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任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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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0(광해군 12)~1687(숙종 13) = 68세]. 조선 중기 효종(孝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문중(文仲)이고, 호는 석문(石門) 또는 호은(壺隱)이다.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을 지낸 임준백(任俊伯)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부호군(副護軍)이발(李勃)의 딸이다. 공조 참판(參判)을 지낸 임의백(任義伯)의 조카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48년(인조 26) 29세의 나이로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68년(현종 9) 정시(庭試) 을과(乙科)에 합격하였으나 시험문제가 성균관 반제시(泮製試)에 나온 문제라는 대간(臺諫)의 지적에 따라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후 51세가 되던 1670년(현종 11) 별시(別試) 병과(丙科)에 재급제 하였다.[『방목(榜目)』] 이에 앞서 1653년(효종 4) 34세 때부터 음보(蔭補)로 관직에 진출하였다. 효종 대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를 시작으로, 1655년(효종 6) 사옹원(司饔院)직장(直長), 군기시(軍器寺)주부(主簿), 호조 좌랑(佐郞)을 거쳤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효종 5년 2월 25일, 효종 5년 7월 14일, 효종 6년 9월 25일, 효종 7년 12월 26일, 효종 8년 7월 27일]

1660년(현종 1) 창평현령(昌平縣令)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현종 1년 11월 13일] 이후 10년간 삭녕현감(朔寧縣監), 통진현감(通津縣監)의 외관직과 공조 좌랑, 형조 좌랑, 공조 정랑(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670년(현종 11) 회양부사(淮陽府使)로 나갔는데, 당시 영동지방에서 환술(幻術)로 민간을 현혹하며 음사(陰祀)를 일으켰던 무당을 장살시켰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1년 11월 11일, 『승정원일기』현종 11년 5월 5일]

1671년(현종 12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제수되었고, 1672년에는(현종 13) 사헌부 장령,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 사간원 헌납(獻納),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쳤다.[『현종실록』현종 12년 12월 22일, 현종 13년 6월 11일, 현종 13년 6월 24일, 현종 13년 6월 29일, 현종 13년 7월 11일, 현종 13년 7월 15일, 현종 13년 윤 7월 18일, 현종 13년 윤7월 28일, 현종 13년 11월 16일, 현종 13년 11월 25일] 이 시기 사헌부 지평(持平)조창기(趙昌期)가 당파의 폐해를 지적한 상소를 올린 일이 있었는데, 임규(任奎)는 조창기의 주장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단정치 못한 행실이라 지적하면서 앞장서서 그를 공박하였다.[『현종실록』현종 13년 윤7월 11일, 현종 13년 8월 7일] 1673년(현종 14)에는 다시 세자시강원 필선이 되었고, 1674년(현종 15)에는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으로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현종 14년 1월 26일, 현종 15년 7월 22일]

숙종 시대 활동

1680년(숙종 6)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로 있다가 그 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로 나가게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6년 4월 29일, 숙종 6년 5월 12일] 이때 윤휴(尹鑴)가 원장으로 있던, 정개청(鄭介淸) 배향 서원이 도내의 무뢰배들과 손을 잡고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므로 폐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훼철을 단행하게 하였다.[『숙종실록』숙종 6년 윤8월 24일] 그러나 이듬해인 1681년(숙종 7) 정령(政令)에 태만하고, 행동거지가 사리에 어긋나서 온 도(道)의 사람들이 모두 실망한다는 대간(臺諫)의 논박으로 임규는 전라도관찰사에서 파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7년 1월 3일] 그는 그 해 3월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자신이 파직된 것이 전주판관(全州判官)심집(沈輯)의 무고에 의해 이루어졌다며 심집의 죄를 폭로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3월 16일, 숙종 7년 3월 19일, 숙종 7년 9월 4일]

1682년(숙종 8년) 승지와부사직(副司直)을 거쳐 1683년(숙종 9)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가게 되었다.[『숙종실록』숙종 9년 11월 4일] 이어 1686년(숙종 12) 다시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가 철원도호부사(鐵原都護府使)를 거쳐, 얼마 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3월 27일, 숙종 12년 8월 20일] 그러나 이때 다시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의 행적이 문제가 되어 탄핵을 받게 되었다. 관찰사가 정무를 처리하던 선화당(宣化堂)에서 신사(神祀)를 설했다하여 조상우(趙相愚)의 공박을 받게 된 것이었다.[『숙종실록』숙종 12년 9월 21일] 임규는 근거 없는 비방이라며 자신을 변론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사간원에서 그의 파직을 청하였으므로 황해도관찰사로 부임하지 못하였다.[『승정원일기』숙종 12년 10월 5일, 숙종 12년 10월 8일, 숙종 12년 10월 9일] 이후 이듬해인 1687년(숙종 13)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임규의 행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임규는 나이 겨우 약관(弱冠)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예절에 지나칠 정도로 슬퍼하다가 야위었다. 또 장년(壯年)이 지나서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는 특별히 본래의 예절에 따라 하고 권도의 제도를 따르지 않았는데, 일생 동안 병을 잘 앓은 것은 실로 이것이 빌미가 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한편 그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있을 때에 송시열(宋時烈)이 장기(長鬐)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어 있었는데, 그때 조정에서 그곳에 왕래하는 것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그만 혼자 서신으로 문안을 드리고 끊임없이 음식을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국조인물고』]

묘소와 후손

임규의 묘소는 토산(兎山) 수인면(壽仁面) 오룡동(五龍洞)에 있다. 내종제(內從弟) 이담(李橝)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전한다.

그의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성종(成宗)의 왕자 회산군(檜山君)이염(李恬)의 5대손인 창선대부(彰善大夫) 덕인정(德仁正)이준(李墫)의 손녀이자 돈용교위(敦勇校尉)이무립(李茂立)의 딸이다. 2남 1녀를 낳았지만 오직 1남만 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임진원(任鎭元)이다. 임진원은 여산부사(礪山府使), 영월부사(寧越府使) 등을 역임하였다.[『국조인물고』]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축록(己丑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