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충량(鄭忠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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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80년(성종 11)∼1523년(중종 18) = 44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와 이조 참의(參議)와 공조 참의 등을 지냈다. 자는 국간(國幹)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형조 판서(判書)정광세(鄭光世)이고, 어머니 흥해 배씨(興海裵氏)는 진무부위(振武副尉)를 지낸 배조(裵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정난손(鄭蘭孫)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정사(鄭賜)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1년(연산군 7)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와 진사과(進士科)의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506년(연산군 12) 별시(別試)문과(文科)의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 급제 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뽑혀 들어갔고, 예문관 대교(待敎)를 거쳐서, 1507년(중종 2)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2년 4월 17일] 그 후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전임(轉任)되었다가, 공조 좌랑(佐郞)과 형조 좌랑을 역임하였다.[『모재집(慕齋集)』 권13 「고통정대부공조참의정공묘갈명(故通政大夫工曹參議鄭公墓碣銘)」 이하 「정충량묘갈명」으로 약칭] 1511년(중종 6)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다.[『중종실록』중종 6년 6월 4일] 1513년(중종 8)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이어 공조 정랑과 예조 정랑을 역임하였다.[「정충량묘갈명」] 이후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고, 1516년(중종 11)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 이듬해인 1517년(중종 12)에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중종 11년 8월 9일, 중종 12년 11월 19일, 「정충량묘갈명」]

1518년(중종 13)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13년 3월 3일, 중종 13년 5월 19일] 이무렵 중종이 육조 당상관과 홍문관, 그리고 대간에 명하여,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명나라에 주달(奏達)할 지의 여부를 회의하게 하였다. 정충량(鄭忠樑)은 공서린(孔瑞麟) 등과 함께 “이것은 필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찬집(撰集)할 때에 근거 없는 말들을 잘못 채록한 때문일 것이니, 주청하여 변별하는 일을 늦출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였다.[『중종실록』중종 13년 5월 7일] 그 해에 승정원 우승지(右承旨)에 발탁되었고,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중종 13년 11월 2일, 중종 13년 11월 26일] 1519년(중종 14)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승정원 도승지로 발탁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1월 28일, 중종 14년 2월 18일]

그로부터 얼마 후 사헌부(司憲府)서리(書吏)가 승정원의 문을 지키는 사령(使令)을 구타한 일 때문에 승정원 도승지정충량과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조광조(趙光祖)가 서로 논쟁을 벌이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게 되었다. 대간에서 거듭 아뢴 결과 중종은 결국 정충량을 체직시켰다.[『중종실록』중종 14년 6월 14일, 중종 14년 6월 18일, 중종 14년 6월 19일, 중종 14년 6월 22일] 그리하여 정충량은 도승지가 된 지 반년 만에 체직되어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14년 6월 23일, 「정충량묘갈명」] 그런데 1522년(중종 17) 대간에서 그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림파(士林派)에 부화(附和)한 행적이 있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그는 다시 체직되었다.[『중종실록』중종 17년 4월 12일, 중종 17년 4월 17일, 중종 17년 4월 18일] 기묘사화 당시 그는 조광조 등을 붕당(朋黨)으로 처벌하는 것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그 뒤에 공조 참의로 좌천되었는데, 그때 병이 들어 심하게 앓았다. 1523년(중종 18) 12월 24일 지병으로 서울의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44세였다. 조정의 관리와 그와 더불어 교유했던 자들이 모두 그가 너무 일찍이 세상을 떠났다며 아쉬워하고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정충량묘갈명」]

도승지 정충량과 대사헌 조광조

정충량은 1519년(중종 14) 1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해 6월 사헌부의 서리가 승정원의 문을 지키는 사령을 구타하면서, 이 문제를 놓고 도승지정충량과 대사헌조광조가 서로 논쟁을 벌였다. 그때 도승지정충량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는데, 사헌부가 아뢰기를, “어제 승정원이, 본부(本府)의 서리가 문을 지키는 사령을 구타한 것 때문에 입계(入啓)하여 형조로 하여금 추국(推鞫)하도록 하셨다는데, 본부의 탐보서리(探報書吏)가 정원에 드나드는 것은 상례입니다. 서리가 들어가려다가 문을 지키는 사람과 서로 힐난하는 것은 큰 일이 아닌데, 승정원이 사령의 참소하는 말만 듣고 즉각 추고(推考)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런 작은 일로 승전(承傳)을 만들어 왕의 말을 크게 욕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도승지는 온 승정원의 일을 총할(總轄)하는 것인데, 정충량이 매우 경솔하여 체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작은 일을 크게 만들어 입계하였습니다.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럴 수 없는 것이니 즉시 파직하소서. 다른 승지들도 추고하소서.”하였다. 그러자 중종은 “내가 장차 친히 들어보겠다.”라고 전교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6월 13일]

