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지(尹履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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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9년(선조 12)∼1668년(현종 9)= 9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자는 중업(仲業)이고, 호는 추봉(秋峯)이며, 봉작(封爵)은 해은군(海恩君)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해창군(海昌君)윤방(尹昉)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판관(判官)한의(韓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윤변(尹忭)이다. 선조의 부마(駙馬) 해숭위(海崇尉)윤신지(尹新之)의 형이기도 하다. 효종 때 3번이나 형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송사(訟事)를 공정하게 처결(處決)하여 이름이 났으며, 90세까지 장수한 정경(正卿)으로 유명하다.

선조 ~ 광해군 시대 활동

1600년(선조 33) 과거에 실패하여 문음(門蔭)으로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었다. 1603년(선조 36) 양구현감(楊口縣監)으로 임명되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3년 상례(喪禮)를 마친 후 1606년(선조 39) 은산현감(殷山縣監)이 되었다.(『선조실록』 39년 6월 23일) 이어 적성현감(積城縣監)과 통진현감(通津縣監), 용안현감(龍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송곡집(松谷集)』 권10 「해은군윤공신도비명(海恩君尹公神道碑銘)」 이하 「윤이지비명」으로 약칭]

당시 조정에서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파(大北派)가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제자인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와 서경덕(徐敬德)의 제자 박순(朴淳) 등이 서인(西人)의 주류를 형성하여 대북파에 대항하였다. 당시 이이첨 등은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613년(광해군 5) 결국 <계축옥사(癸丑獄死)>를 일으켜 그해 6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을 사사(賜死)하고, 영창대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켜 강화도에 유배하였다가, 1614년(광해군 6) 봄에 살해하였다.

이때 윤이지의 아버지 윤방은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한 조정에 나아갈 생각을 접고, 1613년(광해군 5) 이후부터 서울 교외(郊外) 노량진(露粱津)의 강촌(江村) 집으로 물러나서 칩거하며 친지나 옛 벗들과 왕래하는 일조차 완전히 끊고 지냈다.

이런 가운데 윤이지는 1616년(광해군 8)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8세였다.[『방목(榜目)』] 급제 후 공조 정랑(正郞)과 호조 정랑(正郞)을 거쳐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윤이지비명」]

한편 대북파 이이첨 일당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죽일 때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인목대비도 아울러 폐비시키려고 하였으나, 대간에서 발론(發論)할 때 서인의 간관정광성(鄭廣成) 등이 반대하며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이이첨 일당은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을 다시 제기하고, 모든 문무백관들로 하여금 대궐의 뜰에 나와서 인목대비를 폐위하라는 상소를 광해군에게 올리는 <정청운동(庭請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것을 <무오정청(戊午庭請)>이라고 한다.

이때 윤이지의 아버지 윤방은 해창군이라는 신분 때문에 수의(收議)에 참여하여야 했으나 말미를 청하여 바로 성묘를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정청(庭請)이 벌어지자, 곧바로 대궐에 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병을 핑계 삼아 조정에서 물러났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그를 위태롭게 여겼으나 그는 끝까지 정청에 참여하지 않았다.[『택당집(澤堂集)』 권7 「영의정해창군윤공신도비명(領議政海昌君尹公神道碑銘)」] 그러자 양사(兩司)에서 합계(合啓)하여 정청에 불참한 윤방을 탄핵하여 멀리 유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윤이지는 영건도청(營建都廳)이었는데, 광해군(光海君)이 도감관(都監官)은 모두 다 나갈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므로, 그는 한 번도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이 정청에 불참한 사람과 그 자제들을 조사해서 아뢰라고 하자, 윤이지는 아버지 윤방이 화를 당할까봐 걱정하여 정청 반열에 참여하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의정부 사인(舍人)남궁 경(南宮檠)이 ‘나아갈 진(進)’자의 글자를 양일(兩日) 사이에 정청할 사람의 명단에 끼워 넣어 주는 바람에 윤방과 윤이지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 윤이지는 정청에 참여하였고, 아버지 윤방은 불참하였으나, 의정부 사인은 두 사람이 모두 참여한 것으로 보고하였기 때문이다.[「윤이지비명」]

