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서(卜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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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이 배껍질, 큰 짐승의 어깨뼈, 시초, 대나무 등을 사용하여 길흉(吉凶)을 판단하는 점법(占法).

개설

복서(卜筮)는 시귀(蓍龜), 점복(占卜)이라고도 하며, 복(卜)과 서(筮)의 합성어이다. 복은 거북점을 뜻하는데, 거북이 배껍질이나 큰 짐승의 어깨뼈 등에 묻고자 하는 내용을 기록한 뒤, 이를 불에 태워서 생긴 균열을 통해 길흉 여부를 판단하는 점법이다. 서는 시초점을 뜻하는데, 시초(蓍草)나 대나무를 잘라 만든 50개의 산가지로 천지자연의 원리와 그 운행을 상징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주역』의 특정한 괘(卦)의 괘사 또는 효사를 뽑아내는 점법이다. 『서경』「홍범(洪範)」에 의하면, 은나라 말기 주나라 초기에 복서가 국가의 정책 결정에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복의 가치가 서보다 앞섰다. 『예기』에서도 중대한 일은 거북점[卜]을 치고 작은 일은 시초점[筮]을 친다는 기록이 보이며, 복서라는 말은 『시경 (詩經)』「위풍(衛風)·맹(氓)」에 "그대 거북점·시초점을 쳐서"라고 한 데서도 볼 수 있다. 『서경』을 주석한 채침(蔡沈)은 시초점보다 거북점을 중요시하던 전통이 공자가 『주역』에 해석을 덧붙인 뒤부터 바뀌어, 그 후로 시초점이 중시되었으며, 거북점의 전통이 점차 사라졌다고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은대(殷代)는 신정(神政)시대였기 때문에 모든 일의 결정에는 조상신(祖上神)의 의향을 물어서 행해야만 한다고 믿었는데, 그 방법으로서 복점이 성행했으며, 그에 따라 복관(卜官)의 지위도 높았다. 복서는 원시 종교 활동의 한 형식으로 고대 문화 가운데 명당(明堂)의 제사·봉선(封禪)·천문(天文)·의술·상술(相術) 등과 상당한 관계가 있다. 『주례(周禮)』에는 태복(太卜), 귀인(龜人), 복사(卜師), 점인(占人), 점몽(占夢) 등의 관직이 있는데, 이것은 점치는 사람이 고대 사회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성상(星象)·점복(占卜)으로 유명한 사람은 노(魯)의 재신(梓愼)·정(鄭)의 비조(裨竈), 진(晉)의 복언(卜偃)·송(宋)의 자위(子韋)·초(楚)의 감공(甘公)·위(魏)의 석신(石申) 등이 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선지자(先知者)라고 생각하였다. 고대에는 미래의 화복(禍福)을 미리 알 수 있는 것은 신명(神明)뿐이라는 사고가 있었으므로 먼저 인사(人事)를 다하고 자기의 마음을 정화하여 신명에게 일의 가부를 묻는 것이 복서의 본래 취지였다. 그것을 ‘길흉을 판단하고[斷吉凶] 의혹을 결정한다[決疑惑]’고 하는데, 『예기』「곡례상(曲禮上)」의 "복서는 …… 백성으로 하여금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하고 주저하던 일을 확정하도록 하는 까닭이다."라는 말은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주술(呪術)로서의 복서는 그 권위의 절대성을 이미 춘추시대에 잃어버렸다. 그것은 공자가 인간 행동의 기준을 신비스런 존재의 뜻에 두지 않고, 인간 자신의 의지에 두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후세에는 복서의 본의가 퇴색되어 오직 행운을 추구하는 것으로 타락하였기 때문에 한비자(韓非子)나 왕충(王充)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변천

『주역』의 주석서로 조선시대에 많이 읽힌 것은 주희(朱熹)와 정이(程頤)의 주석을 함께 실은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이었다. 주희는 정이가 『주역』을 길흉의 파악보다는 심성의 도야와 천지의 이치를 이해한 것을 보완한다는 취지로 『주역본의』를 지었는데, 이는 실로 『주역』의 복서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의 경연(經筵)에서는 『주역』을 강독할 때에 주희와 정이의 상보적 측면을 고려하여 정이의 주석서인 『정전(程傳)』과 주희의 『주역본의』를 함께 강독하였다(『숙종실록』 11년 9월 4일).

참고문헌

  • 『주역(周易)』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예기(禮記)』
  • 박종혁·조장연, 『주역의 현대적 이해』, 국민대학교출판부, 2012.
  • 廖名春 外, 『周易硏究史』, 湖南出版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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