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호(申從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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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6년(세조 2)∼1497년(연산군 3) = 42세.]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예조 참판을 지냈다. 자는 차소(次韶)이고, 호는 세 차례 장원하였다고 삼괴당(三魁堂)이라고 한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통례문(通禮門) 봉례랑(奉禮郞)신주(申澍)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한명회(韓明澮)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이고, 좌의정(左議政)신용개(申用漑)과 좌찬성(左贊成)신광한(申光漢)의 4촌 형이다. 세종의 서출 제3왕자 의창군(義昌君)이강(李玒)의 사위다.

성종 시대 활동

1474년(성종 5) 성균관시(成均館試)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매계집(梅溪集)』 권4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신공 묘지명(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申公墓誌銘)」 이하 「신종호 묘지명」으로 약칭],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데, 나이가 19세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1480년(성종 11) 나이 25세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방목』] 6품의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고 겨울에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었다. 여러 신료가 번갈아 가며 산사(山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할 때, 신종호도 홍문관에 있으면서 뽑혔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1481년(성종 12)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천추사(千秋使)홍귀달(洪貴達)을 따라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태자(太子)의 생일을 축하하였다. 이에 앞서 우연히 수료병(水潦病)이 돌아서 관역(館驛)에 머무르던 자가 말먹일 꼴과 식량을 잇지 못하자, 그가 홍귀달과 상의하여 명나라 예부(禮部)에 투서(投書)하였다. 그러자 예부에서 이를 주준(奏准)하여 서반(序班)을 파견하여 호송(護送)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명나라 예부에서 조선 사람을 더욱 우대하였다. 그런데 조정에서 멋대로 명나라 예부에 정문(程文)을 보냈다고 죄를 주었다. 그리하여 홍주 교수(洪州敎授)로 좌천되었다가 광주 교수(廣州敎授)로 옮겼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성종실록』성종 12년 9월 2일]

1482년(성종 13)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유일(遺逸)을 천거하라는 교지(敎旨)가 있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채수(蔡壽)는 광주 교수신종호가 문학(文學)과 이재(吏才)가 모두 우수하다고 천거하여, 성종이 이조에 명하여 서용(敍用)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3년 7월 23일) 그리하여 홍문관의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고, 경연(經筵)검토관(檢討官)을 겸하였다. 얼마 후에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면서 시독(侍讀)을 겸하였다. 1483년(성종 14) 중국 전당(錢塘) 사람 갈귀(葛貴)가 명나라 칙사(勅使)김흥(金興)을 따라 조선에 왔는데, 이들에게 조금 문학에 조예가 있었다. 성종이 신종호와 조위(曺偉)에게 명하여 갈귀와 더불어 문학을 토론하도록 하였는데, 신종호가 학식(學識)에 대해 질문하고 이어서 중국의 일을 물어 보았으므로 갈귀가 그의 재주에 탄복하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이에 성종이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영접도감(迎接都監) 낭관(郎官)교리(校理)신종호, 문학(文學)조위 등에게 가자(加資)하라.”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4년 9월 3일]

1484년(성종 15) 홍문관 교리신종호 · 세자 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허침(許琛)에게 명하여 상시(常時)에 지은 시문(詩文)을 매년 연말에 서계(書啓)하게 하였다. 또 신종호를 당진(唐津)에 어사(御使)로 보내어 수령(守令)만호(萬戶) 등의 불법(不法)을 적발하게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5년 10월 26일 · 12월 15일] 1485년(성종 16) 교리로 승진되면서 1자급을 특별히 승품(陞品)하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이에 신종호는 정성근 등과 함께 용렬한 자질로 시종(侍從)의 자리를 욕되게 하고 있어 미안한데, 가자를 받은 데다가 사간원(司諫院)의 논박함까지 들어 더욱 미안다고 아뢰었으나 성종은 “여러 말 하지 말라.”하였다.[『성종실록』성종 16년 1월 20일]

