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尹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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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7년(명종 22)∼1664년(현종 5) = 9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과 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미중(美中)이고, 호는 기천(岐川)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충좌위(忠佐衛)상호군(上護軍) 증 좌찬성(左贊成) 윤대로(尹大老)이고, 어머니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참의(參議)이원록(李元祿)의 딸이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89년(선조 2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설봉유고(雪峯遺稿)』 권29 「숭정대부판돈녕부사윤공시장(崇政大夫判敦寧府事尹公諡狀)」 이하 「윤경시장」으로 약칭] 1596년(선조 2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1600년(선조 33)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에 임명되었다가, 관례(慣例)에 따라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전임되었다.[「윤경시장」] 1601년(선조 34)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서, 이듬해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승진하였으며,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를 거쳐서, 1603년(선조 36)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형조 정랑이 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4년 12월 29일, 선조 35년 5월 6일, 선조 36년 5월 22일, 선조 36년 7월 6일]

1605년(선조 38)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월 24일] 그러나 그는 “평양부서윤윤경(尹絅)은 제멋대로 방자하게 횡포를 부리는 무리들이 남의 노비와 재물을 탈취하는 것을 보고서도 제대로 금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들의 말을 듣고 따름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더욱 깊게 하였으니 파직하소서.”하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체직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6월 17일] 1608년(선조 41) 모친상을 당하였다.[「윤경시장」] 이후 『선조실록』을 편찬할 때, 예조 정랑(正郞)이던 윤경도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참여하였다.[『선조실록』 부록]

1615년(광해군 7) 죽산부사(竹山府使)로 있을 때 도적 3명을 체포한 일로 가자(加資)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랐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7년 8월 17일] 죽산부사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백성들의 민원(民願)에 따라 1년 더 유임되었다.[「윤경시장」] 내직으로 들어와서 잇따라 분승지(分承旨)와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북파(大北派)인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鄭仁弘) 일파가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내고자 하면서 <계축옥사(癸丑獄死)>가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1613년(광해군 5) 6월 김제남은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도(江華道)에 유배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 봄에 살해되었으며, 인목대비는 폐모론(廢母論)이 제기되어 결국 1618년(광해군 10)에 폐위되었다. 당시 윤경은 끝내 폐모론(廢母論)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결국 이 일에 연좌되어 파면되면서 양근(楊根 : 지금의 경기도 양평(楊平))의 농막(農幕)에 은거하였다. 그러다가 1621년(광해군 13) 명나라 제독(提督)모문룡(毛文龍)접반사(接伴使)로서 가도(椵島)에 갔다.[「윤경시장」]

인조~현종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년 7월 17일, 「윤경시장」]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해주(海州)의 병사(兵士)를 이끌고 관찰사를 따라 종군하였다.[「윤경시장」]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전주로 피란하였다.[「윤경시장」] 그해 11월 다시 모문룡의 문안사(問安使)가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5년 11월 9일, 인조 5년 11월 11일] 1629년(인조 7) 외방으로 나아가서 여산군수(礪山郡守)를 지냈고, 1631년(인조 9) 해임되어 돌아와 잇따라 중추부(中樞府)의 산반(散班)에 있었다.[「윤경시장」] 1635년(인조 13) 장례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3년 3월 24일, 「윤경시장」]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전쟁으로 사태가 위급해지자, 모든 관사(官司)의 관원은 당황하여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한산성 전투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병졸(兵卒) 중에서 노예의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 면천(免賤)시켜 주라는 명을 받고, 인신(印信)과 장부(帳簿)를 가지고 들어가 첩(帖)을 만들어 나누어주었다.[「윤경시장」] 1637년(인조 15) 전쟁이 끝난 후 병조 참의에 임명되었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다. 이어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거쳐서, 이천부사(利川府使)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638년(인조 16) 파면되어 해서(海西)의 촌사(村舍)로 돌아왔다.[「윤경시장」]

