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효첨(魚孝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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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05년(태종 5)~1475년(성종 6) = 71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성종(成宗)때의 문신. 이조 판서(判書)와 중추부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만종(萬從)이고, 호는 구천(龜川)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집현전(集賢殿)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어변갑(魚變甲)이며,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두문동 72현 가운데 한 명인 성사제(成思齊)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대구현령(大邱縣令)을 지낸 어연(魚淵)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전객시(典客寺) 전객령(典客令)을 지낸 어백유(魚伯遊)이다.

세종~단종 시대의 활동

1423년(세종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7년(세종 9) 춘추관(春秋館)지사(知事)를 지냈다.[『방목(榜目)』],(『세종실록(世宗實錄)』 9년 9월 29일) 1429년(세종 11)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듬해인 1430년(세종 12)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선임되었다.[『방목』],(『세종실록』 12년 8월 10일)

1434년(세종 16)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사경(左司經)어효첨(魚孝瞻)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集賢殿)수찬(修撰)이계전(李季甸) 및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최항(崔恒) 등과 함께 『자치통감(自治通鑑)』을 고열한 『자치통감훈의(自治通鑑訓義)』를 참교(參校)하였다.(『세종실록』 16년 6월 26일) 이듬해인 1435년(세종 17)에는 어효첨이 호삼성(胡三省)의 음주본(音註本) 『자치통감』의 일부를 구하여 바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7년 3월 22일) 이후 집현전 교리(校理)로서 어효첨은 세자와 함께 세종의 수릉(壽陵 : 임금이 미리 준비해 두는 자신의 무덤) 선정에 관여하였으나, 이선로(李善老) 등이 풍수설을 이용하여 여러 공사를 건의하자 주자(朱子) 등의 말을 인용하여 지리에 따라 화복(禍福)이 좌우된 것은 옳지 않다며 풍수설을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세종실록』 26년 6월 27일),[『세종실록』 7월 17일 3번째기사],[『세종실록』 윤7월 15일 2번째기사],(『세종실록』 26년 12월 21일)

이후 집현전 응교(應敎)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좌필선(左弼善) 등을 역임하였는데, 1446년(세종 28) 10월에는 집현전 응교로서 『고려사(高麗史)』에 유루된 부분이 많으므로 교정이 필요하다는 세종의 명에 따라 『고려사』 수정 작업을 실시하였다.(『세종실록』 28년 6월 18일),(『세종실록』 28년 10월 5일),(『세종실록』 28년 10월 11일) 이어 그해 11월에는 『태조실록(太祖實錄)』을 보기 원하는 세종을 위하여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으로서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태조실록』을 초록하여 바쳤다.(『세종실록』 28년 11월 8일) 그리고 1449년(세종 31) 『고려사』 개찬에 관하여 논의할 때 그는 김계희(金係熙) 등과 함께 그 체재를 기전체(紀傳體)로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세종실록』 31년 2월 5일)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단종(端宗)이 즉위한 후인 1453년(단종 1)에는 내자시(內資寺)판사(判事)에 임명되었다.(『문종실록(文宗實錄)』 즉위년 5월 13일),(『단종실록(端宗實錄)』 1년 1월 19일) 얼마 후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하였고, 그 직후 예조 참의(參議)가 되어 단종이 왕비를 들인 후에는 상복을 벗고 길복을 입어야 한다는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의 주장에 선왕(先王)의 명 없이 단상(短喪)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적극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단종실록』 1년 11월 8일),(『단종실록』 2년 1월 21일),(『단종실록』 2년 1월 23일) 이후 1454년(단종 2) 6월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단종실록』 2년 6월 27일)

세조~성종 시대의 활동

1455년(세조 1)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어효첨은 이조 참의로서 세조를 보좌하였으며, 그해 12월 세조 즉위에 공이 있다 하여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세조실록(世祖實錄) 1년 8월 9일 2번째기사』],(『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듬해인 1456년(세조 2)에는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삼문(成三問) 등이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 <사육신(死六臣) 사건>이 발생하자 이조 참판으로서 이들을 국문하는데 참여하였다.(『세조실록』 2년 2월 19일),(『세조실록』 2년 6월 2일) 이어 호조 참판이 된 어효첨은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 등과 함께 사육신 사건을 예로 들며 단종과 세조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있으니 단종을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요구하였으나 세조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세조실록』 2년 12월 9일)

이후 어효첨은 공조 참판과 형조 참판, 호조 참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한성부윤(漢城府尹) 등을 역임하였다.(『세조실록』 4년 2월 16일),(『세조실록』 4년 윤2월 19일),(『세조실록』 4년 3월 19일),(『세조실록』 4년 6월 28일),(『세조실록』 4년 7월 14일),(『세조실록』 4년 10월 12일) 그런 가운데 1461년(세조 7)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1463년(세조 9)에는 세조로부터 도를 즐길 줄 아는 군자라는 평가를 받으며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도곡집(陶谷集)』 권10 「판중추문효어공신도비명(判中樞文孝魚公神道碑銘)」 이하 「어효첨비명」],(『세조실록』 9년 3월 10일),(『세조실록』 9년 8월 29일) 이어 1464년(세조 10)에는 중추원 지사(知事)가 되었고, 1468년(세조 14) 8월에는 품계를 더하여 숭정대부(崇政大夫)가 되었다.(『세조실록』 10년 7월 23일),(『세조실록』 14년 8월 13일)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睿宗)이 왕위에 오르자, 어효첨은 1469년(예종 1) 중추부 동지사로서 명(明)나라 사신의 관반사(館伴使)를 임무를 수행하였다.(『예종실록(睿宗實錄)』 1년 1월 5일) 그리고 같은 해에 예종이 세상을 떠나고 성종(成宗)이 왕위를 이은 후, 어효첨은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성종실록(成宗實錄)』 1년 9월 19일) 이어 행(行) 중추부 지사와 행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고, 1474년(성종 5)에는 봉조하(奉朝賀)를 제수 받아 숭정대부 중추부 판사 봉조하가 되었다.(『성종실록』 2년 3월 12일),(『성종실록』 2년 9월 12일),(『성종실록』 5년 2월 10일) 그리고 1년여 뒤인 1475년(성종 6) 1월 세상을 떠났으니, 당시 나이 71세였다. 그리고 경직(敬直)하고 자혜로운 것을 ‘문(文)’이라 하고, 덕을 지니고 간사하지 않은 것을 ‘효(孝)’라 하여 ‘문효’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

