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尹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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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9년(명종 4)∼1614년(광해군 6) = 6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판서(判書)이고, 봉작(封爵)은 무성 부원군(茂城府院君)이며,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이원(而遠)이고, 호는 퇴촌(退村)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인데,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이조 판서(判書)추증(追贈)된 윤화명(尹化溟)이며, 조부는 교위(校尉)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윤심(尹深)이다. 아버지는 별좌(別坐)를 지내고 영의정송릉부원군(松陵府院君)에 추증된 윤언청(尹彦淸)이다.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별제(別提)이찬(李贊)의 딸이다. 탁계(濯溪)김치원(金致遠)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진사(進仕) 양과에 모두 합격하였는데, 진사시험에서 장원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참고.) 10년이 지나서, 1586년(선조 1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8세였다.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 부정자(權知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전임되었다. 1588년(선조 21)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예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17 「무성부원군 윤공형 신도비명(茂城府院君尹公泂神道碑銘)」 참고, 이하 「신도비명」이라 약칭.) 1589년(선조 22) 하성절사(賀聖節使)윤근수(尹根壽)의 서장관(書將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갔는데, 명나라 예부(禮部) 낭중(郎中)과 교섭하여,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수정한 『대명회전(大明會典)』 전질을 얻어 가지고 돌아와서, 사섬시(司贍寺)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다.

1590년(선조 23)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조정에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비롯된 <기축사화(己丑士禍)>가 끝난 다음에 논공행상(論功行賞)하면서, 행상이 너무 남발되었다. 그는 이를 비판하기를, “선왕(先王) 때에 녹훈(錄勳)한 지 10년 뒤에 고친 적이 있습니다. 10년 뒤에 고치기보다는 애초에 고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그리고 윤형은 중종 때 노영손(盧永孫)이 <중종반정(中宗反正)>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대사성(大司成)이과(李顆)가 역모하였다고 고변(告變)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가, 나중에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환수된 사건을 들춰내어, 논공행상을 공정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선조가 격노하여, 결국 그는 파직되었다. 이때 그는 파직 이상의 형벌을 받을 수 있었으나, 우계(牛溪)성혼(成渾)이 적극 그를 구원하여 파직에 그쳤다고 한다. (「신도비명」 참고.)

그런데 그 해 조선과 중국 명나라 사이에 2백여 년간 교섭해 오던 <종계변무>가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졌으므로, 선조는 중국과 교섭하는 데에 공로가 많은 사람들에게 논공행상을 하였다. 윤형이 하성절사의 서장관으로 가서 명나라 예부와 교섭한 공로가 높이 평가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훈되고, 무릉부원군(茂陵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로 인하여 특별히 서용되어 충훈부(忠勳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 1591년(선조 24) 형조 정랑이 되었다가,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를 거쳐서, 종부시(宗簿寺)정(正)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을 겸임하였다.

1592년 4월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는데, 충주에서 3도 순변사(三道巡邊使)신립(申砬)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선조는 서북 지방으로 피난하였다. 또 왕자들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왜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운 다음 임해군(臨海君)을 함경도로 보내고, 순화군(順和君)을 강원도로 보냈다. 광해군은 처음에 선조와 함께 의주(義州)로 피난가다가,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국난(國難)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권섭국사(權攝國事)를 맡아 분조(分朝)를 이끌게 되었다. 선조와 세자 광해군은 영변(寧邊)에서 갈라져서, 선조는 의주로 향하고,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서 전라도 전주(全州)에서 3도의 군사를 수습하여 왜적과 싸웠다. 윤형은 세자시강원의 사서로서 평안도 성천(成川)에서 세자를 모시고 남행(南行)하면서 경솔하게 적병의 길로 들어갔다고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당하였다.(「신도비명」 참고.)

1593년(선조 26)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선조를 호종(扈從)하였는데, 서울로 환도(還都)한 뒤에, 군기시(軍器寺)정(正)에 임명되었다. 1594년(선조 27)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3년 동안 상례를 끝마치고, 1596년(선조 29)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고, 종부시 정을 거쳐서,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신도비명」 참고.)

1597년(선조 30)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고, 명나라 부총병(副摠兵)오유충(吳惟忠)이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자, 그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군사를 안내하였다. 1599년(선조 32) 형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서,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옮겼다. 1600년(선조 33)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가,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어,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오위도총부9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명나라 경리(經理)만세덕(萬世德)이 명나라 군사를 이끌고 오자, 그 접반 부사(接伴副使)로 활약하였다. 그때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懿仁王后)가 돌아가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3년 동안 능침을 잘 지켰고, 그 공으로, 1602년(선조 35)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였다. 1603년(선조 36) 공조 판서로 승진되었고, 1605년(선조 38) 호조 판서로 옮겼고,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하여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신도비명」 참고.) 그때 춘추관(春秋館)지사(知事)를 겸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실록(實錄)을 다시 간행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1606년(선조 39) 서천 군수(舒川郡守)에 임명되었다가, 1607년(선조 40) 오위도총부 도총관이 되었다.[<실록>]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1609년(광해군 1) 경기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별시 문과의 고시관(考試官)이 되었는데, 그때 과거에 응시한 임숙영(任叔英)이란 자가 과거시험의 대책(對策)에서, 광해군의 처족(妻族)인 유씨(柳氏) 일가의 전횡과 임금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모든 고시관들이 그의 대책문을 뽑으려 하지 않았으나, 그의 재능을 아낀 우의정심희수(沈喜壽)가 적극 추천하여 임숙영을 병과로 급제시켰다. 그러나 그 대책문을 읽어본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임숙영의 합격을 취소시키도록 하였다. 이 일로 말미암아 삼사(三司)의 간쟁이 이어졌다.(『광해군일기』 참고.) 고시관 윤형은 상소를 올려 그를 문과방목에서 제명하지 말도록 극구 주장하였다.(「신도비명」 참고.) 이때 영의정이항복(李恒福) 등의 중재로 사건이 확대되지 않고 진정되면서, 임숙영은 다시 합격 처리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임진왜란> 때, 선조를 경기도 이천(伊川)에서 평안도 정주(定州)까지 호종한 공로로써 정1품하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무성부원군(茂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14년(광해군 6) 6월 2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신도비명」 참고.)

