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충겸(沈忠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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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5년(인종 1)∼1594년(선조 27) = 5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문신. 시호는 충익(忠翼)이며, 자는 공직(公直), 호는 사양당(四養堂)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이고, 어머니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이대(李薱)의 딸 완산부부인(完山府夫人)이다. 서인(西人)의 영수인 심의겸(沈義謙)의 동생이고 큰 누이가 인순왕후(仁順王后)이기도 하다. 1575년(선조 8) 이조 정랑(正郞)으로 천거되었으나 김효원(金孝元)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하였으며, 이 일로 동인(東人)과 서인의 당쟁이 더욱 심해졌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선조와 세자(世子 : 광해군(光海君)) 호종 및 군량미 조달을 담당하였다.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 청림군(靑林君)으로 추봉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72년(선조 5) 친시문과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등용된 후 호조 좌랑(佐郞)과 예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거쳤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5년 12월 13일, 선조 6년 2월 11일, 선조 6년 10월 25일,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5년 3월 1일, 『방목(榜目)』] 이어 1574년(선조 7)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된 후,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성균관 직강(直講), 병조 정랑,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홍문관 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선조실록』선조 7년 8월 7일, 선조 8년 12월 22일, 『심충겸신도비명(沈忠謙神道碑銘)』]

한편 1575년(선조 8) 심충겸은 형 심의겸에 의하여 이조 정랑에 천거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서인과 동인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 사건은 심충겸이 이조 정랑에 천거되기 3년 전인 1572년(선조 5)에 동인의 김효원이 이조 정랑으로 추천되었으나, 서인이었던 심의겸이 윤원형(尹元衡)의 문객 노릇을 했다는 이유로 김효원의 임명을 반대한 일에서부터 시작되었다.[『선조실록』선조 13년 7월 1일] 이 때문에 김효원은 이조 정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다가 나중에 이조 정랑에 올랐는데, 심의겸이 이때 김효원의 후임으로 자기 동생인 심충겸을 추천하였던 것이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13 「선조조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그러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외척’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선조수정실록』선조 8년 7월 1일,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이에 조정 대신들은 서로 심의겸과 김효원의 편으로 나뉘어 다투었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에는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제자들이,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들에는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제자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영남 세력과 기호 세력의 대결이 되기도 하였는데, 이렇듯 이 대립에는 혈연과 지연, 학연이 함께 얽혀 있었다. 당시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에, 심의겸은 서쪽에 살고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대립하는 두 세력을 동인과 서인으로 부르게 되었다.[『연려실기술』 권13 「선조조고사본말」] 결국 김효원과 심의겸 모두 중앙관직에서 체직되어 외직으로 물러났다.[『선조실록』선조 8년 10월 24일, 『연려실기술』 권18 「선조조고사본말」] 심충겸 자신이 일으킨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게 동서 당쟁을 격화시키는 사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1578년(선조 11)에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있던 중 임금의 뜻에 거슬려서 병조 정랑으로 체직되고 이후 한동안 요직에서 벗어나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과 성균관 사예(司藝), 예빈시(禮賓寺) 부정(副正) 등을 지냈다.[『심충겸신도비명』] 1582년(선조 15) 춘천부사(春川府使)가 되었고, 군자감(軍資監)내섬시(內贍寺)정(正)과, 군기시(軍器寺) 정, 제용감(濟用監) 정, 봉상시(奉常寺) 정 등을 지내고, 1588년(선조 21)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병 때문에 돌아왔다.[『심충겸신도비명』] 1589년(선조 22)에 호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얼마 뒤 병조 참지(參知)와 병조 참의를 지냈다.[『선조실록』선조 23년 12월 25일, 『심충겸신도비명』] 1590년(선조 23)에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억울하게 <기축옥사(己丑獄死)>에 연루된 사람을 씻어줄 것’을 청하다가 형조 참의로 체직되었다가 얼마 뒤 병조 참의로 옮겼다.[『선조수정실록』선조 23년 1월 1일] 1591년(선조 24)에 황해도에 안찰사(按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는 형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선조수정실록』선조 24년 7월 1일, 『심충겸신도비명』]

1592년(선조 25) 여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군사를 모아 지킬 계책을 올리고 병조 참판에 발탁되었으며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하였다. 선조가 피난할 때 호종하여 평양성에 이르러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선조 25년 5월 23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4월 14일] 왜군이 대동강에 접근하여 함경도로 피하던 중,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의 의견을 받아들여 의주(義州)로 가서 명(明)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자고 선조에게 진언하였다.[『선조실록』선조 25년 6월 10일, 선조 25년 6월 13일, 선조 34년 5월 3일, 『선조수정실록』선조 25년 6월 1일] 선조가 이를 받아들여 어가를 돌려 의주로 향하였으며, 심충겸은 선조의 명을 따라 세자를 따라 길을 나누어 성천(成川)으로 향하였다. 평양성을 수복한 이후 이조 참의와 병조 참의, 병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병사의 훈련과 군량 수급의 일을 맡아 보았다.[『선조실록』선조 26년 1월 24일, 선조 26년 2월 11일, 선조 26년 2월 17일, 선조 26년 5월 9일, 선조 26년 5월 12일] 1594년(선조 27)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사를 훈련하는 교사(敎師)에 관한 문제로 논란이 일어 곧 체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27년 6월 5일, 선조 27년 7월 19일, 선조 27년 7월 27일] 그 해 12월에 지병으로 병사하였는데, 당시 나이 50세였다. 심충겸의 죽음에 크게 슬퍼한 선조는 조정의 정사(政事)를 2일 동안 정지시키고 부조와 제사를 등급을 초월해서 하사하였다. 1604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한 공로를 인정받아 호성공신에 봉해졌다.[『선조실록』선조 37년 6월 25일]