1486년(성종 17)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되었는데, 성종이 문과 중시(重試)를 보여서 뽑은 8명 중에 뽑혔다. 또 성종은 전교하기를, “신종호 · 박원종(朴元宗) · 윤탕로(尹湯老) 등의 경연(慶宴)에 모두 악(樂) 3등을 내려주고, 또 신종호에게는 술을 내려 주라.”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7년 10월 26일 · 11월 2일] 이때 신종호는 31세로 중시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방목』]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으로 초배(超拜)되고, 종3품하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승품되었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1487년(성종 18) 성종이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이창신(李昌臣)이 말하기를, ‘나이 젊은 문신(文臣)으로 한어(漢語)를 배울 만한 자를 택하여 요동에 보내어서 소규(邵奎)에게 질정(質正)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으니, 간택하여 아뢰도록 하라.”하니, 승정원에서 신종호 등 18명을 초(抄)하여 아뢰었다.[『성종실록』성종 18년 2월 2일]

노사신(盧思愼) 등이 바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성종은 성현(成俔)·채수·김종직(金宗直) 등에게 다시 교정하기를 명하고, 경복궁 안의 홍문관에 교정하는 관청을 개설하여, 신종호·유호인(兪好仁)·최부(崔溥) 등과 함께 다시 정리하여 53권으로 만들도록 하였다.[『연려실기술』 별집 권14] 『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자 그 공으로 김종직은 초록단자(草綠段子) 한 필(匹)을, 이의무(李宜茂) · 최부 · 유호인 · 이창신 · 신종호는 녹비(鹿皮) 각기 한 장(張) 씩을 성종에게 하사받았다.[『성종실록』성종 18년 2월 18일] 1488년(성종 19)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는데, 명나라 황제 효종이 등극하자 한림원(翰林院) 시강(侍講)동월(董越)과 급사중(給事中)왕창(王敞)이 조서(詔書)를 받들고 와서 반포하는 일이 있었다. 충정공(忠貞公)허종(許琮)이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신종호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동월과 왕창은 한 시대의 명유(名儒)로서 연도(沿塗)에서 제영(題詠)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왕복으로 수답(酬答)한 것이 대부분 신종호의 솜씨에서 나왔으므로 두 사신이 탄복하였다. 겨울에 통정대부(通政大夫)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성종실록』성종 19년 10월 25일]

1489년(성종 20)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는데, 승정원에서 성종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었다. 이에 성종이 사헌부에 전지(傳旨)하기를, “도승지(都承旨)한언(韓堰) · 좌승지(左承旨)이계남(李季男) · 우승지윤탄(尹坦) · 동부승지신종호는 근시(近侍)하는 신하로서 유생(儒生)이 절에 올라간 이유로 추국(推鞫)하는 일에 대하여 시말(始末)을 자세히 알았는데도, 내가 간원(諫院)이 옳은지 그른지를 물었을 때 간원의 의논을 두려워하여 간원(諫院)의 말이 옳다고 했으니, 추국하여 아뢰라.” 하였다.[『성종실록』성종 20년 3월 27일 · 5월 16일] 이 일로 도승지한언 이하 이계남 · 윤탄 · 신종호의 파직을 명하였다.

간원에서 처음에 흥덕사 중들이 스스로 궁궐에 상달(上達)하는 조짐을 자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차자(箚子)를 올려 극렬히 간했는데, 승지들이 파직당하자, 간원(諫員) 중에 한 사람도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사헌부에서 이들의 죄가 “각각 결장(決杖) 1백 대와 도(徒) 3년에 고신(古身)을 모두 추탈(追奪)하는 율(律)에 해당됩니다.” 하자, 성종은 단지 좌천(左遷)만 시키라고 명하였다.[『성종실록』성종 20년 5월 18일 · 5월 26일] 이에 신종호는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그러나 정3품상 통정대부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성종 20년 6월 1일 · 11월 7일 · 12월 11일, 『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1490년(성종 21)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정3품상 통정대부 도승지로 영전되었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성종 21년 1월 12일 · 6월 16일 · 12월 27일]

1491년(성종 22)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는데, 북쪽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하여 변장(邊將)을 해치자, 성종이 공격 토벌하려고 결심하였다. 이때 대사헌신종호가 사헌부의 대간들을 통솔하여 대궐을 지키면서 이 일의 불가하다고 간하였는데, 신종호의 말이 수상(首相)을 모욕한 점이 있자, 성종이 노하여 파직시켰다. 얼마 안 되어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성종실록』성종 22년 6월 5일]