그 뒤에 윤이지는 내섬시(內贍寺)정(正)봉상시(奉常寺) 정에 임명되었는데, 조복양(趙復陽)은 윤이지의 신도비명에서, “당시 이이첨 일파가 아버지를 해치고자 하였으므로 형세에 쫓겨 억지로 산관(散官)의 자리에라도 나간 것이지 본의는 아니었다”고 해명하였다.[「윤이지비명」] 이때 윤이지의 아버지 윤방은 5~6년 동안 서울 노량진 강촌에 은거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인조실록』 18년 8월 8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후 이조에서 윤이지를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으로 추천하자, 그는 이조의 관리를 만나 “나의 이름이 정청의 명단에 들어있는데, 청망(淸望)에 올리다니. 새로운 임금의 정치에 누를 끼칠까봐 두렵습니다”라며,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담당 관리가 감탄하면서 “괜찮습니다. 과실을 보면 인후(仁厚)함을 안다고 하는데, 슬쩍 사실을 감추고 가만히 청요직(淸要職)을 바라는 사람에 비하면 훨씬 낫습니다” 하였다.[「윤이지비명」] 그 뒤에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임명되었고,[『계곡집(谿谷集)』 권31] 정3품 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는데, 폐단을 없애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에 어사(御史)정홍명(鄭弘溟)이 그의 치적이 제일이라고 평가하였고, 경연(經筵)의 신하들 또한 그가 평범한 인재가 아니라고 칭찬하자, 인조는 명신(名臣)의 자제인 그를 더 시험해보고자 이듬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하였다.[「윤이지비명」],(『인조실록』 2년 8월 3일)

그리고 1625년(인조 3) 10월 그를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승정원 도승지조익(趙翼) 및 승정원 우부승지이민구(李敏求)와 가까운 친족이었기 때문에 서로 상피(相避) 관계에 해당하였으므로, 병조 참의(參議)로 전임되었다.(『인조실록』 4년 7월 19일) 이때 병조 판서장만(張晩)이 윤이지를 군적청(軍籍廳) 당상관으로 삼아 군적(軍籍)을 관리하게 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아버지 윤방은 영의정에 임명되어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고, 그는 총융사(摠戎使)로 임명되어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 오랑캐를 수비하였다. 그해 4월 승정원 우부승지에 다시 임명되었다가,(『인조실록』 5년 4월 25일) 7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갔다. 임기가 차자 교대되어 1629년(인조 7) 1월 다시 병조 참의가 되었고, 윤4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인조실록』 5년 7월 2일) 이때 도내의 새로 개간된 전결(田結) 12,000여결(結)을 찾아내 호조에 보고하여,(『인조실록』 7년 11월 18일) 국가의 조세(租稅) 확보에 기여하였다.

1630년(인조 8) 8월 호조 참의가 되었고, 1631년(인조 9) 특지(特旨)로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인조실록』 9년 12월 11일) 의금부 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윤이지비명」] 1632년(인조 10) 4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으나. 윤이지는 광해군 때 무오정청에 참여한 잘못이 있다고 상소하며 체직시켜 줄 것을 거듭 요청하였다.(『인조실록』 10년 4월 13일) 그리하여 그해 6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체직되었다가, 10월 의금부 동지사를 겸임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 10년 6월 9일] 이어 1633년(인조 10) 강화유수(江華留守)를 거쳐, 1635년(인조 13) 8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3년 8월 29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윤이지는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오랑캐 군사와 싸우며 성을 지켰다.[「윤이지비명」] 병자호란 당시 아버지 윤방은 묘사(廟社 : 종묘사직)의 제조(提調)가 되어 종묘의 신주(神主) 40여 개를 모시고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과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강화도로 먼저 피난하였다. 그러나 강화도가 오랑캐 군사에게 함락당하는 난리를 겪는 와중에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신주(神主)를 잃어버렸다.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한 직후, 윤방은 신주를 잃어버리는 잘못을 저질렀다고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였고,(『인조실록』 15년 4월 3일) 1639년(인조 17) 이 일이 다시 문제가 되어 황해도 연안(延安)으로 유배되었다.(『인조실록』 17년 6월 5일) 이때 윤이지가 아버지를 모시고 연안으로 갔으나, 2개월 뒤 윤방이 유배에서 풀려나, 노량진의 강촌에서 우거하면서, 그가 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살았다.[「윤이지비명」]

1637년(인조 15) 2월 강화부사(江華府使)가 되어,(『인조실록』 15년 2월 17일) 전쟁으로 황폐해진 강화성을 수리하고 백성들을 무휼(撫恤)하였으며, 그해 8월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인조실록』 15년 8월 23일) 1638년(인조 16) 9월 승정원 도승지에 다시 발탁되었으나, 11월 사간원에서 “도승지윤이지는 본래 용렬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다른 사람의 의견대로 따라 하는 바가 많으므로, 승정원의 장관으로 있을 수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라고 탄핵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잘못이 없고, 재능이 많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인조실록』 16년 9월 21일),(『인조실록』 16년 11월 21일) 그러나 대간에서 그를 연달아 탄핵하고, 그 또한 거듭 사직을 청하자, 인조가 마침내 체직시켰다.[「윤이지비명」]

