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산(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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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의 뒤에 위치하여 중심축이 되어 주는 산.

개설

후산(後山) 혹은 진산(鎭山)이라고도 부른다. 주산은 문자 그대로 주인 산이다. 주산을 중심으로 하여 좌청룡, 우백호 및 주작을 경계로 하는 하나의 국(局)이 형성된다. 작게는 무덤에서 크게는 도읍지까지 모두 주산을 갖게 된다. 주산이 의미를 갖는 것은 입지 선정 및 좌향 정하기에서 중심축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입지의 성격이나 역량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내용 및 특징

입지를 선정할 때 가장 먼저 살피는 것이 주산이 있고 없음이기 때문에 모든 풍수서적마다 주산을 중시하고 있다.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과목 가운데 『의룡경(疑龍經)』은 주산과 객산(客山)을 대조하여 설명함으로써 주산의 의미를 드러내었다. 『의룡경』에 따르면 주산이나 객산 모두 단정한 모습, 뾰족하거나 둥근 모습, 품자(品字) 모양 등이어야 하는 점에서는 서로 같지만, 주산은 객산과 달리 물이 감싸 돌아주어야 함을 요구한다. 반면에 물이 등을 돌리고 있으면 객산이 된다고 하였다.

『동림조담(洞林照膽)』도 주산의 요건을 열거하는데, 주산이 웅장하고 빼어난 것일 수도 있고, 평탄한 모양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 내려오는 기세를 살필 것을 주장한다. 만약 산의 내려오는 기세가 물이 흘러가듯 급하거나, 누워 있는 모습이거나, 기울었거나, 지나치게 험하고 높거나, 창처럼 뾰족한 것은 주산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좌향론(坐向論)을 중시하는 『지리신법(地理新法)』도 주산 개념을 중시하여 아예 주산론(主山論)을 독립된 한 편으로 설정해 두었다. 이에 따르면, 풍수의 핵심은 주산에 있는데, 주산이 바르면 국법(局法)이 모두 바르다는 것이다.

『장서(葬書)』는 주산 대신에 현무(玄武)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주산과 같은 개념이다. 이때 현무는 혈을 향해 머리를 드리운 듯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시신을 거부하는 것이라 하여 주산의 자격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조선초기 1464년(세조 10) 세조에 의해 주산 개념 논쟁이 벌어진다. 풍수학인 최연원(崔演元)이 올린 상소에서는 『명산보감(明山寶鑑)』을 인용하여 급히 뾰족한 봉(峰)을 일으켜 현무를 정하니, 문득 이것이 참용이면 주산(主山)이라고 하였으며, 『감룡경(撼龍經)』을 인용하여 또한 높은 봉이 있으면 이는 현무이니, 현무가 떨어지는 곳에 사신(四神)이 모이는 것이라고 하였다(『세조실록』 10년 9월 7일). 이것을 보면 현무는 주산이 틀림없다고 하겠다. 최연원이 현무를 주산과 동일시하였지만, 당시 풍수에 능했던 세조가 그보다 7년 전인 1457년(세조 3) 주산이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는가에 대한 논쟁을 대신들과 더불어 벌일 정도였다. 당시 논의에서 대신 임원준(任元濬)과 풍수학인 노목(魯穆)은 산맥이 떨어진 곳이 주산이 된다고 주장한 반면 한성부윤이순지(李純之)와 풍수학인 안효례(安孝禮)는 산맥이 생겨 나오다가 가장 높게 솟은 곳이 주산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산 개념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여 정하지 못하고 만다(『세조실록』 3년 9월 16일).

