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곤(尹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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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2년(세종 4) = ?].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무신. 이조 판서(判書)와 영의정 등을 지냈다. 봉작(封爵)은 파평군(坡平君)이고, 시호는 소정(昭靖)이며, 호는 복옹(福翁)이다. 만년에 사람들이 ‘복노인[福翁]’이라고 불렀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고려 개성부판사(開城府判事)를 지낸 윤승순(尹承順)이고, 어머니 단양 이씨(丹陽李氏)는 고려 판도(版圖) 판서를 지낸 이거경(李居敬)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영평군(鈴平君)윤척(尹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윤안숙(尹安淑)이다. 조선태종 때 우정승(右政丞)을 지낸 이무(李茂)의 조카이고,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낸 윤목(尹穆)과 형조 판서를 지낸 윤향(尹向)의 맏형이다. 우의정윤호(尹壕)의 할아버지이고,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증조할아버지이다. 세종의 부마 윤사로(尹師路)와 영의정윤필상(尹弼商)의 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며, 성리학자 윤선거(尹宣擧)의 9대조이다.

고려 말~조선 정종 시대 활동

고려 말엽에 과거에 급제하여, 무관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둘째 아우 윤목(尹穆)은 무관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막내아우 윤향(尹向)은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려 말엽에 원(元)나라 몽골군과 일본의 왜구를 물리친 원수(元帥)이무(李茂)의 조카였으므로, 윤곤(尹坤)과 윤목 형제는 외삼촌 이무의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1388년(우왕 14) 4월 우군(右軍) 도통사(都統使)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할 때 원수이무의 군사도 이에 참여하여 조선을 세우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3] 이때 문무를 겸전한 윤곤은 이성계의 큰 신임을 얻었고, 동생 윤목은 이무 군사의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1392년 7월 조선이 건국할 때 윤곤과 윤목 형제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1]

조선태조(太祖) 때의 실권자 정도전(鄭道傳)은 왕자와 공신들의 사병(私兵)을 해체하여 ‘의흥(義興) 삼군부(三軍府)’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제 5왕자 이방원(李芳遠)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당시 삼군부 판사였던 이무는 정도전과 이방원(李芳遠)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당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이방원 일파에 협력하고 있었다. 이때 윤곤과 윤목 형제도 외삼촌 이무의 사병에 속하였으나, 삼군부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도 있었다. 태조 말년에 윤곤은 삼군부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던 것이다.

1398년(태조 7) 8월 태조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방원은 태조의 병세가 위중한 틈을 타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남은(南誾)의 첩 집에 모여 있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沈孝生 : 이방석의 장인) 등 10여 명을 일망타진하였다. 이때 이무가 이를 이방원에게 미리 알려 주었다. 이방원은 한밤중에 남산(南山)부터 개경의 수창궁(壽昌宮)까지 반란군으로 포위하였는데, 윤곤과 윤목 형제도 군사를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이방원은 심복을 보내어 세자 이방석(李芳碩)과 그의 형 이방번(李芳蕃) 형제를 궁궐 밖으로 불러내어 체포한 후, 모두 살해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제1차 왕자의 난이 끝나고 가장 공로가 많은 29명에게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책훈할 때, 외삼촌 이무는 정사공신 1등에 책훈되었고, 윤곤은 정사공신 3등에 책훈되었으며, 동생 윤목은 정사공신 4등에 책훈되었다.