1492년(성종 23) 예조 참판으로 옮겼는데, 이때 사헌부에서 예조 판서성건(成健) · 예조 참판신종호 · 예조 참의안호(安瑚) · 예조 정랑(正郞)김준손(金駿孫)이 중국 사신을 지대(支待)하는 모든 일을 단속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논죄하여 조율(照律)해서 아뢰었다. 성종이 전교하기를, “중국 사신은 우리나라가 작은 나라라고 하여 경시(輕視)하지만, 우리가 지대하는 일에도 차질이 많았다. 그것은 비록 내가 덕이 없는 탓이라고 하겠으나, 예조에서도 단속을 잘못하였으니, 위아래에서 모두 잘못하였다. 모두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이에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가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23년 6월 14일 · 6월 15일 · 6월 26일] 이어 병조 참판이 되고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도 겸임하였는데, 주연(冑筵)에서 시강(侍講)할 때 경전(經傳)의 뜻을 두루 설파하면서 고사(古事)를 인용하여 일에 따라 풍자적으로 간하여 세자 연산군에게 보탬이 많았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아들 신항(申沆)이 성종의 맏딸 혜숙옹주(惠淑翁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자, 이 해에 신종호를 병조 참판에 특별히 임명하였다.[『성종실록』성종 21년 4월 15일, 23년 10월 5일]

1494년(성종 25)에 병조 참판신종호가 이조 참판송영(宋瑛)과 함께 와서 아뢰기를, “…신 등이 오랫동안 직사(職事)에 있기가 매우 마음에 미안(未安)합니다.” 하니, 성종이 전교하기를, “이조 참판은 과연 이 직사에 오래 있었으나 잘못된 것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 관직에 오래 있음은 불가(不可)한 까닭으로 그 소원(所願)을 들어주지만, 병조 참판은 수직(授職)한 지 오래지 않았으니, 들어줄 수가 없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25년 6월 8일) 이어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는데, 당시에 가뭄과 기근(饑饉)이 들자, 경창(京倉)의 미곡 약간을 내어서 진휼할 것과 충청도의 곡식을 빌려와 백성의 파종에 대비하기를 청하여, 경기도 기민(饑民)을 구제하였다. 12월 성종이 승하하였는데, 다음 해에 명나라 칙사 김보(金輔) 등이 조문하려고 나왔다. 경기도 지방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많았고, 또 성종의 왕릉을 조성하는 일이 급박하였으나, 경기도 관찰사신종호가 분주하게 다니면서 성심(誠心)을 다하여 알맞게 일을 처리하여 경기도 백성들이 피해를 최대한 줄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다시 예조 참판이 되었고, 춘추관(春秋館) 동지사를 겸임하여 『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수하는 데 참여하였다. 얼마 후에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을 겸임하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1496년(연산군 2)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중추부 동지사김심(金諶)과 함께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2년 10월 12일] 하정사(賀正使)를 선임할 때 다들 다투어 계책을 써서 피하여서 맨 마지막으로 그가 지명되었다. 이 무렵 그는 해천(咳喘)을 앓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병으로 인해 사양하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를, “녹(祿)을 먹는 자가 이해(利害)를 헤아리면 사대부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사신을 임명받아서 떠났다. 이에 앞서 진헌(進獻)할 물품과 표전(表箋)은 으레 통사(通事)를 시켜 가져가서 바치게 하였는데, 그가 직접 이것을 받들고 가서 명나라 예부에 넘겨주니, 예부에서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예를 아는 재상(宰相)이다.’ 하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1497년(연산군 3) 2월에 호조 참판에 전직되고 예문관 제학을 겸하게 되었는데,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동성(遼東城)에 이르렀을 때 병이 몹시 심해져서, 들것에 실려서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내의(內醫)와 아들인 신항과 그의 형인 신종옥(申從沃) 등을 보내어 급히 말을 달려가서 살피게 하였다. 3월 14일에 개성 공관(公館)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이 42세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3월 14일 「신종호 졸기」]

사마시 · 문과 · 중시에 세 번 장원한 삼괴당 신종호

『동각잡기(東閣雜記)』에는 “참판신종호가 사마시(司馬試)·전시(殿試)·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니, 한 사람이 세 장원을 차지한 것은 그 이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세 차례 장원하였다고 삼괴당(三魁堂)이라고 불렀다.”라는 기록이 있다. 신종호는 1474년(성종 5) 나이 19세에 성균관시에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 권29] 생원(生員)조지서(趙之瑞) 등 1백 인과 진사 신종호 등 1백 인을 뽑았는데, 신종호는 진사시에서는 장원하였으나, 생원시에는 끼이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 때 신종호의 성취에 관하여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외손인 진사 신종호는 사전(史傳)을 두루 익혔으나 경학(經學)에 짧았는데, 이때 역시 조통한 사람들에 끼어 있었으므로 상서(上書)하여 전시(殿試)에 나아가기를 청원하였다. 한명회가 그래서 이런 청을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비평하였다.”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0년 2월 4일]

