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정(徐居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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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0년(세종2)∼1488년(성종19) = 69세]. 조선 초기 세종~성종 때 활동한 학자. 자는 강중(剛中), 호는 사가정(四佳亭)인데, 초자(初字)는 자원(子元)이고, 자호(自號)는 정정정(亭亭亭)이다. 본관은 달성(達成)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안주목사(安州牧使)서미성(徐彌性)이고, 어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양촌(陽村)권근(權近)의 딸이다. 좌의정최항(崔恒)이 그의 자형(姉兄)이다. 자계(子繼)유방선(柳方善) 등에게 수학하였다.

세종~성종 시대의 활동

1444년(세종26)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박사(博士)에 임명되었다가, 1447년(세종29) 집현전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 · 수찬(修撰) ·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452년(문종2) 사은사(謝恩使)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중국 명나라로 가다가 모친상을 당하여 도중에서 돌아왔다. 3년 상례를 끝마치고, 1455년(세조1) 세자익위사 우필선(右弼善)에 임명되었다. 1456년(세조2) 성삼문(成三問)의 <사육신(死六臣) 사건>으로 인하여 집현전이 없어지자, 성균관 사예(司藝)로 옮겼다. 1457년(세조3)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사간원 우사간(右司諫)에 임명되고, 1458년(세조4) 정시(庭試)에 뽑혀서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곧 예조 참의로 옮겼다. 그때 세조의 부탁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에 관한 책인 『오행총괄(五行摠括)』을 저술하여 바쳤다. 1460년(세조6) 이조 참의에 임명되어, 사은사로서 중국에 갔다가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安南) 사신(使臣)을 만나서 서로 시재(詩才)를 겨루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그의 초고를 보고 감탄하였다. 1465년(세조11)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고,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옮겼다. 다음 해,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특별히 예조 참판에 임명되고, 이어서 등준시(登俊試)에 합격하여 중추부 행 동지사에 임명되었다. 그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편찬에 참여하였는데, 이 책은 성종 때 완성되었다. 1467년(세조12) 형조 판서로서 예문관대제학(大提學)을 겸임하였다.

1470년(성종1) 좌참찬(左參贊)에 임명되어 나이 어린 성종을 보좌하였다. 1471년(성종2) 순성 명량 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3등에 녹훈되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476년(성종7) 우찬성(右贊成)으로 승진하여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여 바쳤다. 1477년(성종8)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옮겼는데, 이때 『동문선(東文選)』 130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79년(성종10) 이조 판서가 되었는데, 공평하게 인재를 선발한다는 평을 들었다. 1480년(성종11) 병서(兵書) 『오자(吳子)』를 주석하고, 『역대연표(歷代年表)』를 편찬하여 바쳤다. 1481년(성종12)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50권을 편찬하여 바치고, 병조 판서로 옮겼다가, 1483년(성종14)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되었다. 1485년(성종16) 세자시강원 이사(貳師)를 겸임하고, 이 해『동국통감(東國通鑑)』 57권을 완성하여 바쳤다. 1486년(성종17) 사관(史官)이 빠뜨린 일화 등을 모아 『필원잡기筆苑雜記』를 저술하였다. 1487년(성종18) 왕세자(王世子: 연산군)가 성균관에 입학하자, 『논어』를 강론하였다. 1488년(성종19) 12월 23일 정침(正寢)에서 죽으니, 향년이 69세였다.

문장과 저술 활동

그는 여섯 왕을 연달아 섬기면서 경연(經筵)에서 강론(講論)한 햇수가 45년이었고, 나라의 문형(文衡)을 맡은 햇수가 23년이었다. 과거 시험을 주관하여 인재를 선발한 것이 23차례였고, 그의 문하(門下)에서 당상관(堂上官) 자리에 오른 자가 무려 10여 명이 넘었다. 1438년(세종20) 19세 때 진사시와 생원시에 연달아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가서는 다른 유생들과 재주를 겨루면 항상 선두를 차지하였으므로, 당시에 유생들이, “양촌권근의 문장이 외손자에게 전수되었을 것이다.”라고 부러워하였다. 1466년(세조12) 발영시에 합격하고, 뒤이어 등준시에 합격하자,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고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하였는데, 이때부터 그가 문형을 맡아서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을 모두 도맡았다. 1471년(성종2) 그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자, 대신들이 관찰사의 임무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조정의 문병(文柄)과 사명(詞命)은 서거정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고 하여서, 성종이 그글 유임시키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하였다.

