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삼(尹重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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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3년(명종 18)∼1619년(광해군 11) = 57세]. 조선 전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호조 참판(參判)과 형조 참판 등을 지냈고, 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자는 지임(志任)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범룡(尹范龍)이고, 어머니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이창(李昶)의 딸이다. 태종(太宗)의 부마(駙馬)인 파평군(坡平君)윤암(尹巖)의 현손이고, 이조 참판윤희인(尹希仁)의 증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8년(선조 21)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진사(進士) 양과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대과(大科)에 여러 번 실패하여, 음직(蔭職)으로 나갔다. 1601년(선조 34)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가, 상의원(尙衣院)직장(直長)이 되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19 「윤중삼(尹重三)」 이하 「윤중삼비문」으로 약칭] 1602년(선조 35) 9월 형방(刑房)도사(都事)가 되어서 역적 화수(和愁) 등을 추국(推鞫)하였는데, 그 공으로 6품의 관직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5년 9월 28일] 그 뒤에 통례원(通禮院)인의(引儀)·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1603년(선조 36) 죽산현감(竹山縣監)이 되었다가, 1604년(선조 37) 8월 예산현감(禮山縣監)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8월 4일, 「윤중삼비문」] 1606년(선조 39)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44세였다.[『방목』]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조정으로 들어와서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는데, 번잡한 업무를 신속하게 잘 처리하였으므로, 호조 판서가 그를 추천하여 호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다. 그때 가통례(仮通禮 : 임시 의전을 맡아보는 관리)로서 왕을 인도할 적에 광해군이 그가 의례(儀禮)에 익숙한 것을 보고 마음에 들어서 청요직(淸要職)에 발탁하였다.[「윤중삼비문」] 1609년(광해군 1) 9월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하였는데, 이때부터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년 9월 11일, 「윤중삼비문」] 1610년(광해군 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을 거쳐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고, 사간원 사간(司諫)·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거쳐서,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사도시(司導寺) 정(正)상의원(尙衣院) 정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월 13일, 광해군 2년 윤3월 6일, 광해군 2년 6월 7일, 광해군 2년 11월 19일, 광해군 2년 12월 30일, 「윤중삼비문」] 1610년(광해군 2) 10월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가 대간을 공격하였으므로, 광해군이 마지못하여 사헌부 장령윤중삼을 파직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0월 11일, 광해군 2년 10월 21일]

1612년(광해군 4) 2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대신(大臣)이 그를 추천하여 국문청(鞫問廳)에 죄인을 심문하는 낭관(郎官)에 임명되었다. 옥사가 끝나자, 그 공로로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여 형난공신(亨難功臣)에 책훈되었다.[「윤중삼비문」] 그해 9월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 그해 11월 찰리사(察理使)가 되어 충홍우도(忠洪右道)로 나가서, 충청도의 양전(量田) 사업을 관리하였다. 그해 윤11월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12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1월 3일, 광해군 4년 윤11월 15일] 1613년(광해군 5) 6월 승정원 우승지로 승진되었는데. 그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이 폐서인(廢庶人)되었으나 아직 궁중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윤중삼은 정엽(鄭曄)·이덕형(李德泂) 등과 함께 광해군에게 “이의(영창대군)는 이미 폐서인이 되어 속적(屬籍)에서 끊어졌으니, 궁중에 잠시라도 편안히 있게 할 수 없습니다. 빨리 조치하소서.”라고 광해군에게 독촉하여, 궁중에 있던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도록 하였다. 그해 11월 강원도감사(江原道監事)로 나가서 상벌을 공정하게 행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11월 16일]

이듬해인 1614년(광해군 6) 10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임명되었다가, 1615년(광해군 7) 1월 수원부사(水原府使)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1월 20일] 1616년(광해군 8) 4월 그는 신경희(申景禧) 등이 능창군(綾昌君)이전(李佺)을 추대하려는 역모를 적발하여 신경희 및 김이개(金伊介) 등을 체포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었으며, 영평군(鈴平君)에 봉해졌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8월 1일, 광해군 11년 3월 9일, 「윤중삼비문」] 그 뒤에 그가 이미 일을 잘 처리한다고 명성이 높았으므로 특별히 영건도감(營建都監)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윤중삼비문」]