그런데 정사공신 책훈에서 제외된 박포(朴苞)가 제4왕자 이방간(李芳幹)을 사주하여, 1400년(정종 2) 1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이방간과 이방원의 군사가 개성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윤곤과 윤목 형제도 군사를 이끌고 이방간의 아들 이맹종(李孟宗)의 군사와 싸웠으며, 마침내 이방원의 군사가 승리하였다. 이방간 부자는 황해도 토산(兎山)으로 귀양을 갔고, 박포 등은 처형되었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었다. 제 2차 왕자의 난에 공로가 많은 사람들은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훈되었는데, 윤곤과 윤목 형제는 좌명공신 3, 4등에 책훈되었다.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보고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고향 함경도 함흥(咸興)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방원은 함흥으로 사자(使者)를 연달아 보내어 잘못을 사과하고, 태조에게 서울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더욱 화를 내고 함흥에 오는 사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는데, 이것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자를 다 죽인 것은 아니고, 그의 절친한 친구 정승 성석린(成石璘)과 무학대사(無學大師) 두 사람은 받아들였는데, 태조는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서 태종 일당을 응징하려고 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곤과 유량(柳亮) 등 10여 명은 성석린을 통해서 함흥에 있는 태조의 행재소(行在所)로 간 후 태조를 만났다. 그리고 태조가 군사를 일으키면 이롭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진달하였다. 별도로 태조에게 온화한 말과 완곡한 뜻으로 비유를 들어가면서 국내외의 어려운 정세를 논하여 태조의 분노를 풀려고 노력하였다. 또 군사를 일으켜서 아버지와 아들의 군사가 서로 싸운다면, 중국의 비위를 거슬러서 양국 사이에 틈이 생길 수 있다고 거론하였다. 윤곤 등은 태조에게 이런 싸움이야 말로 나라를 망치고 몸을 망치는 길이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거듭 설득하였고, 그제서야 태조는 비로소 생각을 돌렸다.[『설원록(雪冤錄)』] 이리하여 태조는 서울로 돌아왔는데, 태조가 마이천(麻伊川) 다리까지 마중을 나온 태종에게 활을 쏘는 바람에 다리 난간에 화살을 맞추었다고 하여, 그 다리를 ‘살꽂이 다리’라고 한다.

태종 시대 활동

1401년(태종 1) 2월 윤곤은 사은사(謝恩使)의 부사(府使)에 임명되어, 정사(正使)삼사우사(三司右使)이직(李稷)과 함께 중국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1년 2월 30일] 그해 6월에 조선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는 명나라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북경(北京)에서 돌아와서 왕에게 바쳤다.[『태종실록』태종 1년 6월 12일] 이에 태종이 강사포(絳紗袍)원유관(遠遊冠) 차림으로 여러 신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정사와 부사에게 각각 안마(鞍馬) 1필씩을 내려 주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들은 조선에서 공납(貢納)할 말 값의 수량을 논의한 적이 있었다. 그해 12월 명나라 사신 축맹헌(祝孟獻)이 말하기를, “중국에서 말 값은 많이 주었는데, 조선에서 바치는 말의 숫자는 적다.” 라고 항의하였다.[『태종실록』태종 1년 12월 16일] 그러자 태종이 총제(摠制)이숙번(李叔蕃) 등에게 명하여 이를 조사하여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때 윤곤은 고향 파평(坡平)에 안치(安置)되었다가, 곧 삼군부(三軍府)우군(右軍) 동지총제(同知摠制)로 복직하였다.[『태종실록』태종 1년 12월 18일]

1402년(태종 2) 7월 사헌부에서 동지총제윤곤을 탄핵하였는데, 그가 일찍이 천거한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함께 연좌된 것이다.[『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 2년 7월 11일] 당시 나라의 제도에는 보거법(保擧法)이 있어서, 자기가 천거한 사람이 적임자가 아니면 추천한 사람에게도 죄가 미쳤다. 그리하여 윤곤 역시 법령에 따라 사헌부(司憲府)로부터 탄핵받았으나, 태종이 그를 용서하여 주었다. 그 뒤에 태종의 신임을 받아서 우군 도총제(都摠制)로 승진하여, 궁궐의 호위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406년(태종 6) 2월 좌군(左軍) 도총제가 되었다.[『태종실록』태종 6년 2월 11일] 그해 6월 나라에서 귀암사(龜巖寺)를 혁파할 때 절의 노비들을 조상이 시주한 물건[施物]이라고 하여 관가에 소송하여 이를 차지하였다가, 태상왕(太上王) 태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되었다.[『태종실록』태종 6년 6월 26일] 1408년(태종 8) 4월 사은사의 정사에 임명되어 부사김겸(金謙) 등과 함께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갔다가 돌아 왔다.[『태종실록』태종 8년 4월 20일]

