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문화제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세계적인 문화제로 발전되는 그날까지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서희(徐熙)를 테마로 한 개막 및 축하공연을 시작으로 외교문화체험의 국제관, 우리의 맛과 멋에 취해보는 한국관, 다양한 흥과 끼를 펼쳐보는 경연대회(K-POP, 한국어스피치콘테스트, 도전서희 코리안벨, 자랑스런서희퍼포먼스)와 서희(徐熙) 선생의 업적과 활동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표현해보는 전국미술대회 및 오행시 등 다채로운 이벤트로 축제의 장이 펼쳐집니다.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효양산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
「은혜 갚은 사슴이야기」는 전국에 걸쳐 전승되고 있는 설화와 각종 설화집류에 수록된 자료를 보면 약 140여 편에 이른다.
「금강산 선녀 설화」,「선녀와 나무꾼」, 「사슴을 구해 준 총각」 등으로도 불리며
가장 유명한 표제는 「나무꾼과 선녀」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전승 과정에서 여러 삽화가 덧붙으면서 많은 변이형이 형성된 대표적인 민담이다.
이 변이형은 결말에 따라 두 가지로 대별된다.
① 나무꾼이 하늘에 올라가 선녀를 만나 잘 살았다는 행복한 결말,
② 하늘에 올라갔던 나무꾼이 어머니가 보고 싶어 다시 지상에 내려왔다가 금기를 어겨 수탉이 되었다는 비극적 결말이 그것이다. 이 후 각 지역마다 인물과 사건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천은 실존 인물과 설화가 결합되어 보다 생동감 있는 「은혜 갚은 사슴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슴 한마리가 황급히 나무꾼에게 달려오더니, 사냥꾼이 쫓아오니 숨겨달라고 애원했다.
사슴의 몸에는 화살이 박혀있었다.
나무꾼은 사슴을 숨겨주고 사냥꾼에게는 사슴이 저쪽으로 갔다고 말해 사냥꾼을 따돌렸다.
은혜 갚은 사슴이야기의 전반부다.
전래동화 ‘ 선녀와 나뭇꾼’에서는 목숨을 구한 사슴이 나무꾼에게 선녀가 목욕하는 연못의 위치를 알려준다.
나뭇꾼은 선녀와 결혼해 아이를 낳지만 선녀는 하늘로 돌아간다.
후에 나무꾼은 다시 사슴의 도움으로 하늘에 올라가 다시 선녀를 만나 행복하게 잘 살았다.
① 이천의 은혜 갚은 사슴과 서희 이천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의 결말은 이와 다르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覺)’ 등의 옛 문헌에도 소개되어 있는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는 역사적 인물들의 일대기와 접목돼 보다 생생하고, 드라마틱하다.
사슴을 구해준 사람의 이름은 서신일이다.
그는 여든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사슴의 목숨을 구해준 날 밤 꿈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산신령은 서 씨에게 “그대가 구한 사슴은 나의 아들”이라며 “곧 나라의 큰 인물이 될 아이를 얻게 될 것이며
자자손손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말했다. 열 달 후 정말로 아들이 태어났다.
천수를 다한 서 씨가 세상을 떠났을 때 사슴이 다시 나타나 상주의 옷자락을 물고 이끌었다.
상주는 사슴이 안내한 곳에 서 씨의 묘를 썼다.
서 씨의 아들은 고려 광종 때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정민공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성품이 곧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어서,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보면 임금에게라도 간언을 서슴지 않았다.
사치를 좋아하는 광종이 신하들에게 금으로 만든 술잔을 하나씩 선물했는데, 서필은 받지 않았다.
왕이 사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신이 비록 재상 자리에 있다고는 하지만 평소 임금님을 잘 보필하지 못한 터에,
이제 금 술잔을 내려 주시니 더욱 황공하고 분수에 넘치는 일입니다.
의복과 그릇의 쓰임에는 각각 구별이 있어야 하고, 사치와 검소한 정도에 따라 나라의 치란(治亂)이 좌우되는 것입니다.
만일 신하들이 모두 금 그릇을 쓴다면 임금님께서는 장차어떤 그릇을 쓰시겠습니까?” 라고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서필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둘째 아들 서희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단신으로 적장 소손녕(蕭遜寧)을 만나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외교력만으로 나라를 구했다.
