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여주(崔汝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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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2년(연산군 8)∼1567년(명종 22) = 66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재령군수(載寧郡守)이다. 자는 거천(巨川), 호는 삼절당(三節堂)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훈련원(訓練院) 도정(都正)을 지내고 참판(參判)에 추증된 최경(崔瓊)이고, 어머니 덕수이씨(德水李氏)는 황주 판관(黃州判官)이효종(李孝宗)의 딸이다. 증조부는 예조 좌랑(禮曹)최정(崔埥)이고, 조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최문손(崔文孫)이다.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최만리(崔萬理)의 현손이고, 찬성(贊成)최황(崔滉)의 아버지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충암(冲菴)김정(金淨)의 문인이다.

중종~명종 시대의 활동

1519년(중종 14) 그의 나이 18세 때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 조광조와 김정 등 ‘기묘명현(己卯名賢)’들이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할 뜻이 없어 과거 공부를 단념하였다. 부모의 권유로 1534년(중종 29) 33세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방목』) 이때 비로소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수학하였으나, 대과(大科)에 오르지 못하였다.

1540년(중종 35) 중종이 동반(東班) 정3품 이상 당상관(堂上官)서반(西班) 2품 이상 대신(大臣)들에게 각각 일사(逸士)를 천거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사간(大司諫)최보한(崔輔漢)이 생원 최여주을 천거하였다. 이때 40여 명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6품의 주부(主簿)와 7품의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1545년 7월 중종이 죽고 명종이 즉위하자,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소윤(少尹)윤원형(尹元衡)·이기(李芑)가 대윤(大尹)윤임(尹任)과 사림파(士林派)의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체포하고 국문(鞫問)할 때 최여주는 의금부 도사로 실무를 맡아보다가, 본의 아니게 소윤 일파에 휩쓸려 들어간 셈이 되었다. 그와 친한 허자(許磁)도 같은 처지였는데, 두 사람은 <을사사화>의 피해를 줄이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찬성허자가 마침 친한 친구 최여주에게 한탄하기를, “을사사화로 녹훈(錄勳)까지 받게 되어서 마음속으로 항상 괴로워한다.” 하자, 최여주도 그 말에 깊이 동의하였다. 그러나 최여주가 무심코 영의정이기에게 허자의 한탄하는 말을 옮겼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영의정이기가 심복 대사헌(大司憲)진복창(陳復昌)·사간이무강(李無疆) 등에게 최여주의 말을 증거로 삼아 허자를 탄핵하게 하고 홍원(洪原)으로 귀양보냈다. 이리하여 최여주는 <을사사화>로 인하여 사림파(士林派) 인사로부터 비난을 받고, 또 친한 친구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하여, 평생 고민하면서 고통 속에서 살았다.

그 뒤에 종묘서(宗廟署)직장(直長)이 되었다가, 종부시(宗簿寺)주부(主簿)를 거쳐, 장원서(掌苑署)장원(掌苑)이 되었다. 1554년(명종 9) 경상도 성주목 판관(星州牧判官)이 되었는데, 공부(貢賦)를 감독하여 수납할 때 관가에서 너무 많이 거두어 간다고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사간원(司諫院)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판관최여주는 관청의 온갖 공부와 잡물(雜物)을 감독하여 수납할 때 부과한 것의 5~6배가 되지 않으면 수납하지 않고, 기름이나 꿀 따위는 되나 말의 밑바닥에다 구멍을 뚫어서 줄줄 새도록 하고서 수량을 계산하므로, 온 고을 백성들의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합니다.” 하였다. 그때 판관최여주는 성주목사(星州牧使)나사훤(羅士愃)과 함께 고을의 공장(工匠)을 나누어 점유하고 자기의 사용(私用) 물건을 만들게 하였으므로, 조정에서 두 사람을 모두 파직시켰다.(『명종실록(明宗實錄)』 참고.)

그 뒤에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으로 복직되었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사를 거쳐, 외직으로 나가서 금천 현감(衿川縣監)·풍덕 군수(豐德郡守)·재령 군수(載寧郡守)를 역임하였다. 1567년(명종 22) 정월 25일 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관직이 현달(顯達)되지 못하였으나,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하였다. 또 그는 조광조와 김정의 학통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여 학문적으로 명성을 떨치지 못하였으나, 문장과 글씨에 능하다고 칭찬 받았다. (『소재집(蘇齋集)』 권10 「유명조선국통훈대부 행재령군수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최공여주묘비명(有明朝鮮國通訓大夫 行載寧郡守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崔公汝舟墓碑銘)」참고.)

성품과 일화

노수신(盧守愼)이 지은 그의 비명을 보면, “그는 남과 곧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 하고, 남의 좋은 말 한 마디를 들으면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므로 소인배의 모함에 잘 넘어갔다.” 하였다. 그러나 1554년(명종 9) 1월 사간원에서 탄핵할 때 그의 성품을 언급하기를, “그의 성품은 거만해서 남과 서로 화목하지 못한다.” 하였다.(『명종실록』 참고.)