1640년(인조 18) 윤1월 또 다시 윤이지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되었고, 2월 비변사(備邊司)당상관(堂上官)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8년 윤1월 11일) 그해 8월 아버지 윤방이 세상을 떠나자 3년 상례(喪禮)를 치른 후, 1643년(인조 21) 형조 참판과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아버지의 봉작을 이어받아 해은군(海恩君)에 습봉(襲封)되었다.[「윤이지비명」] 1645년(인조 23) 8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인조실록』 23년 8월 2일) 사헌부에서 “평안도관찰사윤이지는 여러 차례 관찰사를 역임하여, 비록 일을 처리하는 국량이 있다고 칭찬하지만, 지금은 늙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가 관찰사의 직책을 감당치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으니,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그러나 인조가 따르지 않았는데, 윤이지는 여론이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줄을 알고 극력 사양하여 체직되었다.(『인조실록』 23년 8월 13일) 1646년(인조 24) 2월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임명되었고, 공신의 자제들을 회맹(會盟)할 때 정2품 하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었다.(『인조실록』 24년 2월 4일) 함경도관찰사로 재임할 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 구휼(救恤) 정책을 펴서 많은 사람을 구활(救活)하였다. 그러나 윤이지 자신은 마침 풍토병에 걸려 체직되어 돌아오게 되었는데, 행장(行裝) 속에 북방의 토산품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북방의 백성들이 그를 가장 청렴한 사람으로 꼽았다.[「윤이지비명」] 1648년(인조 26) 나이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효종 ~ 현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8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1650년(효종 1) 2월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즉위년 8월 1일),(『효종실록』 1년 2월 22일) 이때 옥사를 맡아 신속하고 공평하고 처결하니, 좌의정김상헌(金尙憲)이 “이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대체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는데,[「윤이지비명」] 남양군(南陽君)홍진도(洪振道)가 박준(朴濬)의 노비를 빼앗아 차지하면서 벌어진 노비 송사 사건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1651년(효종 2) 3월 관작을 삭탈 당하였다. 그러나 그해 11월 다시 형조 판서에 복귀하였다.(『효종실록』 2년 3월 9일),(『효종실록』 2년 3월 16일),(『효종실록』 2년 11월 4일)

1653년(효종 4) 6월 또 다시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4년 6월 7일) 당시 역관(譯官)들이 사사로이 삼화(蔘貨)를 중국으로 가져가서 판매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러한 일이 나라를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하여, 효종은 역관 김귀인(金貴仁) 등 서너 명을 가두고 추문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김귀인이 심문을 받는 중에 형장(刑杖)을 맞다가 죽는 일이 발생하면서 형조 판서윤이지는 다시 관작을 삭탈당하고 문외로 출송(黜送)되었다.(『효종실록』 4년 윤7월 4일) 1654년(효종 5) 1월 효종이 승정원 승지(承旨)에게 “전 판서윤이지는 이미 벌을 받을 만큼 받았고 대신들도 그의 어려운 사정을 말하였다. 앞으로 또 기로소의 연회도 있으니, 그를 석방하도록 하라”고 하교 하였다.(『효종실록』 5년 1월 16일) 이에 윤이지는 4년 만에 원봉(原封)을 돌려받고,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어, 의금부 지사까지 겸임하게 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여 체직되었다.[「윤이지비명」]

1658년(효종 9) 80세의 나이에 정2품 상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는데, 나라에서 쌀과 고기, 세견(細絹) 등을 넉넉히 하사하였다.[「윤이지비명」] 그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정신이 더욱 맑아져 보고 듣는 것이 옛날과 똑같았지만, 스스로 ‘극노인(極老人)’이라는 것을 인식하여 벼슬할 뜻을 버리고 한결같이 평안한 마음으로 조용히 지냈다. 손님이 찾아오면 친소(親疎)나 소장(少長)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술을 차려오게 하여 함께 마시고 담소하니, 화기(和氣)가 감돌았다. 이렇게 10여 년을 지내면서 청한(淸閑)한 복을 누리자, 사대부 집안에서 서로 칭송하기를, “그런 나이까지 산 분도 있고, 그런 건강을 누린 분도 있지만, 자손들과 그렇게 마음껏 즐거움을 누린 이는 없다”며, 모두 부러워하였다. 1668년(현종 9) 90세로 종1품 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가자(加資)되고, 돈녕부(敦寧府) 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 9년 1월 20일) 그해 12월 20일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90세였다.[「윤이지비명」]

