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복성(康復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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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0년(명종5)~1634년(인조12) = 8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명지(明之), 호는 죽간(竹磵)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인데, 파조는 강한룡(康漢龍)이다. 부사(府使)강기(康覬)의 손자이고, 유학자 탄수(灘叟)이연경(李延慶)의 외손자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아버지 강유선(康惟善)이 1549년(명종4) 이홍윤(李洪胤)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자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나, 외조부 이연경이 데려다가 길렀다.

1579년(선조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음보(蔭補)로서 참봉, 직장(直長), 찰방(察訪) 등을 역임하다가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595년(선조28) 유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장현광(張顯光), 서사원(徐思遠) 등과 함께 현재(賢才)로서 발탁되어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임명되었다. 그 뒤 김제군수(金堤郡守), 고양군수(高陽郡守),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역임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남원(南原)에 주둔한 왜적을 물리쳤다. 1602년(선조35) 형조정랑으로 발탁되었는데, 그때 『주역(周易)』의 교정(校正)에 강복성보다 나은 사람이 조정에 없었기 때문이다. 1604년에는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임명되었는데, 치적(治績)이 제일이었으므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08년(광해군즉위년)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전주부윤(全州府尹), 청송부사(靑松府使)를 지내고, 1614년(광해군6)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거쳐서 도총부(都摠府)부총관(副摠管)으로 승진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자, 병을 핑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갔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 부평부사(富平府使),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군사와 식량을 징발하여 가장 먼저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가서 인조를 호위(護衛)하니, 인조가 특별히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중추부지사(知事)에 제수하였다. 곧 치사(致仕)하고 선산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1634년(인조12) 병으로 죽으니, 나이가 85세였다. 저서로는 『죽간집(竹磵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이 전한다. 천성이 해맑고 외모에 위엄이 있었다. 온화하게 사람을 대하였으나 악한 것을 미워하는 데에는 엄격하였다. 스스로의 몸가짐은 겸손하였으나 일을 할 때에는 과감하였다. 봄의 온화함과 같은 부드러움과 가을의 서릿발과 같은 차가움의 양면성을 가졌으나, 말과 행동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그는 자식으로서 비명에 돌아간 아버지의 죽음을 애통해하여, 일찍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농담을 하지 않았고, 오직 학문에만 마음을 기울였다. 강복성은 여러 책들을 널리 읽었는데, 그 중에서 『주역(周易)』에 가장 정통하여, 인간의 성쇠(盛衰)와 길흉(吉凶)에 밝았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상도 선산 개령(開寧) 동리(東里)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갈명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朝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소재집(蘇齋集)』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사록(東槎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간재집(艮齋集)』
  • 『악록집(岳麓集)』
  • 『우헌집(寓軒集)』
  • 『서파집(西坡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