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길(宋時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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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7년(선조30)∼1656년(효종7) = 60세]. 조선 중기 광해군∼효종 때의 문신. 자는 중립(仲立), 호는 호은(壺隱)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중추부 지사송일(宋馹)이고,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유영성(柳永成)의 딸이다. 형조 판서윤이지(尹履之)의 사위이다.

광해군 때 과거 부정 항의

1615년(광해군7) 식년(式年)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19세였다.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다가, 1617년(광해군9) 나이 21세 때 성균관 유생들과 문과에 응시하였다가 과장에서 일어난 난동 사건의 주모자가 되었다. 당시 문과 이소(文科二所)에서 중장(中場)의 출제를 내어걸자, 유생 한두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지르기를 “미리 낸 글제[預出之題]다.”라고 하였다. 이에 흥분한 송시길(宋時吉)과 신집(愼㙫) 등 6인이 일어나서 시관(試官)에게 항의한 다음 문지기 군사를 마구 구타하고 과장(科場)의 자물쇠를 두들겨 부수고 나가자 온 과장 안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면서 난동을 부렸다. 시관(試官)이 맨 먼저 난동을 부린 5, 6인을 잡아서 금란소(禁亂所)에 넘겼으며, 그 나머지는 진정시켜서 그대로 제술(製述)하게 하였다. 보고를 받은 광해군이 노하여 주동자를 가려내게 하자, 송시길은 자기가 주동자라고 솔직히 고백하였고, 이에 과거를 보지 못하도록 정거(停擧)를 당하였다. 이것은 당시 과거의 부정을 드러낸 한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인조 시대 활동

정거가 풀려 1623년(인조1)에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인조 때 6조의 요직으로 공조 · 예조 · 병조의 좌랑(佐郞)과 호조 · 예조 · 병조의 정랑(正郞)을 역임하였고, 대간(臺諫)의 관직으로 사간원 정언(正言)과 사헌부 지평(持平) · 장령(掌令)을 여러 번 역임하였다. 그 사이에 성균관 직강(直講) · 사예(司藝)와 시강원 필선(弼善)을 거치고, 예빈시(禮賓寺) · 군기시(軍器寺) · 상의원(尙衣院)정(正)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관(郎官)을 여러 차례 겸임하였다. 부임하는 곳마다 상관이 그의 재능을 인정하였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유도대신(留都大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발탁되어 도성(都城)을 지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 뒤 영평현령(永平縣令)과 풍덕부사(豐德府使)를 지냈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를 호위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청(淸)나라 군사와 싸우면서 갖은 고통을 겪었다. 이듬해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나갔는데, 호란 때 호종(扈從)한 공로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639년(인조17)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우부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쳐서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고, 단산군수(端山郡守)로 나갔는데, 원주목사 때처럼 양친을 모시고 갔다. 1642년(인조20)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치르고 나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금성현감(錦城縣監)에 임명되어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였는데, 도적떼를 잡고 치안을 유지하였으므로, 1646년(인조24) 정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1648년(인조26)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다가, 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효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3)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어 다시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653년(효종4)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형조 참판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겸임하였다. 경기도관찰사로 나가서 세도가(勢道家)의 부탁을 거절하고 궁가(宮家)시장(柴場)을 보호하려다가 의금부에 수감되고 파직되었다. 1654년(효종5) 사면을 받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전직되었으나, 갑자기 중풍(中風)에 걸려 사직하였다. 1655년(효종6) 모친상을 당하여, 짚자리에 앉아 상례(喪禮)를 극진히 치르다가, 병이 깊어져 1656년(효종7) 9월 6일에 상중에 죽었는데, 향년이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송시길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화평한데다가 효도와 우애가 독실하고 지극하였다. 평소 사람들과 사귀지 않고 조용히 지내면서 영욕(榮辱)과 득실(得失)을 마음속에 두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고, 14,5세가 되자, 이미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통달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할 적에 오직 간결(簡潔)하고 관대(寬大)하게 처리하여 서리와 백성들의 인심을 얻었으므로, 그가 임지를 떠난 뒤에도 그들이 추모하였다. 지위가 재상의 반열에 오르고 여러 차례 큰 고을을 맡았으나, 의복도 화려하지 않았고 가산(家産)도 늘지 않았으므로, 죽은 뒤에 집에 한 섬의 곡식도 없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동쪽 실촌(實村)의 묘원에 있는데, 부인이 곁에 묻혔다. 그의 친한 친구 설봉(雪峰)강백년(姜栢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7) 죽은 뒤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훈되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는 형조 판서윤이지의 딸이자 영의정윤방(尹昉)의 손녀로, 자녀는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송박(宋搏)은 군수를 지냈고, 차녀는 승지(承旨)박세성(朴世成)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이조 판서홍만용(洪萬容)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설봉유고(雪峯遺稿)』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백주집(白洲集)』
  • 『송곡집(松谷集)』
  • 『남계집(南溪集)』
  • 『죽소집(竹所集)』
  • 『현주집(玄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