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세순(成世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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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3년(세조9)~1514년(중종9) = 52세]. 조선 전기 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태순(太純)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인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김포현령(金浦縣令)성충달(成忠達)이고, 어머니 배천조씨(白川趙氏)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조원수(趙元壽)의 딸이다. 한성부윤(漢城府尹)성득식(成得識)의 손자이며, 우계(牛溪)성혼(成渾)의 조부이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2년(성종2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를 거쳐, 형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1497년(연산군3)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교리(校理) · 응교(應敎) · 직제학(直提學)의 차례로 승진하였다. 전후 6년 동안 홍문관에 있으면서 강설(講說)을 잘하고 계옥(啓沃)한 바가 많았으므로, 시론(時論)에서 그를 추앙하였다. 그 사이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복을 입었으나,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논란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는 의견을 내기를 “지금 김종직의 글을 보건대, 말이 너무도 부도(不道)하니, 난역(亂逆)으로 논죄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김종직 일파를 공박하였다. 이리하여 1503년(연산군9)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는데, 이듬해 우승지로 승진되었으나, 병이라 핑계되고 사임하였다. 연산군의 포악함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 화가 미칠까봐 두려워하여 병을 칭탁하고 사면하였던 것이다. 1504년(연산군10)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연산군이 죄도 없는 심순문(沈順門)을 죽이려고 하자, 대간(臺諫)의 우두머리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과감하게 직언하여, 심문순이 죄가 없다고 아뢰었다. 연산군이 그의 의견을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그에게 벌을 주지도 않았다. 연산군이 그를 너그럽게 용서한 것은 그가 왕비 신씨(慎氏)의 먼 친족이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1505년(연산군11) 전라도관찰사로 나갔다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고, 다음해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어, 성절사(聖節使)로서 명(明)나라에 가서 무종(武宗)정덕제(正德帝)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이 즉위하자, 그가 연산군 때 직언(直言)한 신하라는 것이 인정되어, 한성부 좌윤(左尹)에 임명되었다. 1507년(중종2)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를 편찬하는 수찬관(修撰官)에 임명되었고,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공조 참판이 임명되었다. 1508년(중종3)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사헌부에서 폐주(廢主)의 총애를 받은 것을 여론이 그르게 여기고 있다며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니, 중종이 체임하게 하였다. 1509년(중종4)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중추부 수(守)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이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1514(중종9) 1월 27일 병으로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52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세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정하고 자질이 민첩하며 재간(才幹)과 도량(度量)이 넓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과 여색(女色)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리 다급해도 당황하지 않았으며, 일을 당해서는 총명하고 과단성 있게 처리하였고 생각하는 바를 바로 실행하였다. 신의(信義)로써 사람을 대했으나, 품행이 고결(高潔)하여 쉽게 남과 교분을 맺지 않았다.

심순문에 대해 연산군에게 간언한 일화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전한다. 그가 연산군 시절 대사간으로 있을 때 연산군(燕山君)이 죄도 없는 심순문을 죽이려고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3정승 이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때에 성세순이, “우리들이 간관을 맡고 있으면서 어찌 아무 말도 못하고 잠잠히 있겠는가.” 하니, 헌납(獻納)김극성(金克成)과 정언이세응(李世應)은 이에 적극 호응하였다. 나머지 대간들은 심순문과 같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반대하였으나 김극성과 성세순은 태연히 담소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큰일이니, 각자 자기 뜻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오늘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고, 그 다음은 정언일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심문순이 죄가 없는 연유를 아뢰니, 연산군이 비록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지는 않았으나 또한 그들을 벌주지도 않았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사숙(思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향양리(向陽里) 거우(居愚)의 언덕에 있고, 손자의 친구 율곡(栗谷)이이(李珥)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7) 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는 사복시(司僕寺)정(正)김극니(金克怩)의 딸인데, 좌의정김국광(金國光)의 손녀이다. 자녀는 4남 1녀를 두었는데, 3남 성수종(成守琮)은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고, 2남 성수침(成守琛)의 아들이 유명한 거유(巨儒)성혼(成渾)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율곡전서(栗谷全書)』
  • 『기재잡기(寄齋雜記)』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잡록(海東雜錄)』
  • 『홍재전서(弘齋全書)』
  • 『우정집(憂亭集)』
  • 『묵재집(默齋集)』
  • 『충재집(冲齋集)』
  • 『남명집(南冥集)』
  • 『월사집(月沙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