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인함(尹仁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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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1년(중종 26)∼1597년(선조 30) = 67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형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자(字)는 양숙(養叔)이고, 호(號)는 죽재(竹齋) 또는 죽당(竹堂)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응규(尹應奎)이고, 어머니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참판이수동(李壽童)의 딸이다.

명종 시대 활동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3년 뒤인 1555년(명종 10) 25세의 나이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권지 정자(權知正字)를 거쳐서,[『송자대전(宋子大全)』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刑曹參判尹公仁涵行狀)」] 1558년(명종 13)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고, 다시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명종실록』명종 13년 1월 5일 · 7월 4일] 1559년(명종 14) 홍문관(弘文館) 정자에 임명되었고, 1560년(명종 15) 홍문관 저작(著作)을 거쳐서 박사(博士)가 되었으며,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명종실록』명종 14년 4월 23일, 명종 15년 5월 14일 · 10월 30일 · 12월 29일] 그는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였고 과제(課題)를 볼 때마다 1등을 하였으므로, 명성이 있었다. 1561년(명종 16) 병조 좌랑(佐郞)을 거쳐서, 이조 좌랑이 되었으며,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 도사(京畿道都事)에 임명되었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1563년(명종 18) 이조 정랑(正郞)으로 승진되었으나, 이 때 윤인함은 이량(李樑)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량은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삼촌인데,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배경으로 세력을 확대시킨 명종의 외삼촌인 윤원형(尹元衡)의 전횡을 견제하려는 명종의 의지로 중용되었다. 명종 후반에 이량은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정유길(鄭惟吉) · 고맹영(高孟英) 등과 당여(黨與)를 만들고 세력을 확대하였다. 1562년(명종 17) 이량은 이조 참판에 오르면서 그 세력은 더욱 커졌고, 예조 판서 · 공조 판서 등을 거쳐 1563년(명종 18) 이조 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량은 기대승(奇大升) · 허엽(許曄) 등의 사림(士林)들과 가까웠던 조카 곧 인순왕후의 오빠인 심의겸(沈義謙)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심강(沈鋼)과 심의겸 부자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당시 이량의 반대파에서는 이량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이 전랑(銓郞)이 된 것은 윤인함이 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무고(誣告)하였다. 윤인함이 이조 정랑으로 있을 때 완석(完席)에서 의결된 말을 처남인 정윤희(丁胤禧)에게 말해 주었고, 정윤희가 즉시 이량에게 전한 결과라며 탄핵을 당하였는데, 결국 윤인함은 무소(誣疏)와 동료들에게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당하였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선조 시대 활동

어머니의 상(喪)을 치른 후,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과 종부시(宗簿司) 첨정(僉正)에 임명되었고, 아버지 봉양을 위해 외직을 요청하여 풍덕 군수(豐德郡守)로 나갔다가,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전임되었다. 1578년(선조 11)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었고, 1581년(선조 14) 봉상시(奉常寺) 정을 거쳐 황주 목사(黃州牧使)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남원 부사(南原府使)가 되었고, 이어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임명되었다. 이후 호조 참의(參議)를 거쳐서 경주 부윤(慶州府尹)에 임명되었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당시 그는 경주 부윤이었다. 