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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とよた)씨 족보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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藤原ふじわら.fujiw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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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서씨)|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서씨)|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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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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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씨(일본어: 藤原氏 후지와라시[*]ふじわら.fujiwara)는 일본의 역사에서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를 우지(氏), 혼세(本姓)로 삼았던 신별 씨족(神別氏族)으로 약칭은 도 씨(일본어: 藤氏ふじわら.fujiwara)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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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인 가마타리(鎌足)는 원래 나카토미 우지(일본어: 中臣氏)였기에, 후지와라의 시조 또한 나카토미와 같은 아메노코야네노 미코토(일본어: 天児屋命)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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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대표적인 가바네(姓)의 하나로 겐지(源氏)・헤이시(平氏)・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도시쓰(源平藤橘)'로 불리며 그 가운데서도 필두에 꼽힌 명문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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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614년 ~ 669년)는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덴지 천황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이라는 가바네를 수여받았으며, 가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이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특히 헤이안 시대(794년 ~ 1185년)의 정치를 섭정 및 관백의 지위를 통해 독점하였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구게(公家)가 있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각지에 지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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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시대에 난케(南家)・홋케(北家)・시키케(式家)・교케(京家)의 네 집안으로 나뉘었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 홋케가 황실과의 연척관계를 통해 셋칸정치(攝關政治)를 행하였다. 후지와라 씨 일족은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모두 혼세(本姓)인 '후지와라(藤原)'를 칭했지만,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후로는 [[후지와라]] 대신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구조(九條)', '니조(二條)', '이치조(一條)' 등 묘지(苗字)에 해당하는 가명(家名)만을 썼으며, 공식 문서를 제외하고 '[[후지와라]]'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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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시대 말기에 [[후지와라]] 씨가 조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이었다. 여기에 지방으로 낙향한 후예들까지 합하면 일본에서는 천황가 및 그 계통을 이어받은 겐지·헤이시 등 다음으로 광대하게 퍼져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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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족 후손
 
백제왕족 후손
  
[[토요타]]씨와 [[오우치씨]]와 더불어 백제계 3대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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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타]](とよた)씨와 [[오우치씨]](おおうち)와 더불어 백제계 3대 성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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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백제 계통 도래인의 후손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들의 족보에도 그렇게 적어놓았다.
 
대표적인 백제 계통 도래인의 후손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들의 족보에도 그렇게 적어놓았다.
  
미나모토(), 타이라(), 타치바나()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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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요타(とよた)씨 족보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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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代 百済國大祖 都慕大王([[도모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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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代 直支王([[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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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三代 阿美王([[아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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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四代 腆支王([[전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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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五代 久爾辛王([[구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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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代 毘有王([[비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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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代 蓋圖王([[개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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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八代 文園王([[문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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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九代 三斥王([[삼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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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代 東城王([[동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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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一代 武寧王([[무령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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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二代 聖王([[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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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三代 威徳王([[위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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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四代 惠王([[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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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五代 法王([[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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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六代 辰爾王([[진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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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七代 武王([[무왕(백제)|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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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八代 義慈王([[의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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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十九代 豊璋王([[부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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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廿代 禅廣([[부여선광]]([[여선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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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도왕]](目圖王)과 [[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ㅡ[[일본 서씨]](日本徐氏)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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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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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とよた)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와 [[토요타]](豊田とよた)씨,[[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おおうち)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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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가문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채워앉아 헤이안 시대 때 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후지와라 외의 4대 본성 중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된 분가들로 여러 방계들이 있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씨 북가의 대두 이후 몰락했다. 4대 본성 중 유일하게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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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 붕어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 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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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橘)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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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가문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채워앉아 헤이안 시대 때 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후지와라 외의 4대 본성 중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된 분가들로 여러 방계들이 있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씨(ふじわら) 북가의 대두 이후 몰락했다. 4대 본성 중 유일하게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었다
  
 
선조는 현재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다. 나가토미 가문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메노코야네를 시조신으로 모셨다.
 
선조는 현재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다. 나가토미 가문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메노코야네를 시조신으로 모셨다.
  