1645년(인조 23) 공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1646년(인조 24) 80세의 나이로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으며,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4년 7월 8일, 「윤경시장」] 1649년(인조 27)은 그가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한지, 60년이 되는 해였다. 당시 『방목』에 실려 있던 2백 명 가운데에서 단지 윤형과 심액(沈詻)만이 살아있었는데, 같은 해에 합격한 동방(同榜)의 자제들이 그들을 위하여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윤경시장」]

1649년(효종 즉위년)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듬해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10월 13일] 이어 1651년(효종 2)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특전에 의해서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진하였다.[「윤경시장」] 1656년(효종 7) 90세의 나이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하였고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7년 11월 19일] 그리고 1657년(효종 8) 돈녕부 지사가 되었으며, 1658년(효종 9)에는 중추부 판사(判事)가 되었다.[『효종실록』효종 9년 1월 1일, 「윤경시장」] 그해 기로소에 오로회(五老會)가 있었는데, 92세의 나이로 참여하였다.[『미수기언(眉叟記言)』 권40] 1660년(현종 원년) 돈녕부 판사가 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년 4월 5일, 「윤경시장」] 1664년(현종 5) 5월 5일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98세였다.[『현종실록』현종 5년 5월 11일] 이후 1676년(숙종 2) ‘정희(靖僖)’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년 10월 4일]

성품과 일화

자질과 기품이 순후(醇厚)하였으며, 기량이 크고 원대하였다,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정성을 다하였으며, 한계를 설정하지 않았고, 일하는데 있어서는 결심이 견고하고 확실하여 결단코 흔들리거나 바뀌지 않았다. 선조~현종까지 네 사람의 왕을 섬겨서 벼슬을 한 지가 거의 70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집에는 적은 양의 곡식도 없었고 초가집은 바람과 비를 막지 못하였으나 그런 곳에 거처하면서도 여유가 있었다.[「윤경시장」] 그리하여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집이 가난하여 장례를 치를 수가 없다고 조정의 신하가 얘기하자 현종이 장례 물품을 넉넉히 내려주라고 할 정도였다.[『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5년 5월 11일] 그 성격은 화려하고 사치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남과 교유하는 것을 일삼지 않았으며, 오로지 타고난 그대로 꾸밈없이 평안하고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을 숭상하였다.[「윤경시장」]

선조(先祖)의 제사(祭祀)를 받들 때에는 정성과 예절을 다하였는데, 돌아간 부모님의 제삿날을 만나면 지극히 비통해 하였다. 나이가 90세가 넘도록 제사는 반드시 몸소 지내고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선대(先代)를 제사지내는 일도 또한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죽기 전에는 반드시 내가 몸소 스스로 정성을 다하고자 한다.” 하였다. 항상 서쪽 교외에 숨어살면서 꽃과 나무를 많이 심고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신고 소요하였다. 언제나 좋은 때를 만나면 여러 노인들을 불러서 술을 마시고 시가(詩歌)를 읊으면서 소일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윤경시장」]

연령과 작위가 더욱 높아지게 되자, 거공 명류(鉅公名流)들이 크게 흠모하여, 다투어서 그를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는데, 그는 당(堂)에서 내려와서 그들을 맞이하면서, 옷깃을 바로잡고 무릎을 꿇고 꼿꼿이 하고 앉아서 대하고 조금도 태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바로 근력(筋力)이 건강해서 만이 아니었으니, 그의 평생의 절조(節操)를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윤경시장」]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희(靖僖)이다. 묘소는 경기도 적성현(積城縣) 송현(松峴) 장평(長坪)에 있고, 강백년(姜栢年)이 지은 시장(諡狀)이 남아 있다.[「윤경시장」]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효원(李孝元)의 딸인데,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은 윤정득(尹正得)이고, 차남은 윤명득(尹命得)이며, 3남은 윤신득(尹信得)이고, 4남은 윤지득(尹志得)이며, 5남은 윤선득(尹善得)이다. 장녀는 사인(士人) 신희순(辛喜循)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홍우관(洪宇寬)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현감(縣監)이진(李晉)의 처가 되었다.[「윤경시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서석집(瑞石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