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량(柳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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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355년(공민왕 4)∼1416년(태종 16) = 62세]. 고려 공민왕(恭愍王)~조선태종(太宗) 때의 문신. 고려에서는 호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고, 조선에서는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자는 명중(明仲)이고,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거주지는 개성과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에서 밀직사사(密直司使)를 지낸 유계조(柳繼祖)이고, 어머니 혜순택주(惠順宅主)는 면성군(沔城君)구영검(具榮儉)의 딸이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조준(趙浚)의 매부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 활동

1371년(공민왕 2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였고, 1379년(우왕 5)에 산원(散員)이 되었다. 1381년(우왕 7)에 흥위위(興威衛)호군(護軍)에 임명되었다.[『경재집(敬齋集)』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文城府院君 柳公亮 墓誌銘)」] 이듬해인 1382년(우왕 8) 봄에 사직하고 과거에 응시하여 을과(乙科)에 1등으로 뽑혔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해 겨울에 전의시(典儀寺) 부령(副令)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에 판도총랑(版圖摠郞) 및 전리총랑(典理摠郞), 사복시(司僕寺)정(正), 전교시(典校寺) 영(令), 천우위(千牛衛)대호군(大護軍), 삼사(三司) 우윤(右尹), 종부시(宗簿寺)판사(判事),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내부시(內府寺) 판사, 전교시 판사를 지냈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1388년(우왕 14)에는 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로 활동하면서 왜선(倭船) 80여 척이 진포(鎭浦)에 정박하고 부근 주와 군에 침입한다고 보고하였다.[『고려사(高麗史)』 신우(辛禑) 14년 5월 갑술(甲戌)] 1390년(공양왕 2)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1392년(공양왕 4)에는 호조 판서가 되었다.[『고려사』 공양왕 2년 5월 병오(丙午), 공양왕 4년 4월 계유(癸酉)] 이밖에도 공조 판서, 이조 전서(典書) 등을 역임하였는데 모두 지제교(知製敎)를 겸대하였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조선 태조 시대 활동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직후부터 유량(柳亮)은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하여 다양한 일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조 전서 시절 문무양반(文武兩班)의 정안(政案)을 다시 작성하도록 한 것도 있었다.[『태조실록(太祖實錄)』태조 1년 10월 10일] 1393년(태조 2) 유량은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가 되었고, 그해 9월 안렴사(按廉使)를 폐지하고 관찰출척사(觀察黜陟使)를 회복시키자 그는 교주강릉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觀察黜陟使)가 되었다.[『태조실록』태조 2년 2월 11일, 태조 2년 9월 13일] 이어 예문관(藝文館) 학사(學士)를 비롯하여 중추원 상의사(商議事) 겸 형조 전서에 임명되었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1395년(태조 4) 봄에 태조가 개국할 때 잠저에서 오랫동안 보필하였다 하여 유량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케 하고, 밭과 노비를 내려 주었다. 이어 중추원 상의사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빈객(賓客), 삼군부(三軍府) 참지사(參知事)를 역임하였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1396년(태조 5) 유량은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 있다가, 경상도도절제사(慶尙道都節制使)최운해(崔雲海)와 함께 장기(長鬐)에서 왜구와 싸워 왜병 3급(級)을 베었다.[『태조실록』태조 5년 11월 2일] 이듬해인 1397년(태조 6)에는 왜구의 배 60척이 영해(寧海)의 축산도(丑山島)에 정박하고 항복을 청하자, 유량이 홀로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고는 바로 왜인들에게 가서 항복을 권하였다. 그러자 그들이 사로잡았던 사람들을 돌려보냈으며, 이어 왜적의 괴수가 볼모를 보내 항복하였다. 그러나 유량이 나가보지 않고 중 의운(義雲)을 보내자 왜적들이 울주지주사(蔚州知州事)를 납치하여 도망갔다.[『태조실록』태조 6년 1월 28일] 이 사건으로 유량은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 하옥되었다가 6월에 병으로 보석(保釋)되었다.[『태조실록』태조 6년 5월 10일, 태조 6년 6월 9일] 그러나 1398년(태조 7) 사헌부에서 유량을 다시 탄핵하자, 태조가 유량의 재산을 적몰(籍沒)하고 외방(外方)으로 귀양을 보냈다.[『태조실록』태조 7년 6월 20일] 한편 이 해에 유량은 강릉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를 역임하기도 하였었는데, 백성들이 그를 기념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운 일도 있었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16년 4월 2일]