가문의 일원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38대 덴지 덴노(天智天皇)로부터 669년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 후에 후지와라 씨를 사성받았기 때문에(669년) 실질적인 시조이자 번성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때부터였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헤이케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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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일원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38대 덴지 덴노(天智天皇)로부터 669년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 후에 [[후지와라]](ふじわら) 씨를 사성받았기 때문에(669년) 실질적인 시조이자 번성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때부터였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헤이케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명이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45대 쇼무 덴노가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혈통을 황위에 올리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친왕을 올렸으나, 후손이었던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본인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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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45대 쇼무 덴노가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혈통을 황위에 올리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친왕을 올렸으나, 후손이었던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본인이 죽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실질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저자였는데, 현대의 일본 사학계를 헷갈리게 만든 만세일계를 만든 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40대 덴무 덴노 이전까지 오키미(大王)였던 칭호를 원래부터 덴노(천황)로 기술한 건 애교고, 1대 진무 덴노~9대 카이카 덴노,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는 전부 허구로 추정되는 데다[7] 고훈 시대 덴노 중에서도 22대 세이네이 덴노나 25대 부레츠 덴노는 가공인물설이 중론이다.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26대 케이타이 덴노 직계와 대왕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소가씨 왕조설에서 33대 스이코 덴노와 35대 고교쿠 덴노/37대 사이메이 덴노를 기술한 것은 당대 45대 쇼무 덴노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43대 겐메이 덴노와 44대 겐쇼 덴노 모녀를 거쳤고, 쇼무 덴노에게 잘 물려주라는 뜻에서 여왕-태자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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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실질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저자였는데, 현대의 일본 사학계를 헷갈리게 만든 만세일계를 만든 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40대 덴무 덴노 이전까지 오키미(大王)였던 칭호를 원래부터 덴노(천황)로 기술한 건 애교고, 1대 진무 덴노~9대 카이카 덴노,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는 전부 허구로 추정되는 데다 고훈 시대 덴노 중에서도 22대 세이네이 덴노나 25대 부레츠 덴노는 가공인물설이 중론이다.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26대 케이타이 덴노 직계와 대왕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소가씨 왕조설에서 33대 스이코 덴노와 35대 고교쿠 덴노/37대 사이메이 덴노를 기술한 것은 당대 45대 쇼무 덴노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43대 겐메이 덴노와 44대 겐쇼 덴노 모녀를 거쳤고, 쇼무 덴노에게 잘 물려주라는 뜻에서 여왕-태자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지속적인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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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 북(北), 식(式), 경(京)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長屋王)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나가야 왕의 변).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 때문에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 북(), 식(), 경(京)[8]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長屋王)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나가야 왕의 변).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 때문에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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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735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었던 타치바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 가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키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자, 그로 인해 시키케가 제일 먼저 몰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735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었던 타치바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 가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키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자, 그로 인해 시키케가 제일 먼저 몰락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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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 남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였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이었던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켰고, 757년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사후 상황으로 있던 46대 코켄 덴노(孝謙天皇) 및 그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난케 일족이 두 번째로 몰락했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 남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였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이었던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켰고, 757년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사후 상황으로 있던 46대 코켄 덴노(孝謙天皇) 및 그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난케 일족이 두 번째로 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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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称徳天皇)가 붕어했는데, 덴무 덴노(天武天皇) 계열이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즉위했다.
  
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称徳天皇)[9]가 붕어했는데, 덴무 덴노(天武天皇) 계열이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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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대 코닌 덴노는 덴지계인 쇼무 덴노(聖武天皇)의 딸이자 코켄 덴노의 이복 언니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이던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50대 간무 덴노(桓武天皇)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다. 그리고 덴지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49대 코닌 덴노는 덴지계인 쇼무 덴노(聖武天皇)의 딸이자 코켄 덴노의 이복 언니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이던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50대 간무 덴노(桓武天皇)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다. 그리고 덴지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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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 북가)'가 대두했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형법과 행정법)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52대 사가 덴노(嵯峨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장인두. 천황의 비서실장격. 조선으로 치면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 격식》(弘仁格式) 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 북가)'가 대두했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형법과 행정법)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52대 사가 덴노(嵯峨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장인두. 천황의 비서실장격. 조선으로 치면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 격식》(弘仁格式) 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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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백제계 성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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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 백제왕 계보 ==
 
