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세도(形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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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의 산릉이나 관방(關防)을 위해 축조된 산성 및 진보 등의 형세를 그린 지형도.

개설

조선시대 형세도(形勢圖)는 대개 산릉과 축성 등 왕실 관련 건축이나 관방과 관련하여 주변 지형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 형세도는 조정에서 이와 관련된 중대한 논의를 위한 1차 예람용이 제작되어 진상되었고, 이 중 일부는 비변사 등에서 이를 토대로 다시 제작하여 관방의 목적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형세도는 왕실 및 관방과 관련하여 지역의 형지를 그려 현장의 상황을 국왕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이를 조정 대신들과 의론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준비한 자료이거나 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조선시대 주요 사적에 대한 당대의 기록화로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내용 및 특징

1. 태실 및 산릉 형세도

조선시대 태실이나 산릉의 터를 정하거나 봉심을 통해 보수가 필요할 때 형세도를 제작하여 국왕에게 보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1393년(태조 2)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 권중화가 전라도 진동현(珍同縣)에서 길지(吉地)를 살펴 산수형세도(山水形勢圖)를 바친 것과(『태조실록』 2년 1월 2일), 1495년(연산군 1)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이세좌가 산릉의 형세를 그려서 보고하였다(『연산군일기』 1년 1월 26일). 1545년(명종 즉위) 우의정이기, 예조 판서윤개, 도승지최연 등이 산릉에 다녀와서는 산릉의 형세를 도식(圖式)으로 그려 올린 사례가 있다(『명종실록』 즉위년 9월 26일)

또한 1645년(인조 23) 관상감 제조김육과 예조 참의이덕수가 여러 술관(術官)들과 함께 건원릉·광릉 및 희릉·효릉을 가서 봉심하고 들어와 희릉과 효릉 두 능 사이에 묘를 쓰기에 적당한 곳이 있음을 아뢰며 산의 형세를 그림으로 그려 올렸다(『인조실록』 23년 5월 5일). 1661년(현종 2)에도 영의정 정태화, 선공감(繕工監) 제조 허적, 관상감 제조 이정영, 예조 참의 이진이 영릉을 살피고는 형세를 그려서 올렸다(『현종실록』 2년 2월 9일). 한편, 정조는 1782년(정조 6) 전주 건지봉의 훼손을 막기 위해 전라도관찰사에게 건지산(乾止山)·곤지산(坤止山)과 성 안의 형세를 그려 올리도록 지시한 사례도 있다(『정조실록』 6년 8월 4일).

2. 왕실 건축 관련 형세도

주요 건축물의 건축 전후와 중건 후에 형세도가 제작되어 국왕에게 보고한 사례가 여러 번 나타난다. 1493년 선공감 제조 한치형과 공조 판서여자신 등이 한강에 제천정(濟川亭)을 건축할 때 형세를 그려서 올렸다(『성종실록』 24년 6월 6일).

1615년(광해군 7)에는 지관사이이첨이 양주 서면에 남명조식의 서원을 건립하기 위해 터를 정하고 사면의 형세를 그려 올렸다(『광해군일기』 7년 9월 27일). 또 1791년에는 강원도관찰사윤사국이 영월에 자규루(子規樓)를 중건한 사실을 보고하자 자규루의 형태를 그려 올릴 것을 명하고 능지(陵誌)에 실리지 않은 영월 내 단종 관련 사료를 모아 올릴 것을 명하였다(『정조실록』 15년 2월 6일).

3. 행정 관련 형세도

1457년(세조 3) 경상도관찰사의 건의로 풍기군의 관할 지역의 형세를 그려오도록 하여 이조에서 의논하게 하였다(『세조실록』 3년 11월 29일).

1638년(인조 16) 인조는 강화부의 소재지를 이설한 만한 곳의 물색하기 위해 김신국을 파견하였는데, 김신국이 형세도를 그려서 돌아와 보고하였다(『인조실록』 16년 1월 22일).

4. 명나라 주문(奏文) 관련 형세도

조선시대에 명나라로 사행을 갈 때는 경우에 따라 지형도를 그려 가서 보조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404년(태종 4) 계품사김첨이 여진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요청하는 주본(奏本)과 지형도본(地形圖本)을 가지고 명나라 남경에 가서 주청하였다(『태종실록』 4년 5월 19일).

1618년(광해군 10)에 비변사에서 조선 군병을 지원하는 문제로 명나라에 자문을 보내면서 지세도(地勢圖)를 그려가 주문할 것을 청한 것도 그러한 경우이다(『광해군일기』 10년 6월 21일).

5. 산성 및 관방 관련 형세도

조선시대 형세도의 대다수는 산성과 관북 지역을 비롯한 주요 요새의 관방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1436년(세종 18)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정척에게 명하여 상지(相地)와 화공(畫工)을 거느리고 함길도·평안도·황해도 등지에 가서 산천의 형세를 그려 오게 하였다(『세종실록』 18년 2월 29일). 1450년(문종 즉위) 사간원에서 변방 접경지대인 양계의 축성을 위해 대신을 파견하기 보다는 산천의 형세를 살펴서 그림을 그려 와서 그것으로 의논할 것을 제안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8일 1번째기사].

1487년(성종 18) 황해도순찰사정괄이 하천인 전탄(箭灘)에 도랑을 만드는 형세를 올려 상황을 보고하였고(『성종실록』 18년 1월 21일), 1510년(중종 5) 평안도관찰사정광세가 미을관 북쪽에 연대를 설치할 곳의 지세를 따로 도면으로 그려 보고하였다(『중종실록』 5년 9월 27일).

1593년(선조 26) 일본과의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정철이 충청도와 전라도에 있을 때 산천의 길, 적진과의 거리, 방어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방어사곽영과 순찰사허욱에게 그림으로 그려서 바치게 하였다(『선조실록』 26년 2월 26일). 1595년(선조 28)에는 병조에서 한강 별영의 설치와 관련하여 상류로부터 바다 어귀에 이르기까지 한강 일대의 형세를 곧바로 상세히 조사하여 지도를 그려 올리도록 하였으며(『선조실록』 28년 7월 2일), 1596년(선조 29)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흥동 산성을 둘러보고 주위의 형세를 그림으로 올렸다(『선조실록』 29년 3월 3일).

임진왜란이 끝난 후인 1603년(선조 36)에 이기빈이 남한산성의 형세를 살피고 돌아와 도형으로 보고하자 비변사에 도형 1건을 내려 산세를 다시 상세하게 그려 올리도록 하였다(『선조실록』 36년 2월 27일). 1639년(인조 17) 경상감사이명웅이 산성의 형세를 보고하기 위해 가산(架山)·공산(公山)·독음산(禿音山)의 형세를 그려 올렸다(『인조실록』 17년 8월 19일).

1673년(현종 14) 함경감사남구만이 북도(北道) 관방을 변통할 일에 대해 진달하면서 도내 각 고을 간의 거리와 관방 요해처를 상세히 기록한 지도를 그려 올렸다(『현종개수실록』 14년 12월 30일).

1696년(숙종 22) 이조 참의이징명이 해서(海西)의 5성 형세를 그리고 그 거리와 소속 고을의 수, 창고, 관청, 군수물자, 무기 및 화기, 성가퀴, 샘, 승려, 군관 등의 수를 각 성 아래에 낱낱이 적어서 살펴보기 편하게 한 책으로 만들어 올렸다(『숙종실록』 22년 12월 25일).

1704년(숙종 30) 훈련대장이기하와 어영대장윤취상이 도성의 둘레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고 의견을 진달하였다(『숙종실록』 30년 2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