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風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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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의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줄임말.

개설

한국,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에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입지 선정과 공간 배치 이론으로서 형성되어온 것이 풍수지리이다. 따라서 풍수지리의 역사나 그 내용의 전개가 너무 다양하여 어느 한 가지 이론으로 통일시키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와 조선에서 지리업(地理業)과 지리학(地理學)을 규정하여 일관(日官)과 지관(地官)이란 풍수 전문 관리를 두었을 정도이다.

내용 및 특징

풍수라는 용어가 최초로 언급된 풍수 고전은 『청오경(靑烏經)』이다. 『청오경』에서는 음양이 부합하면 천지의 기가 서로 통하여 내기는 생명을 싹틔워 자라게 하고 외기는 사물의 형상을 이루게 하니, 내기와 외기가 상승하면 풍수는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하여 풍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를 좀 더 구체화시킨 풍수 문헌이면서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으로 채택된 것이 『장서(葬書)』이다. 『장서』에서는 풍수 용어와 그 개념에 대해서 옛사람들은 땅속에 모여 있는 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하고[藏風], 물을 만나서 멈추도록 했다[得水]. 그러므로 이를 풍수라고 하는 것이다. 풍수를 운용하는 법은 제대로 된 물을 얻는 것이[得水] 우선이고, 바람을 타지 않게 하는 것[藏風]이 그다음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수많은 풍수 서적이나 풍수 이론은 대체로 『청오경』과 『장서』의 위와 같은 풍수 개념을 전제로 하여 각자 그 이론들을 부연하거나 변형시켜 왔다.

풍수라는 말은 태조대부터 고종대까지 지금의 풍수지리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풍수라는 용어가 『조선왕조실록』에서 최초로 보이는 시기는 태조 때이다. 1393년(태조 2) 권중화(權仲和)가 새 도읍의 종묘와 사직, 궁전, 조시를 만들 형세도(形勢圖)를 바쳤고, 서운관과 풍수학인 이양달(李陽達), 배상충(裵尙忠) 등에게 명하여 지면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고, 김사행(金師幸)에게 먹줄로 땅을 측량하게 하였다는 기사에는 풍수지리를 근간으로 형세를 파악하고 그림을 그리며, 다시 지면의 형세를 살피고, 땅을 측량하는 과정이 비교적 소상하다(『태조실록』 2년 2월 10일).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건국 초기부터 풍수지리를 일정한 과정에 따라 실행하였고, 사회적으로 유행하기도 하여 그 폐단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또 같은 해에 하윤(河崙)의 풍수 진언에 따라 계룡산의 신도 건설이 중지되었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1406년(태종 6)에는 하윤의 건의로 음양풍수학이 십학의 하나로 설치되었으며(『태종실록』 6년 11월 15일), 1423년(세종 6)에는 풍수학 시험에서 수석 합격자는 서운관의 관직을 제수받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11월 15일).

1430년(세종 12)에는 풍수지리사에서 유명한 헌릉(獻陵) 단맥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최양선(崔揚善)이 헌릉의 산맥을 배양하는 일에 대해서 올린 글로 촉발되었다. 그는 풍수라는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이 끊어지지 않는 것인데, 헌릉 뒤 맥이 보호되지 않음은 마치 맥이 끊긴 단맥과 같으니 헌릉주산(主山)봉요(蜂腰)와 같은 곳이야말로 시급히 서둘러 보호해야 마땅함을 주장하였다(『세종실록』 12년 7월 7일).

1431년(세종 13)에는 무덤을 함부로 쓰는 사회적 폐단이 날로 심해지고 오히려 능력 있는 풍수지리가는 적은 상황에서 풍수지리서를 다양하게 간행하여 풍수학 관료들에게 연구하게 해야 한다는 고중안(高仲安)의 상서가 있을 정도로 풍수지리는 극성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세종실록』 13년 1월 12일). 문종대에는 풍수학의 진언에 따라 왕세자의 태실도 옮겼고[『문종실록』즉위 9월 8일 4번째기사], 철종대에는 풍수지리 내용을 바탕으로 능침의 자리를 논의하고 있다(『철종실록』 7년 2월 26일). 철종의 묘지문에는 인릉(仁陵), 수릉(壽陵), 휘경원(徽慶園)이 풍수지리적 내용에 잘 맞지 않는 것을 우려하여 다시 천장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풍수는 조선의 전 시대에 걸쳐 사회적으로 유행했던 용어였다. 고종 또한 풍수를 직접 언급하면서 송나라 때도 풍수는 논의되었고, 주자(朱子)도 지리를 강조했으니 풍수의 술법을 전혀 믿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견해를 피력할 만큼(『고종실록』 34년 11월 7일), 풍수지리는 조선의 전 시대를 풍미하였다.