1409년(태종 9)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때 태종의 왕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형제인 민무구 및 민무질과 가까웠던 외삼촌 이무가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다.[『태종실록』태종 9년 10월 5일] 윤곤의 동생 윤목도 일찍이 사신 일행의 부사에 임명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는 길에 서장관(書狀官)과 술을 마시고 회안군(懷安君)이방간을 동정하는 말을 하였다. 정사가 이를 태종에게 고발하였으므로 태종이 매우 격노하였다. 그해 10월 태종이 말하기를, “정사(政事)가 있으면 죄인의 친척으로서 벼슬에 있는 자는 마땅히 태거(汰去)시켜야 한다. 윤목 등 다섯 사람의 부자(父子) 형제 등은 직첩(職牒)을 회수하고 외방(外方)에 안치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윤목의 사건은 외삼촌 <이무의 옥사>와 연계되는 바람에 윤목은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윤곤은 윤목의 형이고 이무의 조카임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윤곤은 공신(功臣)이라고 하여 연좌시키지 않고 특별히 용서하였다.[『태종실록』태종 9년 10월 5일]

1413년(태종 13) 7월 경주안동도병마도절제사(慶州安東道兵馬都節制使)에 임명되어, 경상도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倭寇)를 방어하였다.[『태종실록』태종 13년 7월 19일] 임기를 두 번 연임하면서 왜구를 방어하는 데에 공을 세웠으므로, 1417년(태종 17) 9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하였다.[『태종실록』태종 17년 9월 7일] 참찬(參贊)찬성(贊成)은 좌우 2인씩 있었는데. 우참찬은 의정부의 영의정 및 좌의정, 우의정 3상(相)과 함께 묘당(廟堂)에서 중대한 국사(國事)를 의논하는 최고 권력자 7인 중에 하나였다.

세종 시대 활동

1418년(세종 즉위년) 8월 세종이 즉위하였을 때 의정부 우참찬으로 있었다. 그해 9월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왔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자, 세종이 윤곤을 안주(安州)로 미리 보내 선온(宣醞 : 임금이 내리는 술)을 가지고 가서 명나라 사신을 위로하게 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즉위년 9월 11일] 12월 윤곤은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세종 즉위년 12월 7일] 윤곤이 도절제사(都節制使)윤자당(尹子當)과 함께 부임(赴任)하려고 사은숙배(謝恩肅拜)할 때 마침 세종은 수강궁(壽康宮)에서 상왕(上王) 태종을 문안드리고 있었다. 세종과 태종은 윤곤과 윤자당을 침전(寢殿)으로 불러들여 전별연(餞別宴 : 작별하는 술자리)을 베풀고, 태종은 윤곤과 윤자당에게 활과 화살을 내려 주었으며, 세종은 전립(氈笠)을 내려 주었다.[『세종실록』세종 즉위년 12월 11일] 윤곤과 윤자당은 모두 공신(功臣)이었으므로, 태종이 예조 판서허조(許稠)에게 명하여 예조에서 전별연을 베풀고 예조 판서가 친히 전송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외방의 관직에 부임하는 공신에게 전별연을 베풀고 예조 판서가 직접 전송하는 관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세종실록』세종 즉위년 12월 13일]