소손녕은 고려가 거란의 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거란과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어 침입했음을 밝혔다.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던 서희는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平壤)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의 동경(요양遼陽)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盜據)해 완악(頑惡)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朝聘)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했다.
서희의 언사와 기개를 본 거란은 싸우지 않고 철병했다.
서희는 그 후로도 북진을 개척해 고려의 국방력을 튼튼히 하는데 힘썼다.
서희의 아들 서눌(徐訥) 또한 정종때 높은 관직에 오른 문신이다.
이처럼,3대가 모두 정승의 지위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치고, 그 후손들이 번창해 이천 서씨 가문의 일대 중흥을 일으켰다.
후손들은 이 모든것이 신일이 사슴을 구해준 은덕이며, 사슴이 잡아준 서신일의 묘자리가 둘도 없는 명당이라고 여겼다.
[[효양산][ 이야기 서신일의 묘가 있는 곳은 이천 효양산이다.
200m가 안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이천 사람들에게 효양산은 ‘우주산’이다.
그만큼 효양산에는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도 많고,보물과 명당도 많다. 가장 잘 알려진 보물은 금송아지다.
중국 황제가 아침에 세수를 하는데 대야에 금송아지가 보였다.
점쟁이는 이 금송아지가 효양산에 있다고 일렀다.
황제는 금송아지를 몰래 가져오라며 신하를 보냈다.
이천 작별리에 다다른 신하는 머리가 하얀 노인에게 효양산이 어디냐고 물었다.
노인은 “이 길을 계속 걸으면 오천 고을이 나오는데, 오천 고을을 지나 억만리를 가서 다시 이천장을 지나가면 억억다리가 있지.
억억다리를 건너면 구만리벌판이 나오는데 그 건너편에 있는 산이 효양산”이라고 말했다.
노인은 덧붙였다.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께서 중국으로 장사를 가셨는데 하도 오지 않으셔서 일곱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찾아 나섰다가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못 만났고, 이 지팡이도 원래 두 자가 넘었는데 다 닳아서 손바닥만큼 짧아졌소.”
이 말을 들은 신하는 금송아지를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이 노인은 금송아지를 지키려는 효양산 산신령이며, 금송아지는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효양산에는 이 베틀로 짠 옷을 입으면 사람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하늘을 날게 된다는 ‘금베틀’과
무엇이든 그릇에 담는 대로 가득 찬다는 ‘화수분’도 있다.
이천문화원 이동준 사무국장은 “구만리뜰이나 억억다리 등은 모두 이천에 실제하는 지명으로,
이런 설화들은 이천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며 “보물에 관한 설화가 보물의 효험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이천의 미래도 사람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라고 말했다.
보은담은 은혜를 입은 동물이나 사람이 시혜자(施惠者)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주로 동물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더 극적이며 상징적인 효과도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동물도 은혜를 갚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당연하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고 본다.
은혜 갚은 사슴 이야기로 대표되는 보은설화는 자유민권과 인권의식, 그리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야기는 이야기로서 그야말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도 은혜를 입으면 갚는다는 단순 사고로 접근하는 것이 이해와 분석에 적절할 것이다.
이야기 내용은 과학적인 증명이나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인간과 동물,인간과 식물,즉 인간과 자연이 서로 인격적으로 교류하며 소통이 가능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소통은 사실 일방적인 측면을 내재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은유와 상징, 신화로서 자연에게 인간사회를 유지할 구체적인 바람과 욕망을 투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생활이 어려워도 은혜를 베풀며 성실히 살면 현세에 바라는 욕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에도 성행하는 기복신앙과 닮아 있으며,사건의 인과와는 상관없이 선행에는 긍정적인 효과가 따라올 것이라는 바람이 나타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천시는 2005년부터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를 열어 청소년과 시민들이 고장의 전설과 역사를 알리고, 화합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올해부터는‘서희문화제’로 이름을 바꿔 9월 10일 서희테마파크에서 개최한다.
이천시의회 김하식의원은 “효양산 전설문화축제는 효양산이 있는 부발읍에서 읍단위의 작은 행사로 시작됐다.