1617년(광해군 9) 7월 사은사(謝恩使) 부사(副使)에 임명되었다가, 중국 명나라에 악기(樂器)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주청사(奏請使)의 정사(正使)에 바꾸어 임명되어, 중국 북경(北京)에 가서 중국의 악기들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다.[『광해군일기』광해군 9년 7월 1일, 광해군 9년 7월 3일] 왕이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낼 때 중국 악기를 가지고 연주하였기 때문이다. 1618년(광해군 10) 7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9월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고, 그해 12월 형조 참판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7월 18일, 광해군 10년 9월 12일] 1619년(광해군 11) 특별히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이미 병이 나서 앓다가, 1619년 3월 9일 그의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57세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1년 3월 9일]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조회를 중지하고 예장(禮葬)을 치르고,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追贈)하였다.[「윤중삼비문」]

한편 그는 청요직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청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는데, 청요직을 거쳐야만 2품의 판서(判書)와 1품의 정승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늦게 과거에 합격하였으므로, 광해군 대에 청요직을 두루 거쳤으나 벼슬이 종2품의 참판(參判)에 그치고 말았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영민하고 식견이 주밀하였다. 그는 일을 잘 처리한다고 명성이 높았는데, 일체 법대로 일을 처리하고 조금도 남을 봐주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위의 비난을 곧잘 받았다. 그러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였는데, 시집간 여동생이 집이 가난하자,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는 제사를 모시지 않도록 빼주고, 늙도록 여동생과 서로 화락(和樂)하게 지냈다. 친척과 화목하게 지내고 친소(親疎)의 차이가 없었고, 친구를 환대하여 만나면 서로 화기(和氣)가 넘쳐흘렀다. 남들의 위급한 일을 돌봐주면서 마음과 힘을 다 쏟았기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에는 사람들이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하게 그를 찾아들었다. 벼슬살이할 때 국력(國力)을 아끼고 정사(政事)를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시급하게 여기는 문제점을 파악하여 해결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으므로, 일을 시행할 때 시급하지 않는 특별한 일을 시행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각(臺閣)에서 근무할 적에는 법을 지키려고 대원(臺員)들과 논쟁하였고, 궁벽한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간사한 서리들을 억제하였다.[「윤중삼비문」]

1610년(광해군 2)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의병장 곽재우가 상소하기를, “대간(臺諫)에서 전하를 속입니다.”고 대간을 공격하였는데, 그때 사헌부 장령윤중삼은 생각하기를, “곽재우가 논한 것 중에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 들어 있으므로, 같이 따질 필요가 없다.” 하고 사피(辭避)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의병장 곽재우 상소문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비변사(備邊司)에 회부하였다. 비변사에서 회계(回啓)하기를, “한 사람이 잘도 일을 망쳐 놓았습니다.” 하고, 사헌부 장령윤중삼을 지목하여, 그가 남보다 일을 잘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일을 망쳐 놓았다고 비판하였다. 사헌부 장령윤중삼이 상소하여 사직하기를 청하니, 광해군이 사직하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그의 직책을 갈기를 청하니, 광해군이 마지못하여 사헌부 장령윤중삼을 파직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0월 11일, 광해군 2년 10월 21일]

묘소와 후손

묘소의 위치는 전해지지 않으나, 월사(月沙)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윤중삼비문」]

부인 고령 신씨(高靈申氏)는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신진(申津)의 딸이다.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신탄(申坦)은 아버지 윤중삼보다 먼저 죽었는데, 그의 아들은 신여경(申餘慶)다. 차남 신집(申土集)과 3남 신식(申埴)은 모두 일찍 죽었고, 4남은 신감(申堪)이고, 5남은 신증(申增)이다. 장녀는 주부(主簿)홍진도(洪進道)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진사(進士)유명립(柳命立)에게 시집갔다.[「윤중삼비문」]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동계집(桐溪集)』
  • 『상촌집(象村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월사집(月沙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오리집(梧里集)』
  • 『녹문집(鹿門集)』
  • 『감수재집(感樹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