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강(沈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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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4년(중종 9)~1567년(명종 22) = 54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와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 등을 지냈다. 시호는 익효(翼孝)이고, 자는 백유(伯柔)이며,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에 봉해졌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심연원(沈連源)이고,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낸 김당(金璫)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교리(校理)를 지낸 심순문(沈順門)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심원(沈湲)이다. 명종(明宗)의 정비(正妃)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42년(중종 37) 중종이 아들 이환(李峘)을 경원대군(慶源大君 : 훗날의 명종)으로 봉작하고, 심강(沈鋼)의 큰딸을 그의 배필로 간택하였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34년 12월 21일, 중종 37년 11월 19일] 이어 심강은 1543년(중종 38)에 진사(進士)에 올라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자 특별히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에 음보(蔭補)되었다.[『명종실록(明宗實錄)』명종 22년 1월 20일]

1545년(명종 즉위년)에 관례에 따라 임금의 장인으로서 돈녕부 영사가 되었으며, 아울러 청릉부원군에 봉해졌다.[『명종실록』명종 즉위년 8월 2일] 1548년(명종 3)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제수되었다.[『대광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청릉부원군증시익효공심공지묘(大匡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靑陵府院君贈諡翼孝公沈公之墓』 이하 『심강신도비명』으로 약칭] 1558년(명종 13) 아버지 심연원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고, 1560년(명종 15)에 돈녕부 영사 겸 도총관에 다시 임명되었다.[『명종실록』명종 15년 8월 4일]

한편 심강은 사림의 보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561년(명종 16) 임백령(林百齡)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시호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충(忠)’자가 들어 있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어 박순(朴淳) 등이 처벌을 받게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6년 5월 20일, 명종 16년 5월 21일] 그러자 심강이 나서서 박순 등을 적극 변호한 끝에 파출로 끝날 수 있었다.[『명종실록』명종 16년 5월 21일, 명종 17년 2월 4일, 명종 22년 1월 20일] 또한 심강의 처남 이량(李樑)이 명종의 신임을 받아 점차 권력이 커지자, 1563년(명종 18) 사림이 그의 비리를 폭로하며 비판을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이량은 기대승(奇大升) 및 이산해(李山海) 등의 사림을 제거하고자 하였으나, 심강의 아들인 심의겸(沈義謙)에게 계획이 발각되었다. 결국 심강은 이량의 무리를 축출하기로 하고 심의겸을 통하여 인순왕후에게 전후 사정을 알리는 한편, 기대항(奇大恒)을 통해서는 이량의 죄악을 차자를 통해 명종에게 알리도록 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8월 19일, 명종 22년 1월 20일] 그 결과 이량은 관작이 삭탈되고 문외송출 당하였다.[『명종실록』명종 18년 8워 19일]

1564년(명종 19) 가을에 심병(心病)을 얻었는데, 그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더욱 쇠약해졌다.[『심강신도비명』] 1567년(명종 22) 1월 20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54세였다.[『명종실록』명종 22년 1월 20일, 『심강신도비명』] 그의 시호로 ‘익효(翼孝)’를 내렸는데, 도모하는 생각이 깊고 먼 것을 익(翼)이라 하고, 인자(仁慈)하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성품과 일화

심강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순후하고 근엄하며 순박하고 곧으며 자상하고 침중(沈重)하여 안으로는 강정(剛正)함을 지키고 착한 일을 하는 데는 용감하였다. 처신할 때와 사물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충신(忠信)하였으므로 부귀한 것이 이미 극에 달할수록 겸허함이 더욱 지극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을 잠시도 풀지 않았으며, 분잡하고 호화로움을 끊고 사람들과 교유함을 즐기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효도를 지극히 다하여 그 뜻을 힘써 맞추었고 맛있는 음식을 몸소 받들며 늘 명절 때는 축수(祝壽)하는 잔치를 벌여 일가 친척을 맞아 어버이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심강신도비명』]

한편으로는 은총을 빙자하여 재물을 탐하고 뇌물을 받아 인심을 사며, 많은 전택(田宅)을 차지하고 남의 노비를 탈취하는 등 마구 거둬들였으나, 성격이 시기하지 않고 남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평가도 있다.[『명종실록』명종 22년 1월 20일]

묘소와 후손

심강의 묘소는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옹정리 산14-2번지에 있는데, 할아버지 심순문(沈順門)과 아버지 심연원의 묘 아래에 안장되어 있다. 신도비(神道碑) 비문은 중추부(中樞府) 영사심수경(沈守慶)이 지었고, 글씨와 두전(頭篆)은 손자 심열(沈悅)이 썼다.[『심강신도비명』]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대(李薱)의 딸로 8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심인겸(沈仁謙)은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냈고, 둘째 아들 심의겸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심예겸(沈禮謙)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다. 넷째 아들 심지겸(沈智謙)은 부사용(副司勇)을 지냈으며, 다섯째 아들 심신겸(沈信謙)은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여섯째 아들 심충겸(沈忠謙)은 병조 판서(判書) 겸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에 이르렀다. 일곱째 아들 심효겸(沈孝謙)은 홍산현감(鴻山縣監)을 지냈고, 여덟째 아들 심제겸(沈悌謙)은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냈다. 맏딸은 인순왕후로, 명종의 정비이다. 1551년(명종 6)에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낳았으나, 세자는 13세가 되던 1583년(명종 18)에 요절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한 뒤에 인순왕후는 잠시 동안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즉위년 11월 22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즉위년 7월 3일] 둘째딸은 임영로(任榮老)에게 출가하였다.[『심강신도비명』]

한편 경종(景宗)이 왕세자이던 시절 심강의 6대손인 심호(沈浩)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받아 들였으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왕세자빈은 경종 즉위 후 단의왕후(端懿王后)에 올랐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44년 3월 8일, 『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즉위년 6월 15일]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견한잡록(遣閑雜錄)』
  • 『남파상국집(南坡相國集)』
  • 『대광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겸오위도총부도총관청릉부원군증시익효공심공지묘(大匡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五衛都摠府都摠管靑陵府院君贈諡翼孝公沈公之墓』
  • 『동각잡기(東閣雜記)』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석담일기(石潭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지산집(芝山集)』
  •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
  • 『후광세첩(厚光世牒)』
  • 『휴옹집(休翁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