풍수지리 이론 형성에 차용된 범주들은 기(氣), 천지인의 상응, 음양, 오행, 팔괘, 구성법(九星法), 포태법(胞胎法), 24방위론 등이다. 풍수지리 서적이나 풍수지리 유파에 따라 이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활용하기도 한다. 풍수지리 유파 가운데 산 형세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형세파에서는 산세 자체와 생기를 중시하고, 좌향을 중시하는 풍수지리 유파인 이기파에서는 음양의 기의 상호간의 역할을 중시하여 위의 대다수 범주를 수용하며, 날을 위주로 보는 선택론도 비슷한 상황이다.

간룡법(看龍法)은 내룡을 살피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장풍법은 혈을 감싸는 사방의 산들의 좋고 나쁨을 논하는 법이다. 정혈법(正穴法)은 최종적으로 집이나 무덤이 자리할 곳을 정하는 것이며, 득수법(得水法)은 물의 오고 가는 방향이나 그 흐름세를 살피는 것이다. 좌향론(坐向論)은 방위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산과 물의 오고가는 방향에 따라 그 길흉이 달라진다고 보기도 한다. 형국론은 물형론 혹은 갈형론(喝形論)이라고도 한다. 만물은 각각 독특한 기가 있으며, 이러한 독특한 기는 주로 산세의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그 형상을 물형 혹은 형국이라 부른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자리의 기가 어떤 것이며 그에 상응하여 어떠한 인물이 나올 것이냐는 그 혈(穴)과 주변 형국(물형)을 살피면 된다는 이론이다. 선택론은 음택과 양택을 조성하거나 이장, 수리 등을 할 때 길한 연월일시를 고르는 것으로서 택일, 택길, 장택론 등으로도 불린다. 비보진압 이론은 입지를 정하고 난 뒤 그 자리에 자연적 결함이 있을 때 이를 인공적으로 보완하는 것에 관한 이론이다.

변천

풍수지리 이론은 역사적, 사회적 개념이다. 그 시대에 따라 풍수지리 이론은 그 기능과 역할이 변용(變容)해 나간다. 지금부터 삼천 년 전에는 상지와 상택으로 기능했고, 고려시대 풍수지리는 국교가 불교였던 만큼 불교 풍수적 색채가 강했다. 예를 들면 길지를 활용하기도 했고, 호국을 위해 멀리까지 잘 보이는 곳을 물색해서 사찰의 입지를 선정하기도 했다. 유교 사회였던 조선시대에는 조상을 잘 모시는 풍수지리, 즉 음택 풍수지리가 전 시대에 걸쳐 주로 논의되는 특징이 있다.

참고문헌

  • 『관자(管子)』
  • 『산릉의장(山陵議狀)』
  • 『장설(葬說)』
  • 『황제내경(黃帝內經)』
  • 『황제택경(黃帝宅經)』
  • 김두규, 『우리 풍수 이야기』, 북하우스, 2003.
  • 김두규, 『풍수학 사전』, 비봉출판사, 2005.
  • 김혜정, 『중국 고전의 풍수지리 사상』, (주)한국학술정보, 2008.
  • 서선계·서선술 저, 김동규 역, 『인자수지』, 불교출판사, 1989.
  • 채성우 저·김두규 역해, 『명산론』, 비봉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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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창조 역주,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1993.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호순신 저·김두규 역해, 『지리신법』, 비봉출판사, 2004.
  • 김기현, 「유교의 상제례에 내재된 삶과 죽음의식」, 『퇴계학논집』104,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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