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국(趙安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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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1년(연산군7)∼1573년(선조6) = 73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국경(國卿)이고, 본관은 풍양(豐壤)이다. 아버지는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조현범(趙賢範)이며,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파성군(坡城君)윤찬(尹贊)의 딸이다. 장사랑(將仕郞)조지진(趙之縝) 의 손자이고, 은율현감(殷栗縣監)조언국(趙彦國)의 동생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4년(중종19)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 즉시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가 강동현감(江東縣監)으로 나갔다. 그 뒤에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을 거쳐, 공조 좌랑(佐郞) · 공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는데, 내승(內乘)을 겸하여 중종의 지우(知遇)를 받았다. 무예(武藝)에 뛰어났던 그는 1528년(중종23) 격구(擊毬) 시합에서 1등을 차지하였고, 이에 중종이 그에게 특별히 문관의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시켰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8세였다.

희천현감(熙川縣監)으로 나갔다가, 1534년(중종29)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 아버지 조현범이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부자(父子)가 함께 무장(武將)으로서 함경도 최전방 지역 육진(六鎭)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사람들은 이들 부자를 가리켜 훌륭한 부자(父子)라고 칭송하였다.

1535년(중종30)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는데, 승지의 자리는 문신(文臣)에게도 청선(淸選)이었으며, 무신(武臣)에게는 극선(極選)이었다. 중종이 대간(臺諫)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 그를 최측근의 자리에 발탁하였던 것인데, 조선 시대에 무신으로서 승지에 임명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이것은 중종 말엽에 정권을 잡은 김안로(金安老)가 그를 적극적으로 추장(推獎)하였기 때문이었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다가 실패하여 죽음을 당하고, 1538년(중종33) 그의 아버지 조현범도 돌아갔다. 중종 말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그는 3년 동안 상중에 있으면서 벼슬하지 않고 한가하게 지냈다.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1) 전라도좌수사(全羅道左水使)가 되었다가, 1548년(명종3) 광주목사(光州牧使)가 되었는데, 그때 간원(諫院)에서 “광주목사조안국은 황음하여 유연(遊宴)만 베풀어서 백성들을 곤궁하고 피폐하게 하였으니, 그를 파직시키소서.”라고 그를 탄핵하였다. 그러나 명종은 “조안국을 파직하면 남을 모함하여 헛소문을 퍼뜨리는 뒷날의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체차(遞差)시키도록 하라.”라고 말하고 그를 최전방의 회령부사(會寧府使)로 전임시켰다.

1550년(명종5) 경상도좌병사(慶尙道左兵使)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경상도 지방은 팔룡(八龍)이 일으킨 농민반란을 관군(官軍)이 진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병마사로 부임하여 작전을 세워서 <팔룡의 난>을 진압하고 그 일당을 체포하니, 명종이 기뻐하여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다. 1551년(명종6) 대간(臺諫)에서 그가 중종 때의 권신 김안로와 진복창(陳復昌)에게 아부하여 출세하였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552년(명종7) 황해도 지방에서 미이(米伊) 형제가 민란을 일으켰고, 많은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을 공격하여 모두 소탕하였다. 그러자 그 해 7월 의정부에서 명종에게 “장단부사조안국은 마음을 다하여 군사를 지휘해서 대도(大盜)의 우두머리를 손수 잡았으니, 특별히 포상하소서.”라고 아뢰니, 명종이 <미이 형제의 난>을 진압한 그의 공을 포상하여 특별히 가자(加資)하였다. 그리고 1553년(명종8) 경상도좌병사(慶尙道左兵使)로 발탁하였는데, 부임 직전에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로 바꾸어 임명되었다.

1555년(명종10)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서 왜구들이 6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영암(靈岩) · 장흥(長興) · 강진(康珍) · 진도(珍島) 등을 침입하자, 전라도병마사조안국은 전라좌도방어사(全羅左道防禦使)남치근(南致勤)과 함께 나주(羅州) 일대에서 일차로 왜적들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이어 왜구들이 녹도(鹿島)를 포위하자, 흥양현감(興陽縣監)신지상(愼之詳)이 병마사조안국과 방어사남치근에게 구원을 급히 요청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작전상 의견이 맞지 않아서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녹도와의 30리 거리에 주둔하면서도 달려가서 구원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조안국은 파직당하여 녹도에서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의 사위 윤근수의 『월정만필(月汀漫筆)』에 보면, 처음에는 평안도로 귀양을 갔으나, 곧바로 공로를 세운 덕에 속죄하겠다고 맹세를 하고 전라도 흥양현(興陽縣)의 녹도로 옮겨서 귀양살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녹도에 정박한 왜구의 배 한 척을 그가 통째로 사로잡게 되었고, 그 공으로 석방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1561년(명종16) 함경남도병마사(咸鏡南道兵馬使)에 임명되었다가 영흥부사(永興府使)로 전임되었으나, 병으로 말미암아 사직하고 서울로 돌아와서, 관례에 따라 군직(軍職)에 겸대(兼帶)하였다. 영흥에서 돌아온 뒤에 항상 포도대장(捕盜大將)과 오위장(五衛將) · 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병이 조금 나아지자, 1567년(명종22)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은거하다가, 1573년(선조6) 7월 14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은 73세였다.

