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덕록(楊德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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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3년(명종 8)~1635년(인조 13) = 8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학자이자 의병장. 1601년(선조 34)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봉해졌다. 자는 경유(景綏)이고, 호는 회헌(晦軒)이다. 본관은 중화(中和)이고, 거주지는 평양(平壤)이다. 아버지는 양연(楊淵)이고, 어머니 나주 나씨(羅州羅氏)는 나윤(羅倫)의 딸이다.

선조 시대의 활동

1588년(선조 21) 윤두수(尹斗壽)가 관서(關西)를 순찰하고 처음으로『평양지(平壤志)』를 편찬하였는데, 이때 평양에서 거주하던 양덕록(楊德祿)이 참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5월에 선조(宣祖)가 평양(平壤)으로 파천하자, 양덕록은 종질(從姪)인 생원(生員)양의직(楊懿直)과 함께 소(疏)를 올려 병란이 일어나게 된 까닭과 회복시킬 계책을 극력 진달하였다. 대가(大駕)가 의주(義州)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평양이 함락되자, 양덕록은 용봉촌(龍鳳村)에서 병졸 300여명을 모아 ‘적개군(敵愾軍)’이라 이름하고 노덕규(盧德珪)를 좌위장(左衛將)으로, 김효강(金效剛)을 우위장(右衛將)으로 삼고, 홍내범(洪乃範)과 조삼성(曺三省)은 양곡을 모아 수송하게 하였다. 잠진(箴津)에 주둔하여 가까운 이웃 고을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격문(檄文)을 전하고 의병을 일으키도록 격려하자, 전 판관(判官)장이덕(張以德)은 화원촌(花原村)에서 군사를 모았고, 전 부장(部長)고충경(高忠敬)은 광법동(廣法洞)에 진(陣)을 쳤다. 또한 중화(中和)의 임중량(林仲樑)은 서진(西鎭)을 제압하고, 강동(江東)의 조호익(曺好益)은 마탄(馬灘)에 진을 쳤는데, 소문을 듣는 곳마다 의병이 일어났다.[『화은집(和隱集)』 권7 「회헌양공행장(悔軒楊公行狀)」 이하 「양덕록 행장」]

당시 서윤(庶尹)남복흥(南復興)이 용강(龍岡)의 해곡(海曲)에 있었는데, 양덕록이 군사를 모으고 군량을 모으는 방법을 지적하여 진술하고 격려하니 남복흥은 그 계책을 따라 병졸 수천 명을 얻어 다섯 고을의 수령과 더불어 대보산(大寶山) 서쪽에 진을 쳤다. 양덕록은 군대를 이끌고 적교포(狄橋浦)에 진을 치고 세 고을의 요로(要路)를 제압하여 적병이 대동강(大同江) 서쪽을 침벌하지 못하도록 하였다.[「양덕록 행장」] 이어 1593년(선조 26) 1월 평양성 탈환을 위한 <평양성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명(明)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원병(援兵)을 이끌고 평양성 총공격을 감행하였는데, 양덕록은 잡약산(雜藥山)에 주둔하였다가 전투가 시작되자 함구문(含毬門)을 통하여 평양성으로 들어갔다. 평양 수복 후 선조가 도성으로 돌아가자 양덕록은 의병을 해산시켰다.[「양덕록 행장」]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생하자, 명나라의 경리(經理)양호(楊鎬)와 도독(都督)마귀(麻貴)가 와서 구원하였다. 그러나 공름(公廩 : 관청의 창고)이 거의 탕진되어 군량이 부족하였다. 이에 양덕록은 종질인 양의직과 친구 이학정(李鶴禎) 등과 더불어 의연곡(義捐穀) 3천석을 모아 군사를 먹였다.[「양덕록 행장」]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1598년(선조 31)에 양덕록은 예빈시(禮賓寺)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601년(선조 34)에 선무훈(宣武勳)에 녹권되어 원종(原從)으로 기재되었으며, 철권(鐵券)에 기록되었다.[「양덕록 행장」]

광해군~인조 시대의 활동

임진왜란 전에 큰형 양덕희(楊德禧)가 창광산(蒼光山) 아래에다 ‘학고당(學古堂)’이라 이름 지은 서숙(書塾)을 만들고 생도(生徒)를 모아 글을 익히게 하였다. 양덕록은 관찰사(觀察使)김계휘(金繼輝)에게 청원하여 그 서숙을 조금 넓혀서 ‘홍범서원(洪範書院)’이라 이름하고 태사(太師 : 기자(箕子))를 존봉(尊奉)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리하여 1594년(선조 27) 이원익(李元翼)에게 옛 서원을 중건(重建)하도록 청원하였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사액(賜額)을 청원하였다. 이에 인조는 ‘인현서원(仁賢書院)’이란 이름을 내렸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1년 10월 9일,「양덕록 행장」]

한편 1610년(광해군 2)에 양덕록은 58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617년(광해군 9)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는 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양덕록이 통탄(痛歎)하며 신자(臣子)로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하여 바로 이륜(彛倫)의 중대함과 효도와 자애의 도리를 담은 소를 작성하였으나, 병이 나서 실제로 올리지는 못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항복이 인목대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함경남도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자 북청까지 가서 안부를 살폈으며, 그해 5월 이항복이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는 경기도 포천(抱川)까지 가서 그의 장례에 참석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10년 1월 6일, 광해군 10년 5월 13일, 「양덕록 행장」]

인조가 즉위하던 1623년(인조 1) 양덕록은 태사의 화상(畵像)을 서원에 봉안하도록 청원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일이 많은 때를 당하여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도보로 왕래하며 혼자서 일곱 차례 소를 올렸다. 예조 판서(判書)이정귀(李廷龜)가 그 성의에 감복하였고, 조정에서 특별히 이신흠(李臣欽)을 파견하여 태사의 유상(遺像)을 본떠서 그려 서원에 봉안하게 하였다. 이런 가운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청(淸)나라 군사가 평양성을 핍박하였다. 양덕록은 75세의 고령으로 직접 집안의 종들과 생도를 거느리고 문묘에 들어가 각위(各位)의 사판을 등에 져내어 후미진 곳으로 피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격문을 온 도(道)에 전달하여 의기(義氣)를 고동(鼓動)시키고자 하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청나라 사람들이 화친을 맺고 돌아갔기에 그 일을 그만두었다.[「양덕록 행장」]

한편 양덕록은 항상 관서(關西) 지역이 조정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인심이 억울해 한다고 여겼으므로,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628년(인조 6)에는 평안도와 관련된 폐단을 알리고자 인조에게 상소를 올렸으며, 1632년(인조 10)에는 구언(求言)의 분부로 소를 올려 다시 한 번 관서 지방 사람들을 대변하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6년 4월 1일, 「양덕록 행장」] 여기에서 양덕록은 소세양(蘇世讓)이 관서 지방의 사람들이 청환직(淸宦職)으로 진출 하는 것을 막은 전말과 평안도 사람들이 임진왜란 당시 보인 충의(忠義)의 실적을 낱낱이 진달하였다.[「양덕록 행장」] 이 상소로 평양 출신 황윤후(黃胤後)가 청현직(淸顯職)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양덕록은 전옥서(典獄署)참봉(參奉)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11년 11월 13일] 그리고 얼마 후인 1635년(인조 13) 11월 28일 평양 인현리(仁賢里)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3세였다.[「양덕록 행장」]

성품과 일화

어려서부터 영리했고, 크면서 영특한 모습이 남달리 밝았다.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어머니의 교육이 매우 법도가 있어 항상 학문을 권면하였지만 의기(意氣)를 믿고 장난을 좋아하며 기