== 백제왕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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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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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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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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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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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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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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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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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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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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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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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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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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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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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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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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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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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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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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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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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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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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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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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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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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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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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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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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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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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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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서씨]]

2024년 2월 25일 (일) 22:32 기준 최신판

藤原ふじわら.fujiwara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후지와라 씨(일본어: 藤原氏 후지와라시[*]ふじわら.fujiwara)는 일본의 역사에서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를 우지(氏), 혼세(本姓)로 삼았던 신별 씨족(神別氏族)으로 약칭은 도 씨(일본어: 藤氏ふじわら.fujiwara)이다.

시조인 가마타리(鎌足)는 원래 나카토미 우지(일본어: 中臣氏)였기에, 후지와라의 시조 또한 나카토미와 같은 아메노코야네노 미코토(일본어: 天児屋命)를 모시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가바네(姓)의 하나로 겐지(源氏)・헤이시(平氏)・다치바나 우지(橘氏)와 함께 '겐페이도시쓰(源平藤橘)'로 불리며 그 가운데서도 필두에 꼽힌 명문가이었다.

시조인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 614년 ~ 669년)는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덴지 천황으로부터 처음으로 후지와라노 아손(藤原朝臣)이라는 가바네를 수여받았으며, 가마타리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이후 일본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으로 특히 헤이안 시대(794년 ~ 1185년)의 정치를 섭정 및 관백의 지위를 통해 독점하였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구게(公家)가 있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각지에 지류가 있다.

나라 시대에 난케(南家)・홋케(北家)・시키케(式家)・교케(京家)의 네 집안으로 나뉘었는데, 헤이안 시대에는 후지와라 홋케가 황실과의 연척관계를 통해 셋칸정치(攝關政治)를 행하였다. 후지와라 씨 일족은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모두 혼세(本姓)인 '후지와라(藤原)'를 칭했지만,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이후로는 후지와라 대신 '고노에(近衛)', '다카쓰카사(鷹司)', '구조(九條)', '니조(二條)', '이치조(一條)' 등 묘지(苗字)에 해당하는 가명(家名)만을 썼으며, 공식 문서를 제외하고 '후지와라'라는 이름은 쓰이지 않았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 후지와라 씨가 조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압도적이었다. 여기에 지방으로 낙향한 후예들까지 합하면 일본에서는 천황가 및 그 계통을 이어받은 겐지·헤이시 등 다음으로 광대하게 퍼져 있는 유서 깊은 가문이다.


백제왕족 후손

토요타(とよた)씨와 오우치씨(おおうち)와 더불어 백제계 3대 성씨이다.

대표적인 백제 계통 도래인의 후손으로 여겨져 왔으며 자신들의 족보에도 그렇게 적어놓았다.

토요타(とよた)씨 족보 계보

목도왕(目圖王)과 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ㅡ일본 서씨(日本徐氏) 시조

임성태자(琳聖太子) (생몰년도 미상)

백제의 왕족으로 성은 부여씨(夫餘), 이름은 의조(義照)이다. 참고로 '義'는 토요타(とよた) 가문이 쓰던 돌림자이기 때문에 원래 이름은 그냥 '조(照)'다. 일본의 성씨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와 토요타(豊田とよた)씨,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의 시조이다. 26대 성왕 혹은 27대 위덕왕의 셋째 아들로 추정된다. 오우치씨(おおうち) 가문 족보 서문에 백제 성왕 또는 위덕왕을 '백제국 마한황제제왕'(百濟國 馬韓皇帝齊王)이라고 서술한 것이 눈에 띈다.

《일본서기》에는 등장하지 않고, 족보에만 기록된 인물인데, 스이코 덴노 19년(611)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이 성왕 또는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아좌 태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위덕왕 붕어 1년 전 일본에 사절단으로 파견되었다. 일본에서 타타라(多々良)씨를 하사받았으며, 칠성신 신앙을 비롯해 제철기술을 전파하고, 불교를 확산시켰다고 한다. 일설에는 일본 쇼토쿠 태자가 법명여래의 화신이라는 소문을 듣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일본 고류지에는 임성태자가 세웠다는 5층 탑과 백제 왕에게서 받았다는 검이 남아 있다고 한다.