읍민들과 초등학생들의 백일장을 치르며 서희선생의 외교능력을 통해 화합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한 그는 “이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고장으로,주변 지역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래서
전설과 문화적으로도 발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효양산과 서희선생이라는 인물은
이천을 넘어 대한민국을 대표 할 만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전 국민이 참여하도록 대상을 확대했다.
앞으로 이천의 문화원형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의
고려 전기의 정치가 및 외교가.
내용
서희(徐熙)의 아버지는 내의령(內議令)을 지낸 서필(徐弼)이다. 할아버지인 서신일(徐神逸) 때까지는 이천 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아들로는 서눌(徐訥)·서유걸(徐惟傑)·서유위(徐惟偉)·서주행(徐周行)이 있으며, 서눌의 딸은 현종(顯宗)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1]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960년(광종 11)에 과거에 급제, 광평원외랑(廣評員外郞)을 거쳐 내의시랑(內議侍郞)이 되었다. 972년(광종 23)에 사신으로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 때는 근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까지에 이르렀다. 993년(성종 12) 거란이 남침하자 중군사(中軍使)로 북계에 나가 적과 대진했는데, 이때 일부 중신들은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어 화평하자고 주장했으나, 서희는 이를 반대하고 스스로 거란 진영에 가서 적장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거란군을 퇴각하게 할 뿐 아니라, 압록강 이남의 장흥(長興)·귀화(歸化) 2진(鎭)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으며, 다음해 안의(安義)·흥화(興化) 2진(鎭), 또 이듬해에 선주(宣州)·맹주(孟州) 2주에 성을 쌓았다. 996년(성종 15) 병이 나 998년에 57세의 나이로 죽었다.[2]
경기도 여주시에 부인과 합장한 묘소가 남아 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할아버지: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
할머니 : 합천 홍씨(陜川洪氏) 홍찬(洪贊)의 딸
아버지 :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어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부인 : 청주 한씨(淸州韓氏)
- 형 : 서염(徐廉)
- 동생 : 서영(徐英)
- 아들 :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아들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증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고손자: 서원(徐元)(정2품 평장사)
- 고손자: 서영관(穎觀) (헌화사 대사)
- 고손자: 서공(徐恭)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손자: 서순(徐淳(徐諄) (종2품 동지추밀원사)
- 고고손자: 서저(徐氐 병부낭중. 종 3품. 차관급)
- 고고손자: 서평(徐坪 판도좌랑)
- 고고손자: 서광(徐珖-예빈소경))
- 고손자: 서성(徐成) (정2품 평장사)
- 고손자: 서염(徐廉) (종2품 사복부령)
- 증손자: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 손자: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손자: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아들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아들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작은 할아버지 : 서신통(徐新通)
- 작은 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이천서씨 대종회 [[3]]
주관기관: 이천문화재단
이천문화재단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협상가이며 외교전략가인 장위공 서희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2022 장위공 서희문화제’를 개최한다고 14일 밝혔다.
‘2022 장위공 서희문화제’는 ‘서희의 외교, 평화를 열다’를 주제로 10월 8∼9일 양일 간 서희테마파크에서 열린다.
서희문화제는 세계속의 한국의 멋과 맛, 그리고 세계 각국의 문화와 예술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글로벌 외교문화 축제를 준비해 방문객들을 맞이하게 된다.
주요내용으로는 세계 각 나라의 전통의상,요리,놀이를 체험할 수 있는 한국관·국제관 등 5개 전시관 , 미래 꿈나무들의 전국 미술대회 ,오행시 과거시험, 서희퍼포먼스 경연대회 ,누구나 참여 가능한 장원급제 서희 O,X 퀴즈 등으로 구성했다.
‘나도 서희! 서희외교담판 역할극’, ‘서희랑 인생네컷’, 엽전으로 서희기념품을 교환할 수 있는 ‘고려 상점’, 등 풍성하고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도 준비했다.
전형구 (재)이천문화재단 이사장은 “2022 장위공 서희문화제를 가족, 연인 등 누구나 참여해서 즐길 수 있는 문화축제로 준비했다”며 “평생 간직할 추억을 만드는 이번 축제에 많은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