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의백(任義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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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5년(선조 38)~1667년(현종 8) = 63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공조 참판(參判)과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계방(季方)이고, 호는 만한(晩閒), 또는 금시당(今是堂)이다. 본관은 풍천(豐川)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임연(任兗)이고, 어머니 초계 정씨(草溪鄭氏)는 영의정(領議政)추증(追贈)된 정유성(鄭惟誠)의 딸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 및 송준길(宋浚吉) 등과 교유하였다.

인조~효종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식년시(式年試)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 대신 호서(湖西)로 피난하여 모두 무사할 수 있었다.[『도곡집(陶谷集)』 권11 「평안도관찰사임공신도비(平安道觀察使任公神道碑銘)」 이하 「임의백신도비」로 약칭] 병자호란이 끝난 후 제용감(濟用監)참봉(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승진되어 호조 좌랑(佐郞)에 이르렀다가 통천군수(通川郡守)로 나갔다. 1649년(인조 27) 별시(別試)에 급제하여 직강(直講)이 되었다.[「임의백신도비」]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孝宗) 즉위 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8월 16일] 이후 1650년(효종 1)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과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전직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6월 1일, 효종 1년 7월 15일, 효종 1년 윤11월 17일] 이때 임의백(任義伯)이 수원부사(水原府使)변사기(邊士紀)를 김자점(金自點)과 결탁한 일로 탄핵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이시백(李時白)이 변사기를 옹호하자 이를 논박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12월 30일] 결국 이 일로 임의백은 1651년(효종 2) 외직으로 나가게 되어 안주판관(安州判官)으로 임명되었다가 영천군수(榮川郡守)로 나갔다.[『효종실록』효종 2년 2월 28일] 그러나 얼마 후 <김자점의 옥>이 발생하여 그 역모가 발각되면서, 효종이 임의백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칭찬하고 사헌부 사간(司諫)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효종 3년 1월 28일, 『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6년 5월 18일]

이어 그해 7월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11월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3년 7월 26일, 효종 3년 11월 1일] 이후 승정원 승지에 임명되었고, 1655년(효종 6) 그는 자신이 동래부사로 있으면서 일본에 대하여 보고 들은 바를 효종에게 자세히 전하였다. 그리고 동래를 방비하는 방책을 세울 것을 주장하면서, 동래와 양산(梁山) 사이에 산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다.[『효종실록』효종 6년 1월 25일] 이러한 방책 건의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아서, 임의백은 그해 10월에도 금정산(金井山)에 성을 쌓아 부(府)의 소재지를 옮겨 설치할 것과 기장(機張) 및 양산을 동래에 합하여 큰 진으로 만들기를 청하였다.[『효종실록』효종 6년 10월 26일]

1655년(효종 6)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임명되어 군사를 정비할 것과 수양산성(首陽山城)을 수리할 것, 벽란(碧瀾)과 강서(江西)에 진을 설치할 것 등을 개진하였다.[『효종실록』효종 6년 4월 23일, 효종 6년 11월 16일, 효종 7년 10월 13일] 이후 1657년(효종 8) 승정원 승지로 임명되었다가, 4개월 뒤 다시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8년 1월 22일, 효종 8년 5월 13일]

현종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현종이 즉위한 후 형조 참의(參議)로 임명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즉위년 9월 25일] 이어 1660년(현종 1년) 1월 수원부사에 임명되었다가 7개월 뒤 다시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현종실록』현종 1년 4월 13일, 현종 1년 11월 9일]

1663년(현종 4)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전직되었는데, 사헌부 지평(持平)박세당(朴世堂)이 임의백은 승정원의 장관이 되기에는 인망이 차지 않는다면서 탄핵하는 바람에 체차되었다.[『현종실록』현종 4년 1월 17일, 현종 4년 3월 9일, 현종 4년 3월 15일, 현종 4년 3월 17일, 현종 4년 3월 20일, 현종 4년 3월 26일] 1664년(현종 5) 사은겸 진주사(謝恩兼陳奏使)홍명하(洪命夏)와 함께 부사(副使)로서 청(淸)나라에 갔다 왔다.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임의백은 이때의 여행 기록을 『금시당연행일기(今是堂燕行日記)』로 남겼다.[『현종실록』현종 5년 2월 13일] 이후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현종실록』현종 5년 6월 3일, 현종 5년 윤6월 25일] 이때 임의백은 광해군(光海君) 대에 후금(後金)과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삭탈된 부친 임연(任兗)의 신원을 호소하는 상소를 하여 아버지의 관작을 회복시켰다.[『현종실록』현종 5년 7월 18일]

1665년(현종 6)에 현종이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온양(溫陽)의 온천에 갔는데, 그때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임명되었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6년 8월 8일, 「임의백신도비」] 이 일로 인해 이듬해인 1666년(현종 7) 현종이 임의백에게 가자(加資)를 하고자 하니, 대관(臺官)이 그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였으나 현종이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7년 6월 3일, 「임의백신도비」] 1667년(현종 8)에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이 해 윤4월 4일에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임의백신도비」]

성품과 일화

임의백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강직하고 명쾌하며 책략이 풍부하였다. 일을 꾀할 적에 안전의 효과를 구하지 않고 반드시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국법(國法)을 신중히 지켜 자제들을 위해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 자신을 청백과 검소로 가다듬어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다.[「임의백신도비」]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김자점의 옥이 발각된 후 사간원에서 연성군(延城君)이시방(李時昉)이 김자점을 비호하였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귀양을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이시방은 그 전에 자신을 비판했던 이시백(李時白)의 아우였다. 그러나 임의백은 “그 가문은 본래 충성과 근신으로 이름이 났으니, 지나치게 의심할 것이 없다.” 하고, 그 계사(啓辭)를 중지시켰다. 이러한 공정한 판단이 사람들을 감복시켰다.[「임의백신도비」]

묘소와 후손

임의백의 묘소는 충청도 보은군 속리산면 만수리에 있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신도비가 남아있다.[「임의백신도비」]

부인 상산 김씨(商山金氏)는 관찰사(觀察使)김상(金尙)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다. 1남 임좌(任座)는 상의원(尙衣院)정(正)을 지냈고, 2남 임방(任埅)은 공조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는데,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유배되었다가 죽었으며, 후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3남 임승(任陞)은 학생(學生)이었고, 4남 임동(任董)은 진사(進士)였다. 1녀는 현감(縣監)강진(姜璡)과 2녀는 사인(士人)윤지상(尹趾祥)과 각각 혼인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 임성주(任聖周)가 고손(高孫)이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김철웅, 「임의백(1605~1667)의 활동과 『今是堂燕行日記』」, 『영남학』19 ,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