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원(洪柱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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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39)∼1672년(현종13) = 67세]. 조선 중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의빈(儀賓). 선조와 인목대비(仁穆大妃) 사이의 외동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혼인하였다. 자는 건중(建中), 자호(自號)는 무하(無何)이다. 본관은 풍산(豊山)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참판홍영(洪霙)이고, 어머니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좌의정이정귀(李廷龜)의 딸이다. 대사헌홍이상(洪履祥)의 손자이고, 예조 참의홍주국(洪柱國)의 맏형이다. 외조부 월사(月沙)이정귀와 북저(北渚)김류(金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홍주원은 부마로 선발되기 전에, 장옥(場屋)에 응시하여 향시(鄕試)에 합격하였다.

정명공주와의 혼인

1623년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서궁(西宮)에 10년 동안 유폐(幽閉)되었던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위호(位號)가 회복되었다. 대비의 외동딸 정명공주도 오랫동안 어머니와 함께 갇혀 있어서 혼기를 놓쳤으므로, 그해 8월 인조는 공주를 위하여 서둘러 부마(駙馬)를 간택하였다. 공주의 혼기가 늦었으므로, 그에 맞추어 부마의 후보감도 나이가 조금 든 사람을 추천받았는데, 홍주원(洪柱元) · 윤문거(尹文擧) · 목행선(睦行善) 등 9명이 추천되었다. 왕과 대비의 임석 하에 가례도감(嘉禮都監)제조(提調)들이 3간택(簡擇)을 통하여 마지막에 홍주원을 선발하였다.

그해 9월 홍주원의 나이 18세에 정명공주와 혼례를 치르고, 종1품하 숭덕대부(崇德大夫) · 영안위(永安尉)가 되었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그의 비문(『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9)에서는 그가 인목대비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으나, 그는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일체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학문을 익히고 문학(文學)을 즐기는 데에 정성을 기울여서 대비와 공주의 속을 태웠다고 한다. 당시 인목대비는 반정을 일으킨 서인과 인조의 정신적 지주였고, 정명공주는 인목대비의 하나 뿐인 혈육이었으므로 그의 지위가 3정승 6판서를 압도할 수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는 항상 겸손한 태도로서 자신의 절조를 지키고, 포의(布衣) 때의 본래 마음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지녔다고 한다. 시남(市南)유계(兪棨)가 부마를 평하기를, “의빈 중에서 그 됨됨이와 그 문장을 합쳐서 논한다면, 마땅히 무하공(無何公)홍주원이 가장 뛰어난 부마다.”라고 하였다.

이괄의 난 때의 활동

1624년(인조2) 2월 <이괄(李适)의 변란>이 일어나서 서울이 위험해지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을 갔다. 임금 행차가 먼저 떠나고 대비 행차가 뒤이어서 출발하였는데, 한꺼번에 한강의 부교(浮橋)를 건너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인조는 남대문 밖에 도달하여, 부마 홍주원을 불러 대비의 행차를 돌려 잠두강(蠶頭江) 윗길로 향하도록 명하였다. 홍중원은 말을 타고 내달리면서 자전(慈殿: 인목대비)을 시위(侍衛)하는 사람들을 지휘하여 대비와 공주 일행을 무사히 도강(渡江)시켰다. 그때 대비가 임금 일행과 떨어져서 불안해하자, 그는 대비에게 인조의 어명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대비를 위로하여 안심시켰다. 이리하여 자전은 임금을 탓하지 않았고, 사위 홍주원을 믿고 순순히 따랐다. 대비가 그를 매우 대견하게 여기자, 인조도 매우 기뻐하여 호종(扈從)한 공로로 품계를 가자(加資)하고, 특별히 사옹원(司饔院)과 총부(摠部)를 관장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1626년(인조4) 사옹원 제조에 임명되었고, 1628년(인조6)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었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5년(인조3) 정명공주가 50칸이 넘는 저택을 짓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는데, 홍주원이 그 잘못을 솔직히 시인하고 공주를 나무라는 바람에 인목대비와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그러자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의하면 1626년(인조4) 7월에, 『응천일록(凝川日錄)』에 의하면 1629년(인조7) 11월에, 인조는 그가 자전(慈殿)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며 추고할 것을 하교하기도 하였다. 한편 1631년(인조9) 인목대비의 건강이 오랫동안 좋지 못하자, 인조는 대비를 기쁘게 하려고 홍주원에게 특별히 한 품계를 가자(加資)하였다. 1632년(인조10) 인목대비는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기거하다가 49세로 돌아갔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홍주원은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40여 일 동안 청(淸)나라 군사와 싸웠다. 난리가 끝난 뒤에도 그는 분개한 마음으로 왕실을 걱정하여, 눈물이 마른 적이 없었다.

