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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50 판




총론

[1597년(선조 30)∼1667년(현종 8) = 71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이조 판서(判書)와 예조 판서 등을 지냈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자는 자준(子駿)이며, 호는 무곡(無谷) 또는 아곡(牙谷)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서울에 거주하였다. 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윤민헌(尹民獻)이고, 어머니 연안 김씨(延安金氏)는 감정(監正)김찬선(金纘先)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호조 좌랑(佐郞)을 지낸 윤엄(尹儼)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지함(尹之諴)이다. 영의정정태화(鄭太和)의 매부(妹夫)이고, 도승지(都承旨)이선(李選)의 장인이기도 하다. 채유후(蔡裕後), 이후원(李厚源)과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4년(인조 2)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626년(인조 4)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1627년(인조 5)에는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4년 4월 26일, 인조 5년 5월 11일] 1628년(인조 6)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가 되었는데, 사관(史官)을 겸직하였다.[『실록』인조 6년 3월 27일] 당시 『시정기(時政記)』를 가장 적게 수정한 사관(史官)을 적발하여 파면하였는데, 윤강이 발견되어 고발당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6년 6월 16일] 『시정기』는 사관들이 시왕(時王)의 정치를 바로 기록한 제 1차 사료이므로 수정을 하면 그만큼 진실에서 멀어지기 마련이었기 때문에, 윤강은 자기가 죄를 받더라도 역사의 진실을 그대로 남기고 싶어 하였던 것이다. 1630년(인조 8)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다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원하여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가 되었고, 1632년(인조 10) 함평현감(咸平縣監)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8년 10월 24일, 인조 8년 11월 16일, 인조 10년 2월 24일]

1635년(인조 13)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이어 홍문관 수찬(修撰)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3년 6월 21일, 인조 13년 8월 8일, 인조 13년 9월 24일, 인조 13년 11월 18일] 이어 1636년(인조 14) 사간원 헌납(獻納)과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는데, 이때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인조실록』인조 14년 2월 9일, 인조 14년 2월 18일] 그러자 윤강은 유도대장(留都大將)심기원(沈器遠)을 따라서 종군하였는데, 도원수(都元帥)김자점(金自點)과 유도대장 심기원이 미원현(迷原縣)에서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지 않고 북쪽에서 근왕병(勤王兵)이 더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화의(和議)가 이루어져서 호란이 끝났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7 「이조판서윤공신도비명(吏曹判書尹公神道碑銘)」 이하 「윤강신도비명」으로 약칭] 이후 윤강이 이들이 일을 그르친 형세를 가지고 직론(直論)하였고, 이에 두 사람은 법대로 처리받았다.[『인조실록』인조 15년 3월 10일]

1637년(인조 15) 사헌부 장령(掌令)을 거쳐, 홍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5년 윤4월 27일, 인조 15년 5월 3일, 인조 15년 6월 4일] 이어 1638년(인조 16)에는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고, 1641년(인조 19)에는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사간원 사간(司諫)에 임명되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을 겸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6년 3월 24일, 인조 19년 6월 12일, 인조 19년 7월 13일] 1642년(인조 20) 사은사(謝恩使) 겸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淸)나라의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왔다.[『인조실록』인조 20년 11월 17일, 「윤강신도비명」] 1643년(인조 21)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이어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로 옮겼다가 1645년(인조 23)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인조실록』인조 21년 3월 6일, 인조 21년 12월 5일, 인조 23년 12월 26일, 「윤강신도비명」]

1651년(효종 2)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어,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책봉(冊封)할 때는 전교관(傳敎官)이 되었고, 세자를 책봉할 때는 독책관(讀冊官)이 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2년 7월 15일, 효종 2년 9월 6일] 이 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으며, 뒤이어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2년 9월 6일] 이어 효종은 인조의 사랑을 받고 온갖 횡포를 부리던 <조귀인(趙貴人)의 옥사>를 계기로 친청파(親淸派)이던 영의정김자점 일당을 숙청하였다. 동시에 청나라를 치기 위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인재를 발탁하였는데, 서인(西人)의 정태화(鄭太和)를 영의정으로, 그의 매부이던 윤강을 도승지로 삼았다.[『효종실록』효종 2년 9월 14일, 효종 2년 12월 7일] 정태화는 성격이 두루 원만하고, 윤강은 매우 강직하였는데, 효종이 정태화를 영상에 앉히려고 그가 추천하는 윤강을 도승지로 기용하였던 것이다. 윤강은 효종의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이해하고, 효종의 북벌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역관 정명수(鄭命壽)와 이형장(李馨長) 등의 밀고로 조선의 군비 확장에 대한 청나라의 감시가 강화되는 바람에 자유롭게 군비 체제를 강화할 수 없었다. 청나라가 중국 본토를 점령하고 그 지배 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효종은 북벌 계획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윤강은 1653년(효종 4)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正使)홍주원(洪柱元)과 함께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효종실록』효종 4년 1월 17일, 효종 4년 윤7월 27일, 효종 4년 11월 30일] 1654년(효종 5)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1655년(효종 6)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형조 판서(判書)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5년 11월 30일, 효종 6년 2월 22일, 효종 6년 6월 1일] 이듬해인 1656년(효종 7)에는 이조 판서가 되었고, 1657년(효종 8)에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1658년(효종 9)에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1659년(효종 10)에는 예조 판서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7년 7월 11일, 효종 8년 3월 6일, 효종 9년 4월 16일, 효종 10년 윤3월 22일]