미나모토(源), 타이라(平), 타치바나(橘)와 함께 일본의 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 중 하나. 미나모토와 타이라가 각각 겐지(원씨), 헤이시(평씨)로 불리듯 후지와라도 약칭으로 토우지(藤氏)로 불렸다.

아스카 시대를 대표하던 가문 소가씨가 을사의 변으로 몰락하자 그 자리를 채워앉아 헤이안 시대 때 섭정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렸다. 후지와라 외의 4대 본성 중 미나모토 가문과 타이라 가문은 황실에서 사성을 받고, 신적강하된 분가들로 여러 방계들이 있었으며, 타치바나 가문은 후지와라씨(ふじわら) 북가의 대두 이후 몰락했다. 4대 본성 중 유일하게 사성을 받은 황실 방계가 아닌 일반 귀족 가문이었다

선조는 현재 교토의 야마시나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던 토착 종교의 신관 가문인 나카토미(中臣) 가였다. 나가토미 가문은 자신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아메노코야네 신(天児屋命)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며 아메노코야네를 시조신으로 모셨다.

가문의 일원이었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다이카 개신에서 활약한 공로로 38대 덴지 덴노(天智天皇)로부터 669년에 후지와라씨를 사성받은 것이 시작이었지만 그 자신은 사망한 후에 후지와라(ふじわら) 씨를 사성받았기 때문에(669년) 실질적인 시조이자 번성하기 시작한 건 둘째 아들이었던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 때부터였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덴지 덴노로부터 하사받은 여인에게서 후히토를 낳았다고 하는데 그래서 후히토가 실제로는 덴지 덴노의 아들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다. 훗날 헤이케 정권의 수장이었던 타이라노 키요모리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다. 물론 진위 여부는 불명이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신의 외손이자 차기 황위 계승자로서 45대 쇼무 덴노가 되는 오비토(首皇子) 친왕에게 미인으로 유명하던 딸을 주어 비황족 출신으로는 최초로 황후(코묘 황후)로 세우는 데 성공하면서 외척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자기 혈통을 황위에 올리고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친왕을 올렸으나, 후손이었던 쇼무 덴노가 즉위하기 전에 본인이 죽었다.

후지와라노 후히토는 실질적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편찬 저자였는데, 현대의 일본 사학계를 헷갈리게 만든 만세일계를 만든 만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40대 덴무 덴노 이전까지 오키미(大王)였던 칭호를 원래부터 덴노(천황)로 기술한 건 애교고, 1대 진무 덴노~9대 카이카 덴노, 12대 케이코 덴노~진구 황후는 전부 허구로 추정되는 데다 고훈 시대 덴노 중에서도 22대 세이네이 덴노나 25대 부레츠 덴노는 가공인물설이 중론이다. 소가씨도 을사의 변 이전에는 26대 케이타이 덴노 직계와 대왕위를 공유하지 않았냐는 설이 있다. 소가씨 왕조설에서 33대 스이코 덴노와 35대 고교쿠 덴노/37대 사이메이 덴노를 기술한 것은 당대 45대 쇼무 덴노를 즉위시키는 과정에서 43대 겐메이 덴노와 44대 겐쇼 덴노 모녀를 거쳤고, 쇼무 덴노에게 잘 물려주라는 뜻에서 여왕-태자 구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후 지속적인 모략과 숙청을 통해 타치바나 가문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을 몰아내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후지와라노 후히토에게는 무치마로, 후사사키, 우마카이, 마로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각각 남(南), 북(北), 식(式), 경(京)의 네 가문으로 분가하여 후지와라 4가를 이루게 되었다. 후히토의 아들들은 729년 당시 덴무 덴노의 손자로서 조정의 실세였던 나가야 왕(長屋王)을 모함해 자결시키고 권력을 쥐었다(나가야 왕의 변). 그리고 그 권세를 바탕으로 누이 고묘시를 황후로 책봉하려 했다. 그 때문에 황족과 귀족들이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결국 코묘 황후로 책봉시켜 황족의 황후 독점을 깨뜨렸다. 이로써 외척 후지와라 가문의 위세가 시작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735년 형제 모두가 천연두로 일찍 죽어 권력은 나가야 왕의 아우 스즈카 왕(鈴鹿王)과 강력한 귀족이었던 타치바나(橘) 가문으로 넘어갔다. 후지와라 가의 4형제는 어린 자손들만을 남겼으나 이들이 장성하여 가문을 중흥시키게 된다. 그러나 740년 우마카이(藤原宇合)의 아들로서 '시키케(式家, 식가)'의 일원이었던 후지와라노 히로츠구(藤原広嗣)가 다자이쇼니(大宰少弐)로서 규슈의 다자이후로 부임하게 된 일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자, 그로 인해 시키케가 제일 먼저 몰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후지와라노 무치마로(武智麻呂)의 차남으로 후지와라 '난케(南家, 남가)'였던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역시 훗날 일가와 함께 몰락하게 되지만, 그는 재능이 뛰어나 고모였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의 후원을 받으며 형인 후지와라노 토요나리(藤原豊成)를 제치고 승승장구했다. 755년 강력한 타치바나 가문의 권신이었던 숙적 타치바나노 모로에(橘諸兄)를 실각시켰고, 757년 황위 계승 문제로 발생한 타치바나노 나라마로의 난(橘奈良麻呂の亂)을 진압하며, 모로에의 아들이던 타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를 비롯한 타치바나 일족을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에미노 오시카츠(惠美押勝)'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760년 다이죠다이진(태정대신, 太政大臣)이 되었으며, 사신이 추방당한 일로 원한을 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추진하면서 상당한 군사권도 손에 쥐어 권세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모이자 후원자이던 코묘 황태후(光明皇太后) 사후 상황으로 있던 46대 코켄 덴노(孝謙天皇) 및 그 최측근인 승려 도쿄(道鏡)와 사이가 멀어지던 그는 위험을 느끼고 결국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난케 일족이 두 번째로 몰락했다.