그의 비명에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최여주의 머리는 총명하고 영민하여, 글을 몇 번만 읽으면 곧바로 외워버렸고, 또 글씨를 쓰면 옛 사람의 필법에 따라서 글자가 날아갈 듯이 힘이 있었다. 또 벼슬에 나아가서 업무를 처리할 때 재주가 있는 서리로 하여금 번잡한 업무를 맡도록 하고, 본인은 항상 큰 것만 챙겼다.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미 학문 세계를 알아서 정암조광조와 충암김정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다. 조광조가 『옥화록(玉華錄)』이라는 문인록(門人錄)을 저술하면서 최여주에 대한 주석에서, ‘젊은 나이에 선(善)을 지향하는 사람이다.’고 하여, 그에게 학문의 대성을 기대하였다. 또 김정은 관청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 반드시 말을 보내어 어린 최여주를 자기 집으로 데려오게 해서 수업(授業)하였고, 항상 사람들에게 칭찬하기를, “이 사람은 옛날 중국 낙양(洛陽)의 재사(才士)와 같다.”고 하였다. ‘낙양(洛陽)의 재사(才士)’는 낙양(洛陽) 출신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묘사화> 때는 그의 나이가 겨우 18세여서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을사사화> 때는 그가 의금부 도사로 <기묘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파의 친구들을 체포하고 국문(鞫問)하는 실무를 맡아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최여주와 친한 친구 허자는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에게 수학하여 당시에 명망이 있었다. 처음에 공조 판서로서 <을사사화> 때 비록 정순붕(鄭順朋) 등과 같이 일을 하였으나, 반역이라는 죄목으로 사림파 인사를 해치기까지 하는 것은 최여주와 마찬가지로 그 본심이 아니었다. 사림파 유관·유인숙 등에게 죄를 매길 때에도 최여주와 같이 그 죄명(罪名)이 너무 무겁다고 주장하였고, 그 뒤에도 언제나 국문(鞫問)할 적에도 사림파 인사들를 변명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노력하였다.

항상 허자는 최여주에게 신세를 한탄하기를, “내가 소인이 되었구나.” 하였다. 그때 허자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병을 핑계하고 일을 많이 피하였으므로, 이기에게 미움을 받았다. <을사사화>의 공훈을 책훈(策勳)할 때 공신의 자제(子弟)까지 녹훈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허자는 일곱 번이나 굳이 사양하다가 임금의 윤허를 받으니, 다른 공신의 자제들도 모두 녹훈되지 못하고, 다만 정순붕의 아들 정현(鄭礥)만이 녹훈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기가 따지기를, “공신은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좋고 나쁜 것을 같이 해야 하는데, 지금 공신의 자제를 함께 녹훈하라는 왕명을 받고, 그대만 어찌 홀로 고사하는가?” 하였다.

이때부터 찬성허자와 영의정이기의 사이가 아주 나빠졌다. 이기의 일파가 합세하여 허자를 더욱 옥죄므로, 마침 허자가 친한 친구 최여주에게 한탄하기를, “을사사화로 녹훈까지 받게 되어서 마음속으로 항상 괴로워한다.” 하자, 최여주도 그 말에 깊이 동의하였다. 최여주는 허자와 이기와 사이가 그처럼 나쁜 줄을 알지 못하고, 이기에게 허자의 말을 털어놓았다. 그때 이기가 허자를 모함하려고 하였으나 구실이 없던 참이었는데, 최여주의 말을 듣고 심복인 대사헌진복창·사간이무강 등을 사주하여 허자를 탄핵하게 하였다. 세 사람이 찬성허자를 모함하면서 최여주의 말을 증거로 내세워서 탄핵하고, 허자의 정사공신 1등을 3등으로 강등시키고 그를 홍원으로 유배보냈다. 한편, 1552년(명종 7) 이기가 허자에게 죄목을 더하여 죽이려고 계청(啓請)하는 글의 초고를 가지고 대궐에 들어갔다가, 임금에게 아뢰지도 못한 채 궐내에서 졸도하여 죽었다. 이때 허자는 죽음을 면하고 홍원에서 1년을 더 귀양살다가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1 참고.) 최여주는 친구 허자의 유배와 죽음이 자기의 탓이라고 생각하여 평생 자책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금천 박달(博達)에 있는데, 부인 한씨(韓氏)와 합장하였다. 소재(蘇齋)노수신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소재집(蘇齋集)』 권10 「유명조선국통훈대부 행재령군수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최공여주묘비명(有明朝鮮國通訓大夫 行載寧郡守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崔公汝舟墓碑銘)」)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충의위(忠義衛)한세륜(韓世倫)의 딸이다. 자녀는 3남 2녀를 낳았는데, 네 명의 아들과 딸은 일찍 죽었고, 겨우 살아남은 막내아들 최황(崔滉)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 찬성을 지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소재집(蘇齋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정암집(靜菴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