얼마 후 중종이 사정당(思政堂)으로 나아갔는데, 사헌부 장령(掌令)기준(奇遵)이 이 일을 거듭 아뢰었다. 이에 중종은 도승지인 정충량을 파직할 수는 없고 추고해야한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대사헌조광조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지당하십니다. 그러나 유독 정충량을 파직하도록 청한 것은 그가 도승지이므로 모든 일을 그의 재결(裁決)을 받아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마음은 비록 올바르나 지식이 어둡고 얕으니 장관이 될 수 없습니다. 대간의 기세가 대신에게 좌절당하게 되면 그 폐단이 심한 법인데, 지금의 삼공(三公)들은 마음이 실지로 험사(險邪)한 것은 아니나 다만 경솔하게 망령되이 생각한 것입니다. 또한 대신은 마음 갖기를 화평하게 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의 대신들은 조정의 화평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대간이 아뢴 말을 논란하였습니다. 이는 대간의 인망이 가볍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6월 18일] 결국 대간에서 거듭 아뢰자, 중종은 도승지정충량을 체직하였다. 이때 중종은 이미 사림파 조광조와 대간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을 지나치게 숭상하고 시문(詩文)의 사장(詞章)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겼으며, 훈구파(勳舊派)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배척하였으므로, 남곤(南袞)·이행(李荇) 등 훈구파의 사장파(詞章派)와 크게 대립하게 되었다. 1519년(중종 14) 조광조는 기존의 과거 제도를 통해서는 훌륭한 인재를 뽑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자기 제자들을 뽑아서 3사(三司)의 요직에 앉혔다. 그러자 훈구파는 사림파를 맹렬히 비방하였는데, 이들은 심지어 조광조가 왕의 권위를 무시하고 신권 정치를 강화하려 한다는 의구심을 품기까지 하였다. 이런 가운데 조광조는 <중종반정(中宗反正)> 당시 반정 공신에 오른 이들 가운데 자격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주장하면서, 반정 공신을 다시 심사하여 반정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공신호를 삭제하였다. 이것을 <반정공신 위훈삭제(僞勳削除)> 사건이라고 한다. 이에 격분한 훈구파는 사림파를 타도하려고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중종도 조광조 일파의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도학적 언동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터였는데, 반정공신 위훈삭제 사건이 발생하자 중종반정을 반역으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되었다.

결국 중종은 장인 홍경주(洪景舟)에게 언문 밀지(密旨)를 내려서 조광조 일당을 제거하도록 명하였다, 중종의 밀지를 받은 훈구파 홍경주는 남곤・심정(沈貞) 등과 손을 잡고 11월 15일 밤에 궁중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자(李耔)·김정(金淨)·조광조·김구(金絿)·김식(金湜)·유인숙(柳仁淑)·박훈(朴薰)·박세희(朴世熹) 등의 사림파 일당을 모조리 체포하여 하옥시켰다. 이것이 바로 기묘사화이다. 이때 남곤은 사림파를 모조리 체포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영의정정광필(鄭光弼)과 우의정안당(安瑭)이 중종에게 간청하면서 체포된 사림파는 모두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고 마지막 8명만이 귀양을 갔다. 그러나 영의정정광필이 이들을 구원하려다가 파직당하면서 훈구파인 남곤과 심정의 주장에 따라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 갔다가 곧 사사(賜死)되었고, 그 외의 사람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기묘사화 당시 이조 참의였던 정충량은 호조 판서고형산(高荊山) 등과 함께 공신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중종은 “공신의 개정은 예전에 없던 일이다. 다만 정난공신(定難功臣)은 과연 상하가 환히 아는 일이므로 고쳤으나, 이는 기록된 지 오래니 고칠 수 없다.”하였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2일] 또한 정충량은 형조 참의정순붕(鄭順朋) 등과 함께 조광조 등의 사림파가 다른 나쁜 생각이 없으니 붕당으로 지목하여 죄를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뢰었으나, 중종은 따르지 않았다.[『중종실록』중종 14년 11월 16일] 이 때문에 1522년(중종 17) 4월 정충량은 기묘사화 때 사림파에 결탁한 행적이 있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중종실록』중종 17년 4월 12일, 중종 17년 4월 17일, 중종 17년 4월 18일] 당시 중종은 대간에 전교하기를, “정충량은 전조(銓曹)에 오래 있었으니 어찌 더 있고 싶겠는가. 체직하도록 하라.” 하였는데, 결국 그가 사림파를 지지하였다고 하여 대간에서 배척한 것이었다.

성품과 일화

정충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청렴하고 간결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3,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8 「중종조고사본말(中宗朝故事本末)」] 뜻이 담박하여 거짓됨이 없었고, 행실은 반듯하여 교만하지 않았으며, 처신하는 태도는 간소하였다. 집에서 지낼 때에는 검소하였고, 맡은 일은 반드시 근신(謹愼)하게 처리하였으며, 남들과는 신의를 가지고 교제하였다. 정성과 효심을 다하여 부모를 섬겼고, 친족들에게는 두터운 은애(恩愛)를 베풀어 화목하게 지냈다. 그는 성품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어서 마치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과 같았으며, 남의 과실이나 악행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품이 담박하여 재물을 모으려고 하지 않았고 처지에 순응할 따름이었다.[「정충량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광주시 장지동에 있으며,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정충량묘갈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 이재(李梓)의 딸이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정수후(鄭守厚)이다.[「정충량묘갈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고대방(典故大方)』
  • 『기묘록(己卯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기묘록속집(己卯錄續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남계집(藍溪集)』
  • 『충재집(冲齋集)』
  • 『모재집(慕齋集)』
  • 『음애집(陰崖集)』
  • 『학포집(學圃集)』
  • 『사재집(思齋集)』
  • 『충암집(冲庵集)』
  • 『소재집(穌齋集)』
  • 『은봉전서(隱峯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