주산의 개념에서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가 없으나 기본적으로 주산의 요건을 따지는 것은 주산과 혈(穴) 거리의 장단(長短)의 차이에서 연유한다. 즉 주산과 혈장 사이의 거리가 짧고, 주산이 높게 솟아 있으면 별 문제가 없으나, 주산과 혈장 사이의 거리가 길고 주산과 혈장 사이로 이어지는 능선[來龍]이 기복 변화를 하면서 작은 봉우리를 만들며 내려올 때 주산 개념이 불분명해진다. 따라서 술사들 사이에서는 후자의 경우 주산이란 명칭 말고도 부모산, 태(胎), 식(息), 잉(孕), 육(育)이란 개념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바로 그러한 까닭에 앞에서 세조가 주산논쟁을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은 주산의 중요성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일찍부터 주산이 거론되었다. 먼저 1394년(태조 3)에는 주산이 낮게 꺼졌다는 이유로 무악에 도읍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상소가 있다(『태조실록』3년 8월 12일). 태종이 인소전(仁昭殿)을 창덕궁 북쪽에 지으려 하자 유한우(劉旱雨)가 그곳은 창덕궁 주산의 기운이 모인 곳이므로, 장차 궁궐에 이롭지 못할 것이라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태종은 인소전을 지으려던 곳이 주산의 맥을 받은 곳이 아니라는 이유로 포기하게 되는 것 등은 풍수지리에서 주산이 입지 선정의 관건으로 진작부터 인식되었음을 잘 알려준다(『태종실록』 6년 5월 27일). 또 최양선(崔揚善)이 헌릉(獻陵)의 산맥을 배양해야 한다는 논의를 제기한 것도 주산의 맥을 보호해야 한다는 취지에 의한 것이었다(『세종실록』 12년 7월 7일). 이에 대해 고중안(高仲安)이 반박 의견을 개진한 것도 주산을 쟁점으로 논의한 것인데, 주산의 맥은 길에 의해 끊긴 곳이 많으며 헌릉 뒷 맥 또한 큰 길이 단절한 예도 있듯이 굳이 헌릉의 뒷길을 막을 필요는 없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세종실록』 12년 7월 7일)(『세종실록』 15년 7월 22일).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된 위의 헌릉 단맥 논쟁은 이와 같이 주산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을 정도로 주산은 보호되어야 마땅한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유는 주산의 맥을 통해 혈처로 생기가 유입되고, 그 생기를 활용하는 것이 풍수지리의 요체이니만큼 주산의 맥을 훼손하면 풍수지리 자체의 활용이 불가해지기 때문이다. 주산의 맥을 보호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세종대의 고중안 등은 세종의 원묘 창건 계획을 주산의 맥을 훼손시킨다는 이유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던 것이다(『세종실록』 14년 1월 15일). 그런데 과연 해당하는 입지에서 주산이 어느 산이냐는 의견에서는 각각 달랐다. 즉 산의 형세를 보는 시각들이 달랐기 때문에, 최양선은 경복궁 북쪽 산이 주산이 아니라, 당시 승문원(承文院) 자리가 실로 주산인데 경복궁 자리를 왜 북악산 아래에 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3일). 이러한 논의는 영의정황희(黃喜) 등에 의해 결국 북악산이 주산이 되어 경복궁이 제대로 된 자리라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세종실록』 15년 7월 9일).

변천

주산의 정확한 개념 정의는 조선초기 세조 당시부터 논의가 되지만 지금까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좀 더 정확한 주산 개념을 설정하기 위하여, 소조산, 부모산, 현무정, 입수 등으로 세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전후로 중국에서 유입된 『인자수지(人子須知)』와 『지리정종(地理正宗)』, 『감여만흥(堪輿漫興)』 등에서는 소조산과 주산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또 어떤 책에서는 주산과 소조산을 다른 것으로, 즉 주산을 소조산에서 다시 산 능선이 뻗어가서 이룬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주산과 같으면서 주산이 아닌 것으로 『인자수지』에서는 주필산(駐蹕山)을 설정하기도 했다. 만약 혈장 뒤에 고대(高大)한 산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산의 갈라진 줄기가 많아 혈장과 상당한 거리가 떨어졌으면 주산이라 할 수 없으며, 이런 산은 주필산이라 부른다.

참고문헌

  • 『감여만흥(堪輿漫興)』
  • 『동림조담(洞林照膽)』
  • 『지리정종(地理正宗)』
  • 『탁옥부(琢玉斧)』
  • 김두규, 『조선 풍수학인의 생애와 논쟁』, 궁리출판사, 2000.
  • 김두규, 『풍수학 사전』, 비봉출판사, 2005.
  • 서선계·서선술 저, 김동규 역, 『인자수지』, 불교출판사, 1989.
  • 양균송 저·김두규 교감역주, 『감룡경·의룡경』, 비봉출판사, 2009.
  • 村山智順 저·최길성 역, 『조선의 풍수』, 민음사, 1990.
  • 최창조 역주, 『청오경·금낭경』, 민음사, 1993.
  • 최창조, 『한국의 풍수사상』, 민음사, 1984.
  • 호순신 저·김두규 역해, 『지리신법』, 비봉출판사, 2004.
  • 徐善繼·徐善述, 『地理人子須知』, 臺灣, 竹林書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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