태종 시대의 활동

1401년(태종 1) 그 전 해인 1400년(정종 2)에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 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고 밭과 노비 등을 받았다.[『태종실록』태종 1년 1월 15일] 이듬해인 1402년(태종 2)에는 풍해도도절제사(豊海道都節制使)와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에 임명되었고, 1404년(태종 4) 6월에는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태종실록』태종 2년 11월 12일, 태종 2년 11월 13일, 태종 4년 6월 6일] 이무렵 유량은 김희선(金希善) 등과 함께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정치를 의논하여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진언(陳言)하였다.[『태종실록』태종 4년 9월 19일]

이어 그해 10월에는 사평부(司平府) 참판사(參判事) 겸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는데, 반역죄로 탄핵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이거이(李居易)와 이저(李佇)를 법대로 처벌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태종실록』태종 4년 10월 14일, 태종 4년 10월 18일] 그러나 이거이의 죄를 청하는 과정에서 의정부와 삼성(三省)이 갈등을 빚으면서, 의정부에서는 백관의 장(長)을 능욕하였다는 이유를 들어 사헌부와 사간원, 그리고 형조를 탄핵하였고, 결국 이 사건으로 사헌부와 사간원 등의 관리들이 유배되었다. 이때 유량은 공신인 까닭에 벌을 면하였지만, 스스로 성문(城門)을 나가서 상서(上書)하고, 전라도 낭산(朗山)으로 갔다.[『태종실록』태종 4년 10월 21일, 태종 4년 10월 22일] 그러나 곧 유량은 문성군(文城君)에 봉해졌다.[『태종실록』태종 4년 10월 23일]

이듬해인 1405년(태종 5) 유량은 형조 판서가 되었고, 그해 5월 국정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며 노비변정도감(奴婢辨定都監)의 설치를 반대하였다.[『태종실록』태종 5년 1월 15일, 태종 5년 5월 8일] 이어 의정부(議政府)지사(知事)를 거쳐, 12월에 한성부(漢城府) 판사로 임명되었다.[『태종실록』태종 5년 7월 3일, 태종 5년 12월 6일] 1406년(태종 6)에는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가, 그해 윤7월 의정부 참찬사(參贊事)로 옮겼다.[『태종실록』태종 6년 2월 11일, 태종 6년 윤7월 13일] 이어 1407년(태종 7)에는 계품사(計稟使)서장관(書狀官)정치(鄭穉)가 명(明)나라에서 돌아와 황제가 말을 요구한다고 보고하자, 진헌관마색(進獻官馬色)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유량 등이 제조(提調)를 맡았다.[『태종실록』태종 7년 8월 29일] 그리고 그해 12월 병조(兵曹) 판서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7년 12월 8일]

1408년(태종 8) 유량이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어변갑(魚變甲) 등 33인을 선발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9 「관직전고(官職典故)」] 그해 8월 태종이 세자를 따라 조현(朝見)하고 돌아온 전 호군(護軍)이지성(李之誠)을 귀양 보냈는데,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간원(司諫院)에서 이지성을 국문하여 그 죄를 밝히기를 청하니, 태종이 간원(諫院)의 소(疏)를 보고 사간김자지(金自知)를 불러 욕(辱)을 보이려 하였다. 이에 유량이 “간관을 설치한 것은 본래 허물을 바루고자 한 것인데, 지금 만일 욕을 보이면 설치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포용해 주소서.” 라고 하자, 태종이 그만두었다.[『태종실록』태종 8년 4월 10일] 그해 10월 다시 의정부 참찬사(參贊事)로 옮겼고, 1409년(태종 9) 이조 판서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8년 10월 13일, 태종 9년 3월 4일]