종계변무와 윤형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때 편찬된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이성계가 고려 말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인임은 고려의 권신으로서 전횡하다가, 최영(崔瑩)과 이성계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이다. 조선은 태종 때부터 선조 때까지 모두 2, 30 차례에 걸쳐 주청사(奏請使)와 사은사(謝恩使)를 보내어 태조(太祖)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가 잘못 기록된 경위를 변명하고 그 기록을 고쳐달라고 주청(奏請)하였는데, 이것을 <종계변무>라고 한다. 선조 때 율곡(栗谷)이이(李珥)는 “종계(宗系)가 무고(誣告)를 당하였는데도 오랫동안 이를 변명하여 바로잡지 못한 것은 사신(使臣)다운 사람을 얻지 못한 탓이다.”고 하였다.(「신도비명」 참고.) 선조 때 마침 명나라에서 『대명회전』을 수정 보완하는 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그 수정을 요구하여 명나라 황제의 허락을 얻어냈으나, 선조는 수정된 원본을 직접 보고 싶어 안달하였다.

1581년(선조 14)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를 주청사로 보내어 수정된 『대명회전』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명나라측의 허락을 얻어냈고, 1584년(선조 17) 주청사황정욱(黃廷彧)이 역관홍순언(洪純彦) 등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새로 편찬한 『대명회전』에서 조선 종계(宗系)를 수정 보완한 부분의 등본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선조는 아직 수정된 『대명회전』의 원본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거듭 사신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그 원본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1587년(선조 20) 사은사유홍(兪泓)이 수정된 『대명회전』을 예부에 부탁하자, 예부에서 수정판 『대명회전』을 아직 황제가 열람하지 않았다고 하여 이를 거절하고, 가본(假本)을 보내주었다. 1589년(선조 22) 하성절사윤근수와 서장관윤형 일행이 『대명회전』 전질을 예부에서 얻어 가지고 돌아오면서 조선의 오랜 숙원사업인 <종계변무>의 교섭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선조는 이를 기념하여 나라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으며, 종계변무 해결에 노력한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내렸는데, 윤형을 광국공신 2등에 책훈하고, 무릉 부원군에 봉했다.

성품과 일화

윤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관대하고 대범하여, 사람들은 그가 기뻐하거나 노여워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행동은 청렴하고 근신하여,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에 남을 간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그는 집안에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여, 바깥으로 구족(九族)에게까지 인(仁)이 미치게 하였다. 부원군에 책봉되어 부귀를 누리면서도 어버이를 섬길 때 재물을 자기 이름으로 소유한 것이 없어서, 하나의 물건이라도 부모에게 고하지 않고 사사로이 사용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종기를 앓아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 입으로 종기를 빨아내어 병이 나았다. 자기의 신분이 귀해졌다고 하여 부모를 봉양하거나 시중드는 일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하도록 하지 않았다. 친족 중에 어려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다가 길러서 혼인을 시키고 생업을 마련해 주었다.(「신도비명」 참고.)

1589년(선조 22)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인하여 <기축사화>가 일어나서, 큰 옥사(獄事)를 치른 다음에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서로 곁눈질을 하고 말 한 마디 잘못하여 화를 당할까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헌부 지평을 맡아서, 논공행상에서 터무니없이 녹훈(錄勳)을 받은 자들을 탄핵하였으니, 옛날의 강직한 언관(言官)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때가 바야흐로 동서(東西) 붕당(朋黨)이 결성되는 시기였으므로 대부분 탄핵당하여 부귀하고 현달(顯達)하지 못하였으나, 윤형은 좋은 명망을 지니고 부귀를 누리면서 일생을 마쳤으니, 이것은 선조가 그를 깊이 신임했기 때문이다. 광해군 시대 원훈(元勳)으로서 의리상 관직을 떠날 수 없었고, 또 떠나지 않아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으므로, 그는 혼자 탄식하면서 날마다 친족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면서 만년을 보전하였다.(「신도비명」 참고.)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대산(金臺山)의 선영에 있는데, 미수(眉叟)허목(許穆)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17 「무성부원군 윤공형 신도비명(茂城府院君尹公泂神道碑銘)」)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첫째부인 일선 김씨(一善金氏)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충훈부 도사윤인연(尹仁演)이다. 둘째부인 창녕성씨(昌寧成氏)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부인 창녕성씨와 며느리 덕수장씨(德水張氏)는 모두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자결하여 죽었다.(「신도비명」 참고.)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문과방목(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난중잡록(亂中雜錄)』
  • 『시정비(時政非)』
  • 『아계유고(鵝溪遺稿)』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유천차기(柳川箚記)』
  • 『소재집(穌齋集)』
  • 『약포집(藥圃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고담일고(孤潭逸稿)』
  • 『태천집(苔泉集)』
  • 『임곡집(林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