1419년(세종 1) 4월 평안도관찰사윤곤은 “요즘 조정의 사신들이 어명(御命)을 받들고 외방에 나가면, 혹은 관기(官妓)와 사랑에 빠져서 직무를 전폐하고 욕심껏 즐기는데, 만약 기생과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그 수령이 아무리 어질어도 취모멱자(吹毛覓疵)하여 일부러 죄망(罪網)에 몰아넣습니다. 또 명사들끼리나 한 고을 안에서 서로 좋게 지내던 자들도 혹은 기생 하나를 놓고 서로 다투어, 드디어 틈이 벌어져 종신토록 원수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고, 관기를 없애버리자고 강력히 주장하였다.[『세종실록』세종 1년 4월 14일] 6월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기를, “평안도관찰사윤곤이 아뢰기를, ‘부자(父子)가 서로 기생 하나를 간음하고, 또 모녀(母女) 형제가 한 남자를 간통했다.’ 하니, 그 말이 매우 해괴망칙합니다. 그 죄가 임금을 무망(誣罔)하는 데에 해당합니다.” 하였다.[『세종실록』세종 1년 6월 14일] 그러나 세종은 지신사(知申事)원숙(元肅) 등에게 “형제와 친족이 함께 기생 하나를 간음했다는 것은 간혹 있을 듯하나, 어찌 알고서도 일부러 간음하는 자가 있겠는가. 사간원에서 올린 글을 나는 옳다고 보지 않는다.” 하고, 윤곤의 주장대로 조정 사신이 지방의 관기를 간음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때 의정부와 육조에서 평안도관찰사윤곤의 장계(狀啓)에 대하여 논의하였는데, 모두 말하기를, “시행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금지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오직 좌의정박은만이 “윤곤의 청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집현전(集賢殿)대제학(大提學)변계량(卞季良)은 옛 풍습에 따라서 뭇사람의 마음에 맞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그렇게 해온 풍습이 비록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아름다운 풍속이겠는가. 더구나 남편 있는 기생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윤곤이 청하는 대로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세종실록』세종 1년 6월 18일] 그러나 세종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관비의 성적 접대는 끝내 고쳐지지 못하고 후대까지 계속되었다.[『세종실록』세종 28년 1월 30일] 세종은 윤곤의 개혁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419년(세종 1) 9월 그를 이조 판서에 임명하였는데, 무신을 문관의 총수 자리에 임명한 것도 파격적이었고, 품계(品階)도 판서의 정2품이 아니라 정승의 종1품으로 올렸다.[『세종실록』세종 1년 9월 25일, 『노서유고(魯西遺稿)』 권20 「선조숭정대부파평군시소정공가상(先祖崇政大夫坡平君諡昭靖公家狀)」 이하 「윤곤행장」으로 약칭] 그해 12월 정종(定宗)의 국상(國喪)을 당하여, 이조 판서윤곤은 영의정을 대신하여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돌아간 상왕(上王) 정종의 시책(諡冊)을 올리는 예를 섭행(攝行)하였다.[『세종실록』세종 1년 12월 22일] 세종 초년에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자, 윤곤은 문관의 인사 행정을 맡아서 훌륭한 인재를 발탁하여 집현전 학사(學士)로 임명하여, 세종의 학문 연구에 이바지 하게 하였다.

1422년(세종 4) 3월 병으로 서울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났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세종이 조회와 저자를 3일 동안 정지하였고, 태상왕 태종은 깊이 애도(哀悼)하면서 그를 부원군(府院君)으로 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그 때 세종과 태종은 사냥하려고 행재소에 나가 있었는데, 태종이 육선(肉饍 : 고기 반찬)을 물리치니, 군신(群臣)들이 육선을 줄이지 말 것을 청하였다. 태상왕 태종이 이르기를, “왕이 대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감선(減膳 : 반찬을 줄이는 것)하는 것은 비록 고제(古制)에 없는 일이지만, 신하는 왕을 위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입으니, 왕이 신하를 위하여 3일 동안 육선을 먹지 않는 것도 옳지 않겠는가.” 하고, 대신이 죽으면 왕이 3일 동안 감선하는 법을 만들게 하였다.[『세종실록』세종 4년 3월 11일] 태종은 내관(內官)김중귀(金重貴)를 보내서 조문하고, 세종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세종실록』세종 4년 3월 15일, 세종 4년 3월 19일, 「윤곤행장」]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태조는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왕자 여섯을 얻었고, 신덕왕후(神德王后)로부터는 왕자 둘을 얻었다. 북방민족의 ‘말자(末子) 상속제(相續制)’에 따라 신덕왕후가 낳은 막내아들 이방석이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신의왕후가 낳은 왕자 여섯이 이에 반발하였으므로, 태조는 심복 정도전과 남은 등에게 세자를 보호하도록 특별히 조치하였다. 그러자 정도전은 왕자와 공신들의 사병을 해체하여 의흥 삼군부로 개편하려고 하였는데, 제5왕자 이방원이 가장 심하게 반발하였다. 그때 삼군부 판사이무는 정도전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정도전 및 남은 등이 장차 사병을 혁파하려는 계획을 이방원에게 알려주었다. 이방원은 제 4왕자 이방간 등과 상의하여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이방원의 참모 하륜(河崙)이 쿠데타를 계획하고, 심복 이숙번이 이방원의 처남 민무구 및 민무질 형제와 함께 군사를 동원할 방안을 강구하였다. 삼군부 판사이무도 민무구와 가까운 인척 관계였으므로, 이에 비밀리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무의 조카 윤곤과 윤목, 윤향 3형제도 이무의 사병에 속하였으므로, 제1차 왕자의 난에 참여하게 되었다.