이무렵 대간에서 태종의 사위인 조대림(趙大臨)의 병권을 회수하자고 상소하였는데, 태종이 병권을 내놓게 하자는 논의를 먼저 발한 자를 고문하게 하였다. 유량이 “대관(臺官)을 옥에 가두는 것은 사필(史筆)에 아름답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친히 심문하시고 효유(曉諭)하여 석방하소서.” 하고 간하였지만, 태종이 받아들이지 않았다.[『태종실록』태종 9년 4월 2일] 그해 4월 쇄권색(刷卷色) 제조가 되었는데, 이조 판서와 사헌부 대사헌을 겸하였다.[『태종실록』태종 9년 4월 19일, 태종 9년 윤4월 29일] 그해 8월 의정부 참찬사 겸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신 행차를 기회로 중국에 밀무역하려던 사건을 덮어두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태종실록』태종 9년 8월 10일, 태종 9년 8월 22일)

1410년(태종 10년) 여진족 올적합(兀狄哈)이 경원부(慶源府)에 침략하여 부사한흥보(韓興寶)가 패사(敗死)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영무(趙英茂)와 유량이 올적합을 섬멸해 무위(武威)를 과시하고, 다른 여진인들도 경계할 것을 건의하자, 태종이 이 의논을 따랐다.[『태종실록』태종 10년 2월 10일] 1412년(태종 12) 12월에는 보국숭록부원군(輔國崇錄府院君)에 봉해졌고, 1413년(태종 13) 4월에는 의정부 찬성사(贊成事)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12년 12월 4일, 태종 13년 4월 7일] 그해 7월 의정부 좌정승하륜(河崙) 등이 운하를 파서 숭례문(崇禮門)에서 용산강(龍山江)에 이르기까지 주즙(舟楫)을 통행시키자고 건의하자, 유량이 용산강이 도성과 가까운데 굳이 백성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냐며 반대하였고, 이에 태종이 일을 정지하고 거행하지 않았다.[『태종실록』태종 13년 7월 20일] 이어 그해 10월에는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태종실록』태종 13년 10월 22일]

그리고 1415년(태종 15)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오른 유량은 백관을 거느리고 민무휼(閔無恤)과 민무회(閔無悔) 등이 세자에게 불충한 말을 하였다며 죄 줄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태종실록』태종 15년 6월 19일, 태종 15년 7월 20일, 태종 15년 7월 26일] 얼마 후 유량이 늙고 병들었다고 사직을 청하였으나 태종이 윤허하지 않았고, 그해 겨울 동덕공신(同德功臣)의 호(號)가 더해졌다.[『태종실록』태종 15년 8월 10일, 『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1416년(태종 16) 등창을 앓다가 세상을 떠나니, 향년 62세였다. 태종이 매우 슬퍼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다. 그리고 대언(代言)이종선(李種善)을 보내 집에 제사를 내리고, 치부(致賻)를 더하여 관(官)에서 장사를 돌보게 하였다.[『태종실록』태종 16년 4월 2일]

성품과 일화

유량은 조선 개국 초에 활발한 활동을 한 인물로, “조선을 세워 기반을 다지던 초기에 만약 윤곤(尹坤)과 유량 등의 보필과 호위에 힘입지 않았다면, 또 이원(李原)과 남재(南在)와 정희계(鄭熙啓) 등이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나라 국운이 이렇게 천만년토록 면면히 이어지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라는 평가를 받았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1 「기십일대조소정공사(記十一代祖昭靖公事)」]