1639년(인조17) <기묘년 내옥(己卯年內獄)>이 일어나자, 그를 아는 자들이 많이 걱정하였으나, 별 탈 없이 지나갔다. 이 일과 관련하여 사관(史官)은 “영안위홍주원은 공주를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산택(山澤)의 이익을 독점하고 제언(堤堰)이나 토목공사를 하면서 민간에 폐해를 끼친 일이 많았다.”라고 비난하였다. 또 이조 참의조석윤(趙錫胤)은 1645년(인조23) 5월에 국정에 대하여 직언하면서 “여러 도에 각 아문과 궁가(宮家)에서 설립한 둔전(屯田)과 염분(塩盆)과 어전(漁箭)을 모두 조사해서 혁파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기묘년 내옥>은 공주가 궁장토(宮庄土)와 염분(鹽盆) · 어전(漁箭)을 점유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때부터 5년 동안 문을 닫고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1645년(인조23)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기(喪期)를 끝마치고 궁중에 들어가 관작 복구에 대해 사례(謝禮)하니, 인조가 술을 내리며 위로하였다. 1647년(인조25)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감면해준 것을 사례하고, 겸하여 동지(冬至)와 정조(正朝)를 하례하였다. 이때 시헌력(時憲曆)을 구해 와서, 국가에서 새로운 역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고부사(告訃使)에 임명되어 죽은 왕의 시호(諡號)를 청하고 아울러 새 왕의 승습(承襲)을 청하였다. 1651년(효종2) 재상 잠곡(潛谷)김육(金堉)이 그를 천거하자, 효종이 파격적으로 부례(祔禮)의 제조에 임명하였다. 1654년(효종5) 사명(使命)을 받들고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때 절친한 친구 조석윤 · 박장원(朴長遠)이 모두 나랏일을 말하다가 유배되었으므로, 홍주원이 상소하여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부마가 국정에 간섭하는 것은 국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여겨, 그를 파직하였다.

1660년(현종1) 청나라 효헌단경황후(孝獻端敬皇后: 현비동악씨, 순치제의 후궁으로 사후에 황후가 됨)가 죽고, 1661년(현종2) 세조(世祖)순치제(順治帝)가 잇달아 죽었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는 황제와 황후의 진향사(進香使)를 별도로 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황제상의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가 되어, 황후진향사(皇后進香使)심지명(沈之溟) 등과 함께 청나라를 다녀왔다. 귀국 후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여막(廬幕) 살이를 하다가 병이 들자 자제들이 울면서 계피나 생강 등을 아울러 들도록 청하였으나, 그는 완강한 태도로 이를 거절하였다. 3년 상기를 마치고, 1664년(현종5) 다시 사명(使命)을 받들고 청나라 연경에 다녀왔다. 1668년(현종9) 현종이 온천(溫泉)에 행차할 때, 그는 병을 무릅쓰고 뒤를 따라 갔었는데, 안부를 여쭈려고 대궐에 갔다가 갑자기 풍질(風疾)로 쓰러졌다. 1672년(현종13) 마침내 병이 위독해져서, 9월 14일 정침(正寢)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7세였다.

저서로는 『무하당집(無何堂集)』 6권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홍주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인정이 많고 온화하고 너그럽고 침착하였다. 그는 법도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본래부터 규율과 절도가 있었는데도, 항상 몸가짐을 올바르게 가지고 공경한 태도로 남을 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거실(巨室) 세족(世族)으로서 항상 국가에 대한 걱정을 잊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사류(士流)와 명유(名儒)들이 그와 기꺼이 교유하려고 하였는데, 낙정(樂靜)조석윤과 구당(久堂)박장원 등도 홍주원과 교제하였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기량이 또래 아이들과 달랐으므로 외조부 이정귀가 데려다가 가르치고 길렀다. 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김류에게 글을 배울 때 언제나 그가 글을 지으면 반드시 선배들이 칭찬하고 감탄하였다. 당시 월사이정귀가 오랫동안 문단(文壇)의 맹주(盟主)로 있었는데, ‘문형(文衡)끼리 전수(傳受)하는 벼루’를 가리키면서, 어린 외손자에게 “훗날 이것이 너에게도 전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목대비의 딸과 사위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극진하여, 그는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므로, 그 부귀영화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일체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직 학문을 익히고 문학을 즐겼을 뿐이어서, 인목대비의 속을 태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친조부 모당(慕堂)홍이상과 외조부 월사이정귀의 의발(衣鉢)을 거의 그대로 전수 받았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그 재주와 덕망과 문장이 삼관(三館)에서 문한(文翰)을 맡기에 넉넉하였고, 묘당(廟堂: 의정부)에서 국가의 중대사를 도모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제도에 얽매어서 그 재덕(才德)과 문장을 하나도 세상을 위해 쓸 수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신분이 귀한 데도 예의가 있었고, 살림이 부유한 데도 검소하게 살았다. 네 차례나 청나라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청나라 사람들로부터 예물로서 받은 선물들을 모두 하인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 자기 집안 사람보다 먼저 보살피고 도와주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오리동(梧里洞)의 언덕에 있는데, 친구 우암(尤庵)송시열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39) 부인 정명공주는 선조의 딸로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자 홍만용(洪萬容)은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차남 홍만형(洪萬衡)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3남 홍만희(洪萬熙)는 공조 정랑을 지냈고, 4남 홍만회(洪萬恢)는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그리고 홍만용의 후손이 홍봉한(洪鳳漢), 경의왕후(敬懿王后: 혜경궁홍씨)인데, 정조(正祖)는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외손인 셈이다. 또한 홍만형의 후손으로 홍국영(洪國榮)이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백호전서(白湖全書)』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우복집(愚伏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