1396년(태조 5) 8월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정치에 의욕을 잃고 건강마저 점점 악화되었다. 1398년(태조 7) 8월 정도전과 남은 일파는 진법(陣法) 훈련(訓鍊)을 강화한다는 핑계를 대고, 여러 왕자와 공신들의 사병에 대한 통수권을 해체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이방원은 태조의 병세가 위중한 틈을 타서, 한밤중에 궁중 쿠테타를 일으켜서 남산부터 개경의 수창궁까지 포위하였다. 윤곤과 윤목 형제도 군사를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다. 이방원은 이 모임에 참여한 이무의 첩보대로 남은의 첩 집에 모여 있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 등 10여 명을 일망타진하였다. 또 심복 마천목(馬天牧)을 보내어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 이방번 형제를 궁궐 밖으로 불러내어 체포한 후 함경도 적전(赤田)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나중에 모두 살해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1398년(태조 7) 9월 태조 이성계는 어쩔 수 없이 왕위를 제2왕자 이방과(李芳果)에게 물려주었다. 이에 이방원과 그의 심복 하륜 및 이숙번, 이무 등이 실권을 잡고, 조정에서 정도전과 남은 일파를 모두 제거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자, 이방원과 그의 일당 29명은 정사공신에 책훈되었고, 그 세력 기반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런데 정사공신 책훈에서 제외된 박포가 제4왕자 이방간을 사주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반란을 일으켰다. 이방원의 스승인 우현보(禹玄寶)가 그의 아들 우홍부(禹洪富)를 시켜서 사전에 이를 이방원에게 알렸다. 그러자 이방원은 하륜 및 이무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다. 1400년(정종 2) 1월 이방간과 이방원의 군사가 개성에서 시가전을 벌인 끝에 이방원이 승리하였고, 당시 윤곤과 윤목 형제도 군사를 이끌고 이 시가전에 참여하였다.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이다.

1400년 11월 정종은 마침내 왕위를 태종 이방원에게 물려주었으나, 태조는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을 보고 이방원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고향 함경도 함흥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때 태조는 이방번과 이방석이 귀양을 갔다는 함경도 적전으로 갔다. 그러나 두 왕자는 어디에도 없었고, 또 그들의 행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조는 이러한 사실에 대단히 분노하여, 아들 태종을 반드시 응징하겠다고 다짐하였다. 태종도 당황하여 하륜을 불러서 적전에 유배된 두 왕자를 죽인 것을 질책하고, 함흥으로 사자를 연달아 보내어 간곡히 잘못을 사과하였다. 그리고 태조에게 서울로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더욱 화를 내고 함흥에 오는 사신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나 모든 사자를 다 죽인 것은 아니고, 그의 절친한 친구 성석린과 무학대사 두 사람은 받아들였다. 그런데 태조는 그들의 간언(諫言)에 따라서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서 태종 일당을 쳐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하려고 하였다.

1402년(태종 2) 함경도 안변부사(安邊府使)조사의(趙思義)가 태조의 명령을 받고 반란을 일으켜서 평안도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였으나, 각 지방의 호응을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때 북청(北靑)에 은거하던 여진족 대추장 이지란(李之蘭 : 퉁두란 티무르)이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기 때문에 북쪽의 여진족을 불러들여 전쟁을 일으키기도 어려웠다. 마침 명나라의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가 남만주를 경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오랑캐족의 대추장 이만주(李滿住)와 오도리족의 퉁멍거(童猛哥) 티무르는 중국 명나라에 복속하여, 건주위(建州衛)가 남만주에 설치되었으므로, 조선의 지배가 남만주에 미치지 못하였다. 또 조선의 태종과 명나라 성조영락제는 왕자 때부터 만난 적이 있어서 서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윤곤과 윤곤의 4촌 유량 등 10여 명은 성석린을 통해 군대를 일으키면 이롭지 못한 이유를 자세히 진달하였다. 그리고 이원(李原)・남재(南在)・정희계(鄭熙啓) 등 7, 8명은 무학대사를 통해서 태조를 만나서 온화한 말과 완곡한 뜻으로 비유를 들어가며 태조의 분노를 풀고자 하였다. 이에 태조가 마음을 풀었다.