한편 유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태조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태종에게 진노하여, 나라가 없어지든 말든 한 번 죽기로 싸워야겠다고 뜻을 정하고는 중외(中外)에 크게 병마를 모으라고 유시(諭示)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다시 노도(怒濤)와 같은 기세로 북쪽 여진인을 불러들여, 나라를 어지럽히는 악한 무리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마저 여의치 않게 되자, 중국에 들어가 국내 상황을 낱낱이 진달한 다음 명나라 군사를 내주기를 강하게 요구하여 대의(大義)의 깃발을 세울 뜻을 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윤곤과 유량 등 10여 명은 유사(儒士)를 통해 태조의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별도로 아뢰면서 군대를 일으키면 이롭지 못한 연유를 세세히 진달하였다. 또 이원, 남재, 정희계, 차원부(車原頫) 등이 여러 방법을 통하여 온화한 말과 완곡한 뜻으로 비유를 들어가며 아뢰어 태조의 진노를 풀었다.[『명재유고』 권31 「기십일대조소정공사」]

유량이 경주부윤으로 활동하던 당시의 일화도 전한다. 1397년(태조 6)에 왜구가 크게 떨치니, 태조가 우정승김사형(金士衡)을 보내어 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그때 왜구가 마침 이르자 유량이 변장(邊將)과 함께 공격하니, 왜적의 형세가 궁해서 항복하고자 하였다. 변장이 허락하였으나 적은 아직 허실(虛實)을 엿보고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유량이 궁시(弓矢)를 풀어 놓고 적의 진중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 다른 뜻이 없음을 보이니, 적이 이를 믿고 악수하고 마음을 털어놓고 좋은 칼을 주었다. 유량이 즉시 항복한 왜인 사자(使者) 10인을 데리고 김사형의 막사(幕舍)로 가니, 김사형이 왜선(倭船)을 울산포(蔚山浦)에 머물러 두고, 바로 왜사(倭使)를 조정에 보내었다. 조정에서는 그들에게 양미(糧米)를 후하게 주어 위로하고 회유하면서, 비밀히 변장을 시켜 그들을 섬멸하게 하였다. 그런데 병선(兵船)을 징발하여 모으지도 못한 상황에서, 적이 뜬소문을 듣고는 마침내 울주지주사이은(李殷)과 아전 1명, 기생 1명을 붙잡아 갔다. 정권을 잡은 자가 이것은 유량이 사주한 것이라고 하여 사헌부로 하여금 핵문(劾問)하게 하니, 태조가 치죄(治罪)하지 말라고 명하여 합산(合山)에 귀양 가는 것으로 그쳤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자가 분을 풀길이 없어 다시 유량을 체포하여 국문(鞫問)하기를 청한 후 옥에 가두고 여러 달 동안 다양한 고문을 행하였다. 이방원(李芳遠 : 태종)이 그가 굴복당하는 것을 불쌍하게 여겨 틈을 타서 태조에게 극언(極言)하니, 태조가 이 뜻을 이해하고 놓아 주며 나주(羅州)에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고 한다.

한편 유량의 성품에 대해서는 “뜻이 높고 굳세고 조급하여, 정사를 보는 데 대체(大體)에 힘써 변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시시비비에 궤변을 쓰거나 남을 따르지 않았다.” 고 하였다.[『태종실록』태종 16년 4월 2일]

묘소와 후손

유량의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시우리에 있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아들 유경생(柳京生)의 장인인 하연(河演)이 쓴 묘지명이 남아 있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첫째 부인 평양 조씨(平壤趙氏)는 시중(侍中)에 추증된 조덕유(趙德裕)의 딸인데, 2남을 낳았다. 장남은 유좌(柳佐)로 전사령(典祀令)을 지냈고, 2남 유근(柳謹)은 한성부소윤(漢城府少尹)으로 활동하였다. 둘째 부인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좌의정(左議政)에 추증된 이원발(李元發)의 딸인데, 아들 셋을 낳았다. 1남 유경생(柳京生)은 의흥사(義興司) 호군을 지냈고, 2남 유강생(柳江生)은 남부령(南部令)이었으며, 3남 유한생(柳漢生)은 내자시(內資寺) 판관(判官)을 지냈다.[『경재집』 권2 「문성부원군 유공량 묘지명」]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 『경재집(敬齋集)』
  • 『기년편고(紀年便攷)』
  • 『동사략(東史約)』
  • 『명재유고(明齋遺稿)』
  • 『삼공신회맹문(三功臣會盟文)』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청선고(淸選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