모든 국가의 고문대책(高文大冊)이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문학 · 역사 · 지리 등에 관하여 개인 저술을 내고, 또 공동으로 찬집(撰集)하였으므로, 그의 유고(遺藁)는 총 70여 종이 넘는다. 그의 저술로는 시문학 분야에 『사가집(四佳集)』을 비롯하여 『동문선』 · 『동인시화(東人詩話)』 · 『동인시문(東人詩文)』 , 수필 문학 분야에 『필원잡기』, 역사학 분야에 『동국통감』 · 『삼국사절요』 · 『역대연표』, 지리학 분야에 『동국여지승람』, 법학 분야에·『경국대전』, 해학(諧謔) 분야에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 등이 있다. 『사가집』은 그의 시문을 모은 책이며, 『동문선』은 우리나라 역대 한문학의 정수(精髓)만을 뽑아서 모은 책인데, 우리의 한문학이 중국 문학과 다른 독자성을 내세우고 있다. 『필원잡기』는 역사에서 빠진 기문(奇文) · 일화(逸話)를 모은 책이다. 『동국통감』 · 『삼국사절요』는 단군(檀君)이 개국하고, 삼국이 그 정통성을 이어서 넓은 강역을 차지하여 서로 대등하게 발전하였다는 ‘삼국균적(三國均敵)’을 내세우고 있다. 서거정의 『동국통감』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과 함께 조선 후기 서당(書堂)에서 학동에게 가장 많이 가르치던 역사 교재였다. 『동국여지승람』은 각 지역의 역사적 배경과 지방 출신 인물을 밝혀서 역사 및 지리와 인물을 연결시켜서 우리 민족의 향토애(鄕土愛)와 역사의식을 고취하고 있다. 15세기 후반기 세조에서 성종 시대까지 문형을 맡았던 서거정은 권근(權近) · 변계량(卞季良) · 정인지(鄭麟趾)로 이어지는 관학(官學)의 사장파(詞章派)를 대표한다. 서거정을 통하여 16세기 초반기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가 대립하기 전단계의 조정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중국 조사의 접대

당시 중국 명나라 사신은 조사(詔使)칙사(勅使)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조사는 명나라 황제가 천하에 공적으로 공포하는 조서(詔書)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고, 칙사는 명나라 황실(皇室)에서 사적으로 필요로 하는 물건을 요청하는 칙서(勅書)를 가지고 오는 사신이다. 조사는 대개 중국의 유명한 유학자 출신의 유신(儒臣)들이 오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그들을 선위(宣慰) 접대하는 접반사(接伴使)를 당대 관료 중에서 최고의 유학자나 문장가로써 임명하였다. 그러나 칙사(勅使)로는 조선에서 보낸 고자[火者] 출신 환관(宦官)들이 오는데, 그들의 횡포가 극심하였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그를 맞이하는 관반사(館伴使)를 임기응변에 능한 관원으로써 임명하였다. 조선 전기에 명나라에서 조선 출신 칙사를 2백여 명이나 사신으로 보냈는데, 그 중에 유명한 인물은 황엄(黃儼) · 윤봉(尹鳳) · 정동(鄭同) 등이다. 세조 · 성종 시대 명나라 조사가 왔을 때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나 관반사에서 빠진 적이 없었다. 그의 거취(去就)와 언변이 온화하고 화락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학에 정통하고 시문에 뛰어났기 때문에 그가 접대할 때마다 명나라 사신들이 크게 감복(感服)하였고, 그 문명(文名)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450년(세종32) 명나라 한림(翰林) 학사(學士)예겸(倪謙)과 급사중(給事中)사마순(司馬恂)이 사명(使命)을 받들고 조선에 왔을 때, 그가 관직이 낮아 사신을 접대하지 못했는데도, 사신들은 그의 저술만 보고도 그를 칭찬하였다. 그 뒤에 1476년(성종7) 봄에 명나라 호부(戶部) 낭중(郞中)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가 원접사가 되어 관반사를 겸임하였다. 그들과 더불어 시문(詩文)을 수창(酬唱)할 적마다 두 사신이 번번이 감탄하면서, “참으로 뛰어난 재주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밤새도록 구상하여도 겨우 한두 구절을 쓸까말까 하는데, 공은 짧은 시간 동안에 붓을 들어 쓰기만 하면 모두 주옥같은 글을 완성합니다. 하물며 필법(筆法)은 조맹부(趙孟頫)의 솜씨를 닮았으니, 중국 같으면, 공 같은 분은 천하를 휘젓고 다닐 만합니다.” 하였다. 1488년(성종19) 봄에 명나라 한림 시강(侍講)동월(董越)과 공부(工部) 급사중왕창(王敞)이 와서 조서를 반포하고 한강(漢江)에서 유람할 때 동월이 말하기를, “일찍이 한림 학사예겸의 『요해편(遼海編)』과 호부 낭중기순의 『황화집(皇華集)』을 읽어보고, 노선생(老先生)의 고풍스러운 시문을 흠모한 지 오래 되었는데, 이제 서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하고, 경의를 표하였다.