770년 퇴위와 복위라는 파란만장한 치세를 보내었던 48대 쇼토쿠 덴노(称徳天皇)가 붕어했는데, 덴무 덴노(天武天皇) 계열이던 여제는 자식이 없었기에 후계 문제가 대두되었다. 이때 후지와라 가문은 덴무 계열의 자손들 대신 선제의 제부이던 덴지 덴노계의 시라카베 왕(白壁王)을 추천하여 결국 60세의 시라카베 왕이 코닌 덴노(光仁天皇)로 즉위했다.

49대 코닌 덴노는 덴지계인 쇼무 덴노(聖武天皇)의 딸이자 코켄 덴노의 이복 언니이던 이노우에 내친왕(井上內親王)을 정실로 맞았었으나, 저주 사건이 일어나면서 황후와 황후 소생의 태자를 폐립하고, 웅진백제의 중흥 군주이던 무령왕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 소생의 야마노베 친왕(山部親王)을 황태자로 세웠다. 이 사람이 50대 간무 덴노(桓武天皇)로 781년 즉위해, 784년 나카오카쿄(長岡京)로 천도했다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 헤이안 시대를 개막했다. 그리고 덴지계를 옹립하고 통치에 협력했던 후지와라 가문은 덴노의 신임을 받으며 중용되었다.

이후 후지와라 가문 중에서도 후히토의 차남 후사사키(藤原房前)의 자손들인 '홋케(北家, 북가)'가 대두했다. 후지와라노 소노히토(藤原園人)는 정1품 사다이진(左大臣, 좌대신)까지 승진하는 등 조정의 중신으로서 율령(형법과 행정법) 정비와 토지의 사유 억제에 힘썼다. 소노히토 사후 활약한 후지와라노 후유츠구(藤原冬嗣)는 중신이자 외척으로서 가문의 지위를 다졌다. 후유츠구는 52대 사가 덴노(嵯峨天皇)의 신임을 받아 신설된 측근직인 구로도노토(蔵人頭, 장인두. 천황의 비서실장격. 조선으로 치면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훗날 사다이진에 올라 조정을 주도하며 《코닌 격식》(弘仁格式) 편찬을 주도하는 등 율령 정비에 공헌했다. 또한 후유츠구는 덴노의 외조부가 되어 그 권세를 강화했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야마구치씨(山口 やまぐち),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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