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릉(仁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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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조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김씨(金氏)의 합장릉.

개설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대모산(大母山) 남쪽 기슭, 헌릉(獻陵)과 같은 경역에 자리하고 있다. 1834년 11월에 순조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인릉이라 하였으며, 1857년(철종 8) 8월에 순원왕후가 승하한 뒤 순조의 능침 동쪽에 합장하여 하나의 봉분을 조성하였다. 능상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봉분 주변에는 3면에 곡장(曲墻)을 설치했으며, 양석과 호석을 2쌍씩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두었는데, 혼유석마저 하나로 합설되어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단릉(單陵)처럼 보인다.

조성 경위

순조는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의 정침인 회상전에서 재위 34년 만에 승하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능호를 인릉으로 정했으며, 산릉을 조성하기 위해 좌의정 홍석주(洪奭周)를 총호사(摠護使)에 임명하여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다. 12월 4일부터 산릉의 터를 찾기 위해 세 차례의 간심(看審)의 절차를 진행하여 한 달여 시간을 들여, 결국 12월 28일에 파주 옛 장릉(長陵) 좌측 언덕으로 결정하고 봉표를 세웠다. 산릉의 공역이 시작되자 봉분이 위치할 곳에 옹가와 수도각을 세우고 정자각의 터 닦는 공사와 석재 반입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835년(헌종 1) 2월 25일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하교에 따라 작업을 중단하고, 산릉 터를 교하에 자리한 장릉의 좌측 언덕으로 옮겨 능침을 조성하고 4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헌종실록』 1년 4월 19일). 어렵게 터를 정하고 인릉이 완공되었으나, 풍수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결국 1855년(철종 6) 천봉을 결정하였다. 천릉을 총괄하는 총호사의 직임은 김흥근(金興根)이 맡았다. 이듬해 10월 11일에 현재의 위치인 대모산 아래 헌릉의 오른쪽 언덕에 옮겨 모셨다(『철종실록』 7년 2월 22일).

정자각·비각·수라간·수복방·재실 등을 지었는데, 수릉(綏陵)을 천릉한 뒤 남은 정자각의 부재와 옛 인릉의 비각 및 재실의 철거 목재를 이용하여 천릉 과정에서 생겨날 민력 고갈과 목재 수급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또 새 인릉 터 주변에는 옛 희릉의 빈터가 있었는데, 희릉을 천봉한 뒤 묻어 둔 석물을 발굴하여 양석 1쌍과 마석 1쌍, 장명등의 덮개돌, 망주석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망대구(望臺臼) 1쌍을 옮겨 와 재사용하였다. 천봉을 마치고 정자각 동쪽에 표석을 세웠는데, 철종이 직접 글씨를 써서 음각하였다(『철종실록』 7년 8월 25일). 그 뒤 1899년(광무 3)에 순조가 숙황제(肅皇帝)로 추상되면서 비석을 세워, 오늘날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 순원왕후가 창덕궁 양심합에서 승하하자 순조의 능침 동쪽에 합부하였는데, 이로써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완성되었다. 순원왕후의 능침을 조성하기 위해 조직된 산릉도감은 총호사를 맡은 우의정조두순(趙斗淳)이 총괄하였다. 그런데 이때 봉분을 합해 하나로 조성하였으므로, 능침 주변에 배치하는 석물과 혼유석 등은 모두 순조를 위해 배설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여러 건물 또한 이미 순조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 등이 있으므로, 삼년상을 치를 동안 사용할 가정자각과 가재실 등의 임시 건물만 건립하였다. 따라서 순원왕후가 합장된 뒤에도 1856년(철종 7)에 천봉하면서 조성한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성 상황

오늘날에는 정자각 남쪽에 위치한 수라간과 수복방이 소실되었으며, 안향청과 전사청도 사라지고, 재실만 정면 6칸 규모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재실마저도 한국전쟁 이후에 이루어진 농지 개간으로 인해 능역에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순원왕후]인릉산릉도감의궤([純元王后]仁陵山陵都監儀軌)』
  •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
  •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仁陵薦奉山陵都監儀軌)』
  • 문화재청, 『순조 인릉 정자각과 비각 수리보고서』, 문화재청, 2009.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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