성품과 일화

조안국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전형적인 무인(武人) 집안에서 천성적인 무골(武骨)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로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무예(武藝)를 배우고 닦아서 승마(乘馬)와 궁도(弓道)에서는 그를 당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 조현범과 아들 조경(趙儆)까지 나란히 3대가 무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때 궁중에서 무관들에게 시행된 시사(試射)와 격구 시합에서 여러 차례 1등을 차지하니, 중종이 그의 절륜한 무예를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으로 망아지 · 녹비 등을 내려주고 가자하였으므로, 나이 28세 때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랐다.

1535년(중종 30) 의정부와 병조에서 함께 의논하여, 무장(武將)으로 양성할 사람으로 조안국 등을 추천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승지에 합당한 후보자로서 조안국을 단일 후보로 추천하도록 하라. 성종조 때 김세적(金世績)은 글을 전혀 몰랐어도 승지가 되었었는데, 무장 조안국이 왜 승지가 못되겠는가.” 라고 하였다.

1551년(명종6) 사헌부에서 “경상우도병마사(慶尙右道兵馬使)조안국은 본래 교만하고 사특한 사람으로 전일에 김안로를 섬겨서 분수에 맞지 않는 승지가 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진복창에게 붙어서 또 현달한 품계의 병마사에 올랐으니, 파직하소서.”라고 탄핵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명종은 그를 파직하지 않고 체직하라고만 대답하여, 그는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좌천되었다.

이때 그는 승정원의 승지윤옥(尹玉)을 통하여 비밀히 사적으로 장계(狀啓)를 올렸는데, 이것이 큰 문제로 비화되었다. 1552년(명종7) 사헌부에서는 승정원을 탄핵하기를, “조정에서 임금에게 아뢸 일이 있으면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 이하는 색승지(色承旨)에게 고하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상은 곧바로 승전색(承傳色)을 청하여 아뢰는데, 모두 육승지(六承旨)가 모인 곳에서 사관(史官)의 배석 아래에 아뢰는 것이 상례입니다. 그래서 국가 기밀의 중대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승지와 사관은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만약 몰래 승정원에 들어가서 자기가 아는 승지 단 한 사람과 더불어 밀계(密啓)라고 칭하면서 다른 승지와 사관이 모르게 한다면 간사한 무리들이 곧 이로 말미암아 일어나서, 그 화가 어찌 참혹하지 않겠습니까. 장단부사조안국이 승정원에 나와서 승지윤옥을 불러 밀계라고 일컫고 은밀히 서계(書啓)를 전하자, 윤옥도 은밀히 이것을 받아서 동료들에게 고하지 않고 사관도 알지 못하게 주상에게 계달(啓達)하였습니다. 급기야 다른 승지들이 이 사실을 듣고 캐물었을 때에도 그는 숨기고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동료 승지들에게 화까지 냈습니다. 윤옥을 조안국과 함께 의금부에 내려서 끝까지 추국하여 철저하게 다스리도록 하소서. 다른 승지들도 또한 윤옥이 은밀히 아뢴 죄를 계청(啓請)하여 말의 출입이 한결같이 광명정대한 데에서 나오게 했어야 마땅한데, 자기들끼리 사사로이 묻고 사사로이 저지하였으니 이것은 부당한 처사였습니다.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잘못이 크니, 도승지 이하를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이리하여 조안국과 승지윤임 등이 파직당할 위기에 몰렸는데, 마침 황해도 지방에서 미이 형제가 농민반란을 일으켰고, 여기에 많은 농민들이 호응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는 장단부사로서 병마사를 대신하여 적은 수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의 본영을 기습하여 미아 형제를 직접 사로잡고 반란군을 소탕하였다. 이리하여 의정부에서 “장단부사조안국은 군사를 지휘해서 대도(大盜)의 괴수를 손수 잡았으니, 특별히 포상하소서.”하니, 명종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었고, 1553년(명종8)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로 발탁하였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하도(下道) 북방리(北坊里) 직동(直洞)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증손자 포저(浦渚)조익(趙翼)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후사가 없고, 둘째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생원 권세임(權世任)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차남 조간(趙侃)은 의빈부(儀賓府)도사(都事)를 지냈으며, 3남 조경(趙儆)은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공을 세워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훈되고, 풍양군(豐壤君)에 봉해졌다. 외동딸은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문정공(文貞公)윤근수(尹根壽)의 아내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포저집(浦渚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정만필(月汀漫筆)』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청음집(淸陰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