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수문(南秀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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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8년(태종 8)~1442년(세종 24) = 35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수찬(副修撰) 및 집현전 응교(應敎), 집현전 직제학(直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경질(景質) 혹은 경소(景素)이고, 호는 경재(敬齋)이다.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남금(南琴)이고, 어머니 지곡 이씨(池谷李氏)는 부령(副令)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안부(恭安府) 윤(尹)남기(南奇)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남영(南永)이다. 과거 급제 이후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았으며, 『자치통감훈의(資治通鑑訓義)』와 같은 사서(史書) 편찬에 참여했다.

세종 시대 활동

1426년(세종 8)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과장(科場)에서의 부정이 발각되어 어변미(魚變尾) 등과 함께 2등이 감해지는 조치를 당했다.(『세종실록』 8년 4월 11일),(『세종실록』 8년 6월 16일)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후 학문과 식견을 인정받아 1428년(세종 10) 신석견(辛石堅)과 함께 조용한 곳에 머물며 독서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특전을 받았다.(『세종실록』 10년 3월 28일) 이후 김말(金末)과 함께 여러 대군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며,(『세종실록』 15년 6월 9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내용에 주해를 다는 『자치통감훈의』의 찬집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17년 6월 8일) 이어 1436년(세종 18) 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그리고 이듬해인 1437년(세종 19) 왕명을 받아 송대계(宋戴溪)가 지은 병서인 『장감박의(將鑑博議)』 와 당(唐)나라 문장가인 한유(韓愈) 및 유종원(柳宗元)의 글에 주석을 달아 찬집(撰集)한 책의 발문(跋文)을 짓는 등 학문과 찬술에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였다.(『세종실록』 19년 7월 19일),(『세종실록』 20년 11월 30일) 또한 1442년(세종 24)에는 세종이 『고려사(高麗史)』 개찬을 위한 자료 조사를 지시하였는데, 이때 남수문은 안지(安止)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4년 3월 2일)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어, 세종의 능으로 삼기 위하여 미리 마련해 둔 수릉(壽陵)의 길흉을 논의할 때 박연(朴堧), 정창손(鄭昌孫), 조서강(趙瑞康), 강석덕(姜碩德)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세종실록』 25년 1월 24일),(『세종실록』 25년 1월 26일) 이후 남수문은 집현전에서 숙직하던 중에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사림(士林)이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겼으며, 세종은 특별히 관곽(棺槨)을 비롯해 쌀, 콩, 종이 등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25년 4월 29일)

한편 남수문이 세상을 떠난 후, 『고려사』 개찬 당시 함께 참여한 권제(權制)와 안지(安止)가 『고려사』를 제 뜻대로 보태고 깎았다고 하여 고신(告身)을 박탈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남수문 또한 이 일을 알면서도 방관했다고 하여 사후에 고신을 박탈당하였다가, 1453년(단종 1) 아들 남형(南亨)의 청에 의해 고신을 돌려받았다.(『세종실록』 31년 2월 22일),(『세종실록』 31년 2월 25일),(『단종실록』 1년 12월 28일)

성품과 일화

남수문은 학문과 문장에는 뛰어났으나,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동류들로부터 꺼림을 받았다고 전한다. 과거 시험 부정 사건에 연관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사』의 개찬 과정에서 사견이 많이 들어간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사관(史官)은 남수문에 대해 “널리 경사(經史)에 통하고 글에 고기(古氣)가 있었다. 처음에 사마 천(司馬遷)을 모방하여 역사를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중론(衆論)의 억제하는 바가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권제가 편찬한 『고려사』에 남수문의 글이 많았으나, 성품이 좁고 꼿꼿하여 역사 편찬하는 일을 스스로 오로지 함이 많으니, 동류들이 마음으로 꺼리고, 안지도 남수문의 오로지함을 미워하여 일찍이 좌중에서 꾸짖고 욕하였다”고 평하였다.(『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한편 남수문은 윤회(尹淮)와 더불어 술을 매우 좋아하였는데, 세종이 그들의 재주를 사랑하여 술을 마셔도 석 잔 이상 마시지 말 것을 명하였더니, 그 뒤로부터 연회에서 술을 마실 때면 둘은 꼭 커다란 그릇으로 석 잔을 마셨다. 말은 비록 석 잔이라 하였으나, 실은 다른 사람보다 배나 되었다고 한다. 이를 듣고 임금이 듣고 웃으면서 이르기를, “내가 술 많이 마시지 말라고 경계한 것이 도리어 더 마시기를 권한 것이 되었구나.”라고 하였다.[『필원잡기(筆苑雜記)』]

후손

부인은 하음 이씨(河陰李氏)이한검(李漢儉)의 딸과 안동 김씨(安東金氏)김식(金湜)의 딸이 있는데, 각각 1남을 두었다. 1남 남형은 하음 이씨의 아들로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남수문의 사후에 그의 고신을 되돌려줄 것을 청했다. 2남 남유기(南有箕)는 안동 김씨의 아들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 『경재유고(敬齋遺稿)』
  • 『만가보(萬家譜)』
  • 『동문선(東文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필원잡기(筆苑雜記)』
  • 『사마방목(司馬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