예종은 몰수되었다가 돌려받지 못한 경혜공주의 보물들을 다시 돌려주었고, 정미수를 종친의 예로 서용하도록 하였으며, 녹봉 역시 남편이 죽은 공주의 예에 맞추어 지급하였다.[『예종실록(睿宗實錄)』예종 1년 4월 10일, 예종 1년 4월 12일, 예종 1년 10월 2일]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記略)』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 윤정란, 『조선왕비오백년사』, 이가출판사, 2008.
  • 이정근,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2.
  • 지두환, 『문종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8.
  • 최선경, 『왕을 낳은 후궁들』, 김영사,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