성품과 일화

윤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모습은 풍채(風彩)가 좋았고, 성품은 너그럽고 후덕하였다. 공신으로서 끝까지 목숨을 보존하고 부귀를 누렸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복노인[福翁]”이라고 일컬었다.[『세종실록』세종 4년 3월 11일]

1400년(태종 즉위년) 1월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이 즉위하는 것을 도운 공으로 추충익대(推忠翊戴)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고, 파평군으로 봉해졌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1 잡저] 1401년(태종 1) 1월 태종이 윤곤의 좌명(佐命)한 공(功)을 기록하여 4등으로 하고, 하교(下敎)하기를, “지난날에 역신(逆臣) 박포가 왕가를 해칠 마음을 품고, 몰래 회안군이방간 부자를 부추겨서 우리 형제의 골육(骨肉)을 해치려고 꾀하였다.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서 대궐로 향하게 되자, 그들은 흉악한 짓을 자행하여 종사(宗社)의 안위(安危)가 한 순간에 달려 있었다. 우군 동지총제윤곤 등 12인은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를 막는 등 여러 번 충성을 바치어 왕가를 익대(翊戴)하고 천명(天命)을 좌명하였다. 그러므로 3등으로 칭하(稱賀)하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부인은 1등을 초자(超資 : 품계를 뛰어넘는 것)하여 책봉한다. 직계 아들은 1등을 초자하여 음직(蔭職)을 제수하고, 직계 아들이 없는 자는 조카와 사위를 음직을 제수한다. 전지(田地) 80결(結)과 노비(奴婢) 8구(口), 2품 이상은 백은(白銀) 25냥, 3품 이하는 은대(銀帶) 1요(腰), 표리(表裏) 1단, 내구마(內廐馬) 1필, 구사(驅使) 3명, 진배파령(眞拜把領) 6명을 주고, 처음으로 입사(入仕)하는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태종실록』태종 1년 1월 15일]

1400년(태종 즉위년) 12월 윤곤은 이직과 이현(李玄), 안윤시(安允時) 등과 함께 순군옥(巡軍獄)에 갇혔다. 처음에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윤곤과 이현 등이 명나라 조정에서 말 값의 수량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후 중국에서 사신으로 나온 축맹헌이 불평하기를, “말 값은 많이 주었는데, 지금 말의 숫자는 적다.” 하였다. 또 육옹(陸顒)도 말하기를, “이직우사(右使)가 우리 조정에 왔을 때에 말 값을 논의하기를, ‘상등 말은 단자(段子) 4필이고, 중등 말은 견(絹) 10필이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말 값이 어찌 이토록 비싼가.” 하였다. 이현이 말하기를, “우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하니, 육옹이 말하기를, “홍려시(鴻臚寺)에 들어가서 그 숫자를 썼는데, 그 문서가 지금도 있다.” 하였다.[『태종실록』태종 1년 12월 16일]

태종이 이를 듣고 총제이숙번 등에게 명하여 삼성(三省)에서 잡치(雜治 : 합동 취조)하게 하니, 윤곤과 이현이 모두 불복(不服)하였다. 안윤시가 말하기를, “이직과 윤곤이 홍려시에서 말 값을 논의하기를, ‘상등 말은 단자 4필이고, 견 10필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신이 그대로 썼습니다.” 하니, 윤곤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신 등이 그것을 잊었습니다.” 하였다. 이로 인해 윤곤은 파평(坡平)에 안치되었다. 처음에 삼성(三省)이 순군(巡軍)에 합좌(合坐)하여 그와 이직 등의 죄를 국문(鞠問)해서 아뢰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직과 윤곤은 모두 공신이니, 이직과 윤곤은 본향(本鄕)에 안치하고, 이현과 안윤시은 외방에 귀양 보내라.” 하였다.[『태종실록』태종 1년 12월 16일, 태종 1년 12월 18일] 당시 명나라 태조주원장(朱元璋)과 태종 영락제(永樂帝)는 북방 민족과 싸우는 데에 필요한 말을 조선에서 강제로 교역하였는데, 태조는 2차에 걸쳐 15,000필을 보냈고, 태종은 5차에 걸쳐 46,538필을 보냈던 것이다. 세종 초년에도 10,000필을 보냈다.