한편 어효첨은 성리학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어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문종에게 『예기(禮記)』를 강하면서 이와 관련된 여러 학자들의 학설들을 정리하여 주석을 단 『예기일초(禮記日抄)』를 저술하였는데, 문종이 이를 홍문관(弘文館)에 보관하게 하였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4 「문종조고사본말(文宗朝故事本末)」] 그가 세상을 떠난지 35년 만인 1510년(중종 5)에는 윤금손(尹金孫)이 외가인 함종 어씨(咸從魚氏)의 시문집 『함종세고(咸從世稿)』를 간행하였는데, 여기에는 어변갑과 어효첨, 어세겸(魚世謙) 3대의 시문이 실려 있다.[『삼탄집(三灘集)』「삼탄집발(三灘集跋)」]

성품과 일화

어효첨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기상(氣像)과 도량(度量)이 단정(端正)하고 엄숙하여 엄연(儼然)한 모습이 어른과 같았다.[「어효첨비명」] 성품이 순박하여 번화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성색(聲色)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기어 효도하였다. 관직에 임하면 부지런하고 삼가하여 이단(異端)에 미혹되지 않았으며, 모든 음양(陰陽)풍수(風水)·신불(神佛)·사벽(邪僻)하는 일은 일찍이 힘써 물리쳤다.(『성종실록』 6년 1월 3일)

한편 세조는 연회를 베풀 때면 어효첨에게 춤을 추도록 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술에 취한 뒤에는 어깨가 높이 솟아오른다고 하여 이인로(李仁老)의 시 가운데 “배에 기댄 어부(漁夫)의 한쪽 어깨가 높다.[倚船漁父一肩高]”는 구절을 본 따 어부(漁父)라고 부르곤 하였다.(『세조실록』 5년 3월 14일),(『세조실록』 9년 3월 10일),(『세조실록』 13년 8월 1일) 1462년(세조 8)에는 세조가 베푼 연회에서 어효첨이 술을 많이 마셔 인사불성이 되어 기생과 함께 춤을 춘 일이 있었다. 어효첨은 임금의 명이 없었는데, 자리에서 일어나 기생과 춤을 춘 것은 예를 벗어난 행동이었다며 대죄(待罪)를 청하였다. 그러자 세조기 “나는 오히려 즐거워 웃었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모름지기 다시 나오도록 하라.”는 답변을 보냈다는 일화도 전한다.(『세조실록』 8년 12월 13일)

또한 어효첨이 사헌부에 있을 때의 이야기도 남아 있는데, 당시 서울 안의 관청들은 지전(紙錢)을 걸어 둔 조그만 사당을 짓고 부군당(府君堂)이라 부르며 관원들은 여기에 모여 제사를 지냈다. 사헌부도 마찬가지였는데, 어효첨이 사헌부 집의가 된 후 “부군당이란 어떻게 되어 먹은 물건이냐.”고 하면서, 지전을 철거하고 사당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제사를 완전히 근절시키고 말하기를, “어찌 사헌부에 음란한 제사와 이름 없는 귀신이 있을 것인가.” 하였다. 이후부터는 역임했던 관청마다 이것을 다 불살라 버렸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4 「문종조고사본말」],[『용재총화(慵齋叢話)』 권9]

묘소와 후손

원래 묘소는 서울시 고덕동에 있었으나, 도시 개발로 인하여 1982년 경기도 여주시 가남읍 금당리에 있는 함종 어씨 세장지로 이장하였다. 어효첨이 세상을 떠나고 259년 후인 1734년(영조 10)에 신도비를 조성하였는데, 신도비명은 이의현(李宜顯)이 작성하였고, 글씨는 그의 10대손 어유봉(魚有鳳)이 썼다.

부인 반남 박씨(潘南朴氏)는 좌의정을 지낸 평도공(平度公)박은(朴訔)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두었다. 1남은 좌의정어세겸이고, 2남은 호조 판서어세공(魚世恭)이다. 1녀는 첨지(僉知)유숙(柳塾)의 처이며, 2녀는 부승(府丞)윤지강(尹之崗)의 처이다. 또한 5대손 돈녕부(敦寧府) 영사(領事)어유귀(魚有龜)의 딸이 경종(景宗)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 『견한잡록(遣閑雜錄) 』
  • 『도곡집(陶谷集)』
  • 『동문선(東文選)』
  • 『삼탄집(三灘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총화(慵齋叢話)』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 『해동잡록(海東雜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