성품과 일화

서거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온순하고 청간(淸簡)하였다. 항상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며, 친구를 신의로써 대하고, 남과 화목하게 지냈다. 서거정은 한갓진 곳에 별장 두어 채를 지어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자호(自號)를 연잎처럼 ‘정정정(亭亭亭)’이라고 하고, 좌우에 책을 쌓아 놓고 담박한 생활을 하였다. 손님이 찾아오면 반드시 주연상을 마련하여 술을 마시고 시가(詩歌)를 읊었는데, 그가 술잔을 들고 마시면서 불쑥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문장의 정형을 벗어나지 않았다.

서거정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우러나왔는데, 그는 형 서거광(徐居光)이 일찍 죽은 것을 항상 애통해 하고, 조카 서팽소(徐彭召) · 서팽려(徐彭呂)를 자기 자식처럼 가르치고 길렀는데, 서팽소는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관(顯官)이 되었다. 1452년(문종2) 겨울에 그가 사은사수양대군의 종사관이 되어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서 파사보(婆裟堡)에 묵었는데, 그날 밤에 그가 잠을 자다가 놀라서 일어나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자던 사람이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달이 이지러지는 꿈을 꾸었는데, 대개 달은 어머니를 상징한다. 나는 집에 노모가 계신데, 꿈의 징조가 상서롭지 않으므로 슬퍼하는 것이다.” 하였다. 수양대군이 듣고 하늘을 감동시킬 만한 효성이라 감탄하고 그를 불러서 “지금 그대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다는 전갈이 왔으니, 그대는 돌아가도 좋다.” 하였다. 서거정은 소리내어 슬피 울면서 길을 나섰는데, 압록강을 건너와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하고 나서, 항상 압록강의 꿈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그대를 등용한 것은 그대가 단순히 재주가 있어서만이 아니다.” 하였다.

서거정은 천문(天文) · 지리(地理) · 의약(醫藥) · 복서(卜筮)는 물론 성명(星命)의 술법까지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458년(세조4) 세조가 그에게 녹명(祿命)에 관한 서책도 유자(儒者)가 궁리할 만한 것이라면 책을 지어보라고 하니, 서거정이 『오행총괄』을 지어서 바치면서 녹명의 서책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라고 말하고 그 까닭을 분석하여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였다. 그때 풍수지리를 논의하는 자들이 세종의 영릉(英陵) 옮길 것을 주장하자 세조가 이 문제를 서거정에게 물었다. 그가 산천의 방위를 가지고 자손의 화복으로 삼는 것이 옳은 줄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세조가 옳게 여겨 천릉(遷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조가 승하한 직후 1469년(예종1) 영릉을 여주(驪州)의 이계전(李季甸) 무덤터로 옮겼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서쪽 방이동(芳桋洞)의 언덕에 있는데, 부인과는 묘원이 같으나, 광혈(壙穴)이 다르다. 그의 제자 어세겸(魚世謙)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는 상원군사(祥原郡事)김여회(金如晦)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고 그보다 먼저 죽었다. 부실(副室) 이씨(李氏)는 능직(陵直)이영근(李寧根)의 딸인데, 1남을 낳았다. 아들 서복경(徐福慶)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통감(東國通鑑)』
  • 『국조보감(國朝寶鑑)』
  • 『동문선(東文選)』
  • 『필원잡기(筆苑雜記)』
  • 『사가집(四佳集)』
  • 『서천집(西川集)』
  • 『불우헌집(不憂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추강냉화(秋江冷話)』
  • 『추강집(秋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