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成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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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7년(연산군3)∼1579년(선조12) = 83세]. 조선 전기 중종~선조 때의 대표적 유일(遺逸). 자는 건숙(健叔), 호는 대곡(大谷)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주거지는 서울에서 충청도 보은(報恩)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부정(副正)성세준(成世俊)이고, 어머니 박씨(朴氏)는 사간(司諫)박효원(朴孝元)의 딸이다. 대사헌성세정(成世貞) · 성세순(成世純)의 조카이고, 유일 성수침(成守琛) · 성수종(成守琮)의 4촌이다.

명종 시대 은둔 생활

1531년(중종26) 사마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서 수학하다가, 음보(蔭補)로 사직서(社稷署)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545년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서,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냈다. 이때 윤임의 대윤(大尹)에 속하였던 사림파의 많은 선비들이 화를 당하였는데, 그의 중형(仲兄) 성우(成遇)도 여러 선비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서 아내의 고향인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으로 이사하였다. 그의 집에서 몇 리 떨어진 속리산(俗離山) 속에 경관이 수려한 계곡이 있었는데, 그 곳에다 대나무집[竹軒]을 짓고 소를 타고 오가면서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기 호를 ‘대곡(大谷)’이라 하였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攝政)에서 벗어난 명종이 친정(親政)을 하면서 외삼촌 윤원형을 몰아내고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려고 노력하였다. 1566년(명종21) 명종이 효도 · 우애 · 화목 등 6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지방의 유일을 천거하게 하였는데, 이때 추천되어 사재감(司宰監)정(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유일로서 내외의 존경을 받았다. 또 명종 말년에 두 번이나 임금의 인대(引對)하라는 명을 받고 서울까지 왔으나, 병을 핑계로 임금을 알현하지 아니하고 다시 보은으로 돌아갔다.

명종 때 6조의 행실을 갖춘 유일

명종이 성년이 되어 친정하게 되자, 전국에 새로운 인재를 발굴하여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고 계획하였다. 1566년(명종21) 명종이 이조에 전교하기를, “생원・진사 중에서 효도 · 우애 · 화목 · 연친(婣親: 인친에게 잘함) · 신임 · 구휼(救恤)의 ‘6조(條)의 행실’을 구비한 유일을 찾아내어, 4대신(大臣)과 의논하여 선발해서 추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에서 성운 · 이항(李恒) · 남언경(南彦經) · 한수(韓脩) · 김범(金範) · 임훈(林薰) 등을 추천하였고 이에 성운은 사재감 정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실록의 다른 기록에는 6명의 유일 중에서 임훈 대신 남명(南冥)조식(曺植)을 꼽기도 한다.

성운이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자, 명종은 약과 음식물을 보내도록 하였다. 나라에서 약품과 음식물을 보내주자, 그는 서울까지 올라와 사은하였으나 병이라고 일컫고 임금을 알현하지는 않고 보은으로 돌아갔다. 그해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 의영고(義盈庫)주부(主簿), 조지서(造紙署)사지(司紙)에 연달아 임명되었고, 그때마다 성운이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조식은 그 상소를 읽어보고 “신병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임금에게 병을 핑계되고 사직한다는 말인가?”라고 비판하였다고 한다.

선조 시대 은둔 생활

선조가 즉위한 다음, 여러 번 성운에게 관직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였다. 1567년(선조즉위) 처사(處士)조식과 함께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569년(선조2)에도 상서원(祥瑞院) 판관(判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3년(선조6) 한수 · 남언경과 함께 3품직에 불차탁용(不次擢用)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때 선조가 성운의 집이 가난하여 겨울옷이 없다는 말을 듣고 표리(表裏) 한 벌을 하사하였다. 또 1578년(선조11) 사재감 정에 임명하면서, 성운이 늙고 가난하다는 말을 듣고 쌀과 매[鷹]를 하사하였다. 성운은 선조에게 상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물품 하사를 사례하였다. 1579년(선조12) 그가 병이 났다는 말을 듣고 선조가 내의원(內醫院)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치료하게 하였으나, 그해 5월 26일 그가 노병으로 죽고 난 다음에 의원이 도착하였다. 그때 나이가 83세였다. 성운이 생시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은 성제원(成悌原), 남명조식,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 토정(土亭)이지함(李之菡)인데, 그들은 모두 세상에 보기 드문 명현(名賢)들이었다.

저서로는 『대곡집(大谷集)』 3권 1책이 있다. 유집(遺集) 몇 권이 세상에 전하고 있다.

성품과 일화

성운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온순하고 공손하며 의지와 기개가 호탕하고 뛰어났다. 행동은 선비답고 고상하여, 일찍이 남의 잘못을 말한 적이 없었다. 남의 착한 일을 들으면 칭찬하였으며 반드시 성취하도록 격려하였다. 사람을 상대할 때에는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가리지 않고 화기애애하게 대하고 성의를 다하였다. 기풍이 깨끗하고 굳세어서 사물에 초연하였다. 영의정노수신(盧守愼)은 연석(筵席)에서 “성운은 행실에 하나도 흠결이 없다.”라고 칭찬하였고, 중봉(重峰)조헌(趙憲)은, “세상을 구원할 만한 고재(高材)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는 학문을 할 적에 오로지 존양(存養)과 정색(精索)에 힘썼기 때문에 그 말에 조리가 있고 행실에 당당함이 있었으며, 문장도 또한 절묘(絶妙)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사도(師道)를 자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즉석에서 거절하였지만, 만일 스스로 분발하여 배우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자상하게 가르쳐서 깨우쳐 주었다.

그의 당질(堂姪) 성혼(成渾)은 그의 묘(墓)에 기록하기를 “선생은 40년간 산림 속에서 살았다. 선생이 대문을 닫고 들어앉아 뜻을 구한 것은 반드시 그만한 학문이 있었기 때문이며, 겸손히 물러나서 확고하게 지조를 지킨 것은 반드시 그만한 소견이 있었기 때문이며, 늙어가는 것도 잊고 산천의 아름다움을 구경한 것은 반드시 그만한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산간 계곡에서 노닐며 거문고를 타고 책에 묻혀서 스스로 즐거워하는 것만을 보았을 따름이지, 그의 내면에 간직된 세계에 대해서 엿보거나 헤아린 사람이 적었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묘소는 충청도 보은(報恩) 동쪽 종곡(鍾谷)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부사직(副司直)김벽(金碧)의 딸인데, 자식이 없어서 조카 김가기(金可幾)를 데려다가 길렀다. 성운은 김가기를 중형 성우(成遇)의 딸과 혼인시켰다. 부부가 각기 조카를 후사로 선택한 셈이었으나, 주변에서는 후사로 인정하지 않았다. 인조 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고봉집(高峯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면암집(勉菴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