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손(柳義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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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98년(태조 7)~1450년(문종 즉위년) = 53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문종(文宗) 때의 문신. 도승지(都承旨), 공조 참판(參判),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효숙(孝叔)이고, 호는 회헌(檜軒) 혹은 농암(聾巖)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거주지는 전주와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 및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유빈(柳濱)이고, 어머니 덕산 윤씨(德山尹氏)는 윤방익(尹邦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보문각(寶文閣) 직제학과 지제교(知製敎)를 역임한 유극서(柳克恕)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및 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 등을 지낸 유습(柳濕)이다. 세종 때에 승정원에서 주로 활동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각종 서적의 서문을 많이 작성하였다.

세종~문종 시대 활동

1426년(세종 8) 식년시 동진사(同進士)에 합격하였고, 1436년(세종 18)에 중시(重試) 을과에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430년(세종 12) 집현전(集賢殿) 직제학으로서 저작랑(著作郞)김서진(金瑞陳)과 함께 『춘정집(春亭集)』을 교정했다. 1433년(세종 15) 집현전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임금의 명으로 지리를 연구하는 학관(學官)이 되었고, 예문관(藝文館)응교(應敎)로서 왕명을 받아 술을 경계하는 「계주문(誡酒文)」을 작성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7일),(『세종실록』 15년 10월 28일) 이듬해에는 김말(金末)·이중윤(李中允)·이사증(李師曾)·이계전(李季甸)·최항(崔恒)·남계영(南季瑛)·어효첨(魚孝瞻)·강맹경(姜孟卿)·민원(閔媛) 등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교정하였으며,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의 찬집관(撰集官)으로 활동하기도 했다.(『세종실록』 16년 6월 26일),(『세종실록』 17년 6월 8일) 그밖에도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자치통감』의 서문을 작성하였고, 일본에서 바친 지도에 지문을 쓰거나 시호를 수집한 글의 서문을 작성하였다.(『세종실록』 18년 7월 29일),(『세종실록』 20년 2월 19일),(『세종실록』 20년 6월 17일)

이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 승정원 우승지(右承旨),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공조 참판, 이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세종실록』 25년 2월 21일),(『세종실록』 25년 6월 22일),(『세종실록』 25년 9월 3일),(『세종실록』 27년 6월 15일),(『세종실록』 28년 4월 25일),(『세종실록』 28년 12월 2일) 1446년(세종 28)에 자신의 무능과 건강상의 문제, 그리고 노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려 했으나 윤허 받지 못했다.(『세종실록』 28년 2월 12일) 이듬해인 1447년(세종 29) 당시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김유양(金有讓)의 아들 김사창(金嗣昌)의 인사 청탁을 이조에서 제대로 걸러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금부(義禁府)에서 국문을 받고 죄를 실토하여 직첩을 빼앗겼으나,(『세종실록』 29년 4월 21일)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예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9년 10월 4일) 1450년(문종 즉위년)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9일)

성품과 일화

유의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당시 집현전에 있던 권채(權採), 신석조(辛碩祖), 남수문(南秀文)과 더불어 문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했다.[『필원잡기(筆苑雜記)』] 그리하여 남수문, 권채와 더불어 “집현전 3선생”으로도 불렸다고 한다.[「회헌선생유사(檜軒先生遺事)」] 성품은 부드럽고 겸손하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직제학(直提學) 겸 첨사원(詹事院) 첨사(詹事)로 임명되었을 때에 선배에 해당하는 이선제(李先齊) 보다 벼슬이 위에 있게 된다는 것을 이유로 선후의 구분을 위해 자신의 벼슬을 고쳐 임명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세종실록』 24년 10월 23일) 그러면서도 임금에게 간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세종이 내전(內傳)의 소식을 승지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밖에만 승지가 본 것처럼 쓰게 하려 하자, 적어도 승정원 도승지만은 내용을 파악해야한다고 직언하였다.(『세종실록』 25년 8월 6일) 또 임금이 『대장경(大藏經)』에 의술에 대한 부분이 있다고 직접 보려고 하자, 불교의 경전을 숭상하고 믿는다는 의심을 살 수가 있으니 직접 볼 것이 아니라 의원이 읽은 후 보고하게 하라고 간언하기도 했다.(『세종실록』 26년 5월 13일)

인사 문제로 잠시 파직 당했을 때에 사람들이 시사(時事)나 세도(世道)를 물으면 껄껄 웃으며 고침(高枕)하고 누웠을 뿐 남들과 더불어 답문이나 수작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소와정선생”이라고 하였다. 그의 작품 「소와정(笑臥亭)」도 이때에 작성된 것이다. 그의 졸기에도 성품이 순후(醇厚)하고 근신하여 다른 마음이 없었다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업무면에서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잘못된 일을 보고도 언급을 하지 않아 사람들이 장자(長者)라 불렀다 한다. 또 친상을 당했을 때 최복(衰服)을 입고 노루의 간을 먹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9일)

제향과 후손

안동시 임동면(臨東面) 수곡리(水谷里)의 기양서당(岐陽書堂)에서 유복기(柳復起)와 함께 제향을 받는다.

첫째 부인 하음 봉씨(河陰奉氏)는 봉원량(奉元良)의 딸로 1남 유충해(柳忠諧)를 두었으나 요절하였고, 두 번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수미(尹須彌)의 딸로 후손을 보지 못하였다. 뒤에 막내 동생인 유말손(柳末孫)의 셋째 아들인 유계동(柳季潼)을 양자로 들였다. 유계동은 충무위(忠武衛)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춘정집(春亭集)』
  • 『필원잡기(筆苑雜記)』
  • 「회헌선생유사(檜軒先生遺事)」
  • 「류의손 형제 화회문기(柳義孫兄弟和會文記)」
  • 이형성, 「조선전기 전주지역 向義的 歷史意識 啓導와 節義精神 一攷 - 檜軒 柳義孫과 遺逸齊 柳坋을 중심으로」, 『한국사상과 문화』58,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