1406년(태종 6) 6월 공안부(恭安府) 판사박자안(朴子安)과 좌군 도총제윤곤 등 9명이 한꺼번에 관직을 파면 당하였다. 고려 때 유명한 중 혜경(惠敬)이란 자가 귀암사에 있을 때 그들의 조상이 노비를 한두 명씩 귀암사에 시주하였는데, 조선 초기에 그 숫자가 불어나서 수천 명에 이르렀다. 나라에서 배불(排佛) 정책을 취하여 절의 숫자를 줄이기 위하여 귀암사를 혁파하니, 박자안과 윤곤 등 9명이 그 노비를 조상들이 절에 시주한 물건[施物]이라고 하여 일찍이 관가에 소송하였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 옛날 노비를 돌려받아서 나누어 차지하였다. 그러나 대사헌허응(許應)이 귀암사 노비를 다시 속공(屬公)하도록 건의하니, 박자안과 윤곤 등이 의정부에 소송하기를, “허응도 또한 사손(使孫 : 후손) 노비가 있었는데, 다만 같이 소송에 참여하지 못하여 노비를 얻지 못한 까닭으로, 원망하여 속공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하였다. 사간원에서 그들을 탄핵하여 아뢰기를, “박자안과 윤곤 등이 일찍이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수교(受敎)한 일을 가지고, 마음대로 고소를 행하여 사헌부를 헐뜯었을 뿐만 아니라, 의정부도 능멸하였습니다. 또 혁파한 사사(寺社)의 노비는 비록 직계 자손이라 하더라도 다시 소송하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세대가 오래되고 멀어서 계통 관계를 밝히기 어려운 것을, 다만 지금 대변(對辨 : 상대하여 항변하는 것)하는 자가 없다고 하여 감히 소송하여 차지하였습니다.” 하고, 9명을 처벌하도록 주장하였다. 이에 노비를 차지한 박자안과 윤곤을 비롯하여 신유정(辛有定)과 문계종(文繼宗), 송득거(宋得琚) 등 9명이 모두 노비를 나라에 바치고 파직당하였다.[『태종실록』태종 6년 6월 26일]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정(昭靖)이다. 용모가 아름다운 것을 ‘소(昭)’라 하고, 마음이 너그럽고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고 하였다.[『세종실록』세종 4년 3월 11일] 묘소는 경기도 파주(坡州) 용지동(龍池洞)에 있고, 9대손 윤선거(尹宣擧)가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윤곤행장」]

첫째 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는 첨의정승(僉議政丞)유탁(柳濯)의 딸이고, 둘째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도평의(都評議)문열공(文烈公)한상질(韓尙質)의 딸이다. 유씨 부인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상호군(上護軍)윤희이(尹希夷)이고, 차남은 검교(檢校) 참의(檢參議)윤희제(尹希齊)이다. 한씨 부인은 아들 첨지(僉知)윤삼산(尹三山)을 낳았다. 또 측실(側室)에서 난 아들로 윤석노(尹石老)와 윤가노(尹加老), 윤석년(尹石年)이 있다.[「윤곤행장」]

윤곤과 윤목, 윤향 3형제는 태종이 집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비록 윤목은 민무구·민무질 옥사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으나, 윤곤과 윤향의 후손들이 크게 출세하거나 왕가와 혼인을 맺었다. 윤곤의 둘째아들 윤희제는 아들 5형제를 낳았는데, 맏아들 윤경(尹坰)의 아들이 성종(成宗) 때 영의정을 역임한 윤필상이고, 둘째 윤은(尹垠)의 아들은 이조 판서를 역임한 윤사로(尹師路)이다. 셋째 윤배(尹培)의 7대손은 성리학자 윤선거이고, 8대손은 소론의 영수 윤증(尹拯)이다. 또 윤곤의 셋째아들 윤삼산(尹三山)의 아들 윤호(尹壕)는 성종의 국구(國舅)로서 그의 딸 정현왕후(貞顯王后)가 중종(中宗)을 낳았다. 또 윤곤의 4촌 동생 윤번(尹璠)은 세조(世祖)의 국구(國舅)가 되어, 그의 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덕종(德宗)과 예종(睿宗)을 낳았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대동운옥(大東韻玉)』
  • 『동계집(桐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차원부설원록(車原頫雪寃錄)』
  • 『양촌집(陽村集)』
  • 『용재집(容齋集)』
  • 『춘정집(春亭集)』
  • 『호정집(浩亭集)』
  • 『모계집(茅溪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안차씨족보(延安車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