그러나 1480년(성종 11) 25세에 식년 문과에 갑과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1486년(성종 17) 31세에 중시 문과에 갑과 1등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므로[『방목』] 신종호는 과장(科場)에서 남에게 뒤져본 본 적이 없는 천재였다 할 수 있다. 그의 묘지명에서도 신종호는 갑오년(甲午年) 진사시의 초시(初試)복시(覆試)에 연이어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경자년(庚子年)에 정시(庭試)에 응시하여 모두 제일등이었으며, 또 중시(重試)에서도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르기를, ‘과거가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던 일이다.’ 하였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성품과 일화

신종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기량(氣量)이 굉활(宏闊)하고 풍도(風度)가 엄정하여 사물(事物)로써 마음을 얽매게 하지 않았고, 흉금(胸襟)이 평탄하여 터놓지 않고 마음속에 담을 쌓는 편견이 없었으며, 매양 엄숙한 낯빛에 미치지 않은 것을 염두에 두었다. 남을 포용하는 마음이 넉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망하고 혐오하며 질투하는 자가 없었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기개와 도량이 넓고 멀며, 마음가짐이 굳세어서 사물로 인하여 흔들리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평탄하여 아무런 간격이 없으며, 악한 것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일찍이 사람의 말로써 법을 움직인 일이 없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3월 14일 「신종호 졸기」]

가인(家人)의 살림에 대해 간여하지 않았고, 재리(財利)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남과 더불어 사귈 때는 처음 가졌던 일심(一心)을 견지하여 일찍이 후박(厚薄)한 바에 따라 변천한 적이 없었고, 궁핍한 이를 돕고 급한 일에 나아감에 있어서는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경기도를 안찰할 때에 수령 중 권세를 믿고 참람하고 방종한 자가 있으면 그 자리에서 쫓아내니 온 도내가 숙연(肅然)하였다. 요직(要職)에 있을 때는 간알(干謁)을 통렬히 끊어 문정(門庭)이 물처럼 고요하였으므로 일찍이 남의 말로써 법도를 굽힌 적이 없었고, 경기도 관찰사로 있을 때는 수령(守令) 중에 세력을 믿고 나태하고 일을 경솔히 처리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즉시 그 수인(數人)을 파출(罷黜)시켰으므로 온 도(道)가 숙연해졌다. 서예(書藝)에 있어 규탐(窺探)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문장을 지음에 있어서는 웅혼(雄渾)하고 왕양(汪洋)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시(詩)는 특히 기려(奇麗)하고 맑고 장쾌하여 동방(東方)의 기습(氣習)과는 달랐고, 필법(筆法)도 역시 굳세었다.[『매계집』 권4 「신종호 묘지명」] 문장이 웅혼 왕양(雄渾汪洋)하여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고, 시(詩)는 더욱 기려 호건(奇麗豪健)하여 사림(士林)들이 우러러 사모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3년 3월 14일 「신종호 졸기」]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리(松山里)의 선영(先塋)에 있고, 매계(梅溪)조위(曺偉)가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매계집(梅溪集)』 권4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신공 묘지명(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申公墓誌銘)」] 신종호의 무덤은 부부 합장인데, 지금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 동사골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의창군이강의 딸로 세종의 손녀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항은 성종의 맏딸 혜숙옹주와 혼인하여, 순의대부(順義大夫) 고원위(高原尉)에 봉해졌다. 차남 신잠(申潛)은 진사에 장원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을 지냈고,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지냈다. 장녀는 참봉(參奉)권의(權懿)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토산 현감(兎山縣監)권순형(權順衡)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견한잡록(遣閑雜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문선(東文選)』
  • 『백사집(白沙集)』
  • 『부계기문(涪溪記聞)』
  • 『사가집(四佳集)』
  •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소문쇄록(謏聞瑣錄)』
  • 『순암집(順菴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점필재집(佔畢齋集)』
  • 『종묘의궤(宗廟儀軌)』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추강집(秋江集)』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