저서로는 『추봉집(秋峯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사람됨이 온화하고 솔직하여 전혀 꾸밈이 없었다. 평소에 말수가 적고 웃는 일도 드물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일찍이 화를 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분개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의 집안이 워낙 훌륭하여 세상에서 이를 따를 가문이 없었지만, 자기 집안 자랑을 남에게 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가풍을 지켜서 남에게 관대하고 후덕하였다. 그는 큰 도(道)와 몇 개 군현(郡縣)의 수령관을 지냈으나 가산(家産)이 조금도 늘지 않았다. 평생 청렴하고 근신하는 태도를 지켰는데, 비록 나이가 늙어도 그 신조는 변하지 않았다. 또 그는 남보다 특별한 짓을 하여 돋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 있을 때 유별나게 자기 주장을 내세우거나 반대파를 헐뜯지 않았으므로 벼슬이 판서에 머물고, 할아버지 윤두수, 아버지 윤방처럼 정승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뒤에 예조 판서와 호조 판서의 물망(物望)에 올랐으나, 반대파의 방해를 받아서 선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반대파 대신들을 태연하게 대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장자(長者)’라고 불렀다.[「윤이지비명」]

1648년(인조 26) 그의 나이 70세 때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다. 본래 고려 시대 그의 10대조 윤지표(尹之彪)가 조정의 정경(正卿) 가운데 나이 70세가 된 두세 명의 대신들과 함께 기영회(耆英會)를 조직하자, 나라에서 그들의 장수를 축하하여 잔치를 베풀어 준 것이 기로소(耆老所)의 기원이었다. 조선 시대 들어와서 기로사(耆老司)를 설치하여 조정의 70세 이상의 정경들을 융숭하게 대우하였는데, 문신(文臣) 가운데 나이가 70세에 이르고, 벼슬이 정경 이상이면,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의 종조부 윤근수(尹根壽)와 아버지 윤방, 그리고 그의 아우 윤흔(尹昕)윤휘(尹暉) 등이 잇따라 기로소에 들어가니, 당시 50여 년 동안에 해평 윤씨 가문에서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이 여섯 사람이나 되었다.[「윤이지비명」]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이귀령(李貴齡)은 향년 94세이고, 황희(黃喜)·김사목(金思穆)은 모두 90세, 정호(鄭澔)는 89세, 유관(柳寬)·정인홍(鄭仁弘)·이원익(李元翼)·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허목(許穆)은 모두 88세였다”고 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최장수한 정경은 이귀령인데, 윤이지는 황희(黃喜)·김사목(金思穆)과 함께 두 번째로 장수한 정경이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30]

병조 참의가 되었을 당시 병조 판서장만(張晩)이 윤이지를 능력 있는 인물로 보고, 병조의 사무를 모두 맡겼을 뿐만 아니라, 군적청 당상관으로 차출하여 군적을 철저히 관리하게 하였다.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원익이 이를 듣고 칭찬하기를, “윤이지의 재주는 내가 일찍이 시험하였습니다. 반정(反正) 직후에 죄수가 옥에 가득했는데, 그가 문사랑(問事郞)이 되어서 왕에게 자세하고 민첩하게 보고하였으며, 왕명을 받아 죄수들의 죄를 일일이 조사하여 신속하고 공평하게 처리하였습니다” 하였다.[「윤이지비명」]

그가 죽고 난 다음에 사평(史評)을 보면,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서 일찍 벼슬길에 올라서 종1품의 지위까지 이르렀으나, 사대부들이 그를 매우 천대하였으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하였고,(『현종실록』 9년 12월 21일) 또 “명가의 자손으로 일찌감치 조정의 벼슬에 올라서 중외의 벼슬을 역임하여 지위가 높은 품계에까지 올랐으나, 사람됨은 매우 경망스러웠다”고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9년 12월 21일) 이것은 노론의 사관들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하지 않은 윤방 부자를 몹시 부정적인 눈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의 간지에 추가한 후대 사관의 사평을 보면, “윤이지는 윤방의 아들로서 사람됨이 겉으로는 너그러운 듯하나, 그 속은 간사하여 바르지 않았는데, 다만 백성을 다스리는 일만은 잘하여 일찍이 수령으로 있을 때 상당한 치적(治績)이 있었다” 고 하였다.(『인조실록』 2년 8월 3일) 역시 노론의 사관들은 청(淸)나라가 실세임을 인정하고 청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윤방 부자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효(靖孝)이다.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동도(東道) 오음리(梧陰里)의 선영에 있고, 조복양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이지비명」]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참판김상준(金尙寯)의 딸인데, 자녀는 8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게(尹垍)는 광흥창(廣興倉)수(守)를, 차남 윤강(尹堈)은 사평(司評)을, 3남 윤식(尹埴)은 사과(司果)를, 4남 윤우(尹堣)는 현감(縣監)을, 5남 윤점(尹坫)은 좌랑(佐郞)을, 6남 윤개(尹塏)는 첨지(僉知)를 지냈고, 7남 윤성(尹城)은 진사(進士)이며, 8남 윤전(尹㙉)은 유학(幼學)이다. 외동딸은 승정원 도승지송시길(宋時吉)에게 출가하였다.[「윤이지비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계곡집(谿谷集)』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서계집(西溪集)』
  • 『송곡집(松谷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해사록(海槎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