성품과 일화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넓고 깊고 너그럽고 두터웠으며 기국(器局)이 높고 깨끗하며 생각이 깊어서 일을 당해서도 구애받지 않았다. 또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하나같이 성의로 대했고, 담박하고 고요해서 일에 한계를 두지 아니했으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영고(榮枯)와 잃고 얻는 데 관심이 없었다. 지조를 지킨 바가 매우 확고하여 큰 의론을 당했을 때도 오직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고 남의 뜻에 따라 흔들려 고치지 않았다.[『심충겸신도비명』]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심충겸은 선조를 호종하였는데, 평양성에 머물던 중 왜군이 계속 북진하여 더 이상 평양성에 머물 수 없게 되자, 평양성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논의 끝에 백성과 물자가 풍부한 함경도로 가기로 하고 출발하여 검산령(劍山嶺)에 도착하였다. 이 때 이항복이 의주로 가 명나라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하자, 심충겸이 “내가 평양에 있을 때 북쪽으로 행행할 계책을 힘써 주장하였는데 여러 차례 공의 말을 들으니 역시 매우 이치에 맞다.”고 하면서 선조에게 계청할 것을 권하였다. 이항복은 조정의 의론으로 함경도 행이 결정되었고 중전이 이미 출발하였는데 어찌하겠느냐고 하였으나, 심충겸은 “이는 큰 계책이니 말로만 할 것이 아니다.”하고, 대신들에게 나아가 설득하고 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선조에게 청대(請對)하였다. 선조가 청대의 이유를 묻자, “당초 성상께서 북쪽으로 행행하시도록 권하였는데, 이제 병조 판서이항복의 말을 들으니 역시 이치가 있어서 청대한 것이다.”하여, 이항복이 다시 한 번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하였다. 이 날 심충겸의 결단력 있는 행동으로 선조의 어가는 의주로 향할 수 있었다. 훗날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의 공훈을 논하면서, “명군이 오게 된 것은 의주에 갔었기 때문”인데, “심충겸이 계책을 결단하여 청대하지 않았더라면 대가(大駕)가 의주로 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하였다.[『선조실록』선조 34년 5월 3일]

병조 판서로 임명되었을 때에는 전력을 다해 직무를 수행하자 주변에서 심충겸에게 “예로부터 직접 당제의 정무를 맡았다가 화를 입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무엇 때문에 이같이 스스로 고생을 하십니까?” 하였다. 심충겸이 정색하며 대답하기를, “신하가 벼슬에 나아가 직임에 처한 바를 생각하여 위급함과 존망에 있어 의리상 기쁨과 걱정을 함께 해야 되거늘 어찌 그 밖의 것을 근심할 것인가?” 하였다. 젊을 때부터 몸에 병이 있었는데, 나랏일을 하면서 도리어 건강해져 사람들이 하늘이 충성에 감동한 때문이라고 하였다 한다.[『심충겸신도비명』] 그러나 결국 이 지병이 재발하여 1594년(선조 27)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일하는데 있어서 전력을 다하고 물러섬이 없었던 모습 외에 또 다른 심충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로, 이지함(李之菡)의 제자 서기(徐起)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기는 본디 심충겸이 하사받은 종이었는데, 심충겸은 서기가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한 것을 보고 종에서 면하여 놓아주고 부를 때에도 반드시 처사(處士)라고 불렀다 한다. 이를 두고 말하기를, “종이 어진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어진 것이 더욱 가상하다.”고 하였다.[『연려실기술』 권18 「선조조고사본말」]

한편 심충겸은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전해지며, 저서로 『사양당집(四養堂集)』이 있다.

묘소와 후손

그는 사망 다음해인 1595년(선조 28) 김포 통진(通津) 옹정리(瓮井里)의 선산에 안장되었고, 17년 후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가 사망하자 합장하였다. 현재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 산135-1번지에 있으며 양평군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글을 짓고 심열(沈悅)이 글을 썼다. 묘역의 남동쪽에는 심충겸을 제향하는 충익사(忠翼祠)가 세워져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대(李薱)의 딸로, 3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 심흔(沈忻)은 예문관(藝文館)대교(待敎)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둘째 아들 심열(沈悅)은 호조 판서를 지냈고, 자손이 없었던 심충겸의 셋째 형 심예겸(沈禮謙)의 양자가 되었다. 셋째 아들 심종(沈悰)은 함창현감(咸昌縣監)을 지내고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맏딸은 현감(縣監)조령(趙玲)과 혼인하고, 둘째 딸은 판관(判官)이면(李勉)과 혼인하였다.[『심충겸신도비명』]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사초(寄齋史草)』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심충겸신도비명(沈忠謙神道碑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송심씨 대종회 홈페이지 http://www.csshi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