현종 시대 활동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예조 판서로서 국장(國葬)의 상례(喪禮)를 맡았는데, 영의정정태화와 서로 더불어 일을 주선(周旋)하여 인산(因山 : 국장)을 끝마쳤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즉위년 5월 5일] 빈전도감(殯殿都監)과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양 도감을 겸임하게 되자, 그는 직접 대관과 사관을 거느리고 여러 땅을 두루 다니다가 여주(驪州)의 영릉(英陵 : 세종의 왕릉) 옆에 영릉(寧陵 : 효종의 왕릉)의 터를 조성하기 시작하였다.[『현종실록』현종 즉위년 5월 23일, 「윤강신도비명」]

1659년(현종 즉위년) 5월 예조 판서윤강은 효종의 상례에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을 상복과 관련하여 예조 참판윤순지(尹順之), 예조 참의윤집(尹鏶) 등과 함께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다며 이 문제를 발의(發議)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1 「현종조고사본말(顯宗朝故事本末)」] 이것이 <제1차 예송논쟁(禮訟論爭)>, 즉 <기해예송(己亥禮訟)>의 시작이었는데, 서인은 삼년복을, 남인(南人)은 기년복을 주장하였다. 그러자 윤강은 양당의 첨예한 대립을 무마시키기 위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여 “최질(衰絰)로써 성복(成服)하지만 따로 시사(視事)할 때의 편의한 복장(服裝)을 만들어 입고서 사진(仕進)하도록 하자.” 중재안을 내놓았으나, 양당의 강경론자에 의하여 거절되었다.[「윤강신도비명」] 결국 윤강과 정태화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시왕지제(時王之制)」에서 “어머니는 자식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母爲子服朞]”는 조문에 의거하여 마침내 기년복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 남인 윤선도(尹善道)를 귀양 보냈다. 이때 서인과 남인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것을 보고, 윤강은 벼슬에 뜻이 없어져 관직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하였다.

1660년(현종 1) 5월 현종이 병이 났으므로, 윤강은 약방(藥房) 도제조(都提調)가 되어, 어의(御醫)와 함께 밤낮으로 옆에서 병을 치료하였다. 완치 후 현종은 약방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는데, 이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하여 정승의 품계에 올랐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1년 5월 11일] 1662년(현종 3) 1월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로 승진하였으나, 다시 이조 판서에 임명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의 기무(機務)를 그대로 행하였는데, 이것은 대체로 원품(原品)으로는 달리 맡길 만한 직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현종실록』현종 3년 1월 8일] 그해 4월 사헌부에서 국상 기간 동안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집에서 베푸는 문희연(聞喜宴)에서 음악 연주를 듣고 술을 마신 것을 탄핵하였으므로 파직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3년 4월 19일] 그리고 1663년(현종 4) 11월 대관(臺官) 민유중(閔維重)이 문관의 인사를 엄격하게 선발하지 않았다고 이조 판서윤강을 탄핵하였으므로, 윤강은 체직되어 고향 안산(安山)으로 돌아가서는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하여도 나가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4년 11월 4일, 현종 4년 12월 4일, 현종 5년 8월 10일, 현종 8넌 8월 6일] 그러다가 1667년(현종 8) 8월 노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1세였다.[『현종실록』현종 8년 8월 6일]

성품과 일화

윤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신중하며, 돈후하고 의지가 확고하였다. 그의 매부가 채유후인데, 마치 친형제처럼 서로 다정하게 지냈다. 해학(諧謔)을 잘하던 채유후는 “윤강은 오로지 음식의 맛만 알고, 세상사는 맛은 모른다.”고 비아냥하였는데, 이것은 그가 시대의 풍속을 따르지 않는 것을 비판하는 말이었다. 한편 윤강은 이후원(李厚源)의 아들 이선(李選)을 그의 사위로 삼아 글을 가르쳤는데, 나중에 이선은 송시열의 제자가 되어 예송논쟁을 벌일 때 그 선봉장이 되었다.[「윤강신도비명」]

조정에 들어간 지 40년에 청요직(淸要職)에 오랫동안 있었으며, 관직이 상경(上卿)에 이르렀으나, 검약하여 집이 가난한 선비의 집과 같았다. 윤강은 서민(庶民)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쌀과 소금을 잘게 부수어서 팔러 다니는 장사치가 있었는데, 그가 소금을 팔러 오면, 윤강은 반드시 그와 더불어 수작(酬酌)하기를 친형제와 같이 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윤강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에 있고, 송시열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강신도비명」]

첫째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형조 판서정광성(鄭廣成)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윤지미(尹趾美)는 사헌부 지평을 지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차남 윤지선(尹趾善)은 좌의정을 지냈고, 3남 윤지완(尹趾完)은 우의정(右議政)을 지냈으며, 딸은 강화유수(江華留守) 이선(李選)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유익(柳杙)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4남 윤지경(尹趾慶)은 진사(進士)이고, 5남 윤지인(尹趾仁)은 병조 판서를 지냈다. 측실(側室) 소생으로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윤지희(尹趾禧)이고, 두 딸은 구문한(具文漢)과 박정식(朴廷軾)의 처가 되었다.[「윤강신도비명」] 윤강은 3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하고, 또 아들 5형제 중에서 4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2정승 1판서가 나왔으므로, 다른 집안의 부러움을 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충재집(冲齋集)』
  • 『오리집(梧里集)』
  • 『월당집(月塘集)』
  • 『백강집(白江集)』
  • 『고산유고(孤山遺稿)』
  • 『동주집(東州集)』
  • 『백헌집(白軒集)』
  • 『양파유고(陽坡遺稿)』
  • 『동춘당집(同春堂集)』
  • 『초려집(草廬集)』
  • 『노봉집(老峯集)』
  • 『지호집(芝湖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서포집(西浦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만사고(晩沙稿)』
  • 『사우당집(四友堂集)』
  • 『청천당집(聽天堂集)』
  • 『낙촌집(洛村集)』
  • 『운포유고(雲浦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