부산포에 상륙한 왜구들은 일거에 동래성을 함락하고 언양(彦陽)을 거쳐 경주로 육박하였다. 관군(官軍)이 곳곳에서 붕괴되자, 정부에서는 윤인함이 유신(儒臣)으로 나약하고 겁을 내므로 부윤으로 적합하지 않다 하여 체직시키고,[『연려실기술』 권15 「선조조고사본말」] 포망장(捕亡將)으로 삼아 여러 군대의 후미로 가서 감독하고 살피도록 하였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왜군은 언양에서 사이 길로 해서 전진하여 경주를 함락시킨 후, 본진은 영천을 지나 북진을 계속하고, 경주에 남아있던 잔당들이 후속되는 증원병과 합세하여 온갖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였다. 그러자 부윤 · 판관을 비롯한 12읍의 의사(義士)들이 모여 끝까지 결사 항쟁할 것을 맹세하는 ‘문천회맹(蚊川會盟)’을 하였다. 이후 서천(舒川) 전투라는 큰 항전을 치른 후, 경주성은 함락된 지 4개월 여 만에 수복되었다. 경주성 함락 당시 포망장으로 서천(西川)에 있었던 윤인함도 경주의 병력을 모아 거느리고 여러 차례 기병(奇兵)을 출동시켜 적군 수백 명을 죽이는 등 성을 탈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1593년(선조 26) 윤두수(尹斗壽)의 추천으로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비변사에서는 “호서(湖西)는 오늘에 있어 관계되는 바가 더욱 중한 곳으로, 밖으로는 군량을 조달하여 중국군에게 공급하고 안으로는 서울의 울타리가 되므로 방백(方伯)을 맡을 사람을 반드시 잘 선발해야 합니다. 정윤우(丁允祐)는 이미 연로하여 합당하지 않은데 윤인함은 정윤우보다 더 노쇠합니다. 이런 어려운 때를 당해서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 힘써야 합니다.” 라며 체직시킬 것을 건의하자, 관찰사에서 체직되어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26년 10월 26일 · 10월 29일] 1595년(선조 28) 경주에서 세운 공로가 인정되어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행 장례원(掌隷院) 판결사(行判決事)가 되었고, 1596년(선조 29)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면서, 영접사(迎接使)가 되어 평양으로 가서 명나라 장수를 영접하였는데, 병이 나서 돌아오지 못하고 향년 67세로 관사(官舍)에서 세상을 떠났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성품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연로한 부친이 홀아비로 살 때 잠시도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조석으로 봉양할 때 온갖 맛있는 음식을 다 장만하였는가 하면, 매번 편안히 봉양을 해드리기 위하여, 지방의 고을로 파견되어 가기를 극력 요청하였다. 또 그는 문장과 그림에 뛰어났다. 글을 지을 때에는 붓을 들면 곧바로 써 내려가 까다로운 양상이 전혀 없었는가 하면, 대나무를 잘 그려 조그만 종이에라도 한 번 그려놓았다 하면 세상의 보배가 되었는데, 그의 호를 ‘죽재(竹齋)’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저서에 『죽재집』이 있다. 율곡(栗谷)이이(李珥), 제봉(霽峯)고경명(高敬命), 황강(黃岡)김계휘(金繼輝), 백록(白麓)신응시(辛應時), 월정(月汀)윤근수(尹根壽)와 친밀하게 지냈다.[『송자대전』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청송리(靑松里)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211 「형조참판 윤공인함 행상(刑曹參判尹公仁涵行狀)」] 1605년(선조 38) 선무 원종 공신(宣武原從功臣)이 되었고, 이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부인 나주 정씨(羅州丁氏)는 찬성(贊成)정응두(鄭應斗)의 딸인데, 3남 3녀를 낳았다. 1남은 정랑윤홍의(尹弘儀)이고, 2남은 현령(縣令)윤홍립(尹弘立)이며, 3남은 윤홍유(尹弘裕)이다. 1녀는 지사(知事)김지회(金之誨)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찰방(察訪)박원(朴源)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첨정이유(李瑜)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난중잡록(亂中雜錄)』
  • 『동각잡기(東閣雜記)』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학봉전집(鶴峯全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범허정집(泛虛亭集)』
  • 『퇴계집(退溪集)』
  • 『인재집(忍齋集)』
  • 『미암집(眉巖集)』
  • 『동원집(東園集)』
  • 『약포집(藥圃集)』
  • 『지헌집(芝軒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월사집(月沙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학사집(鶴沙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갈암집(葛庵集)』
  • 『약천집(藥泉集)』
  • 『명곡집(明谷集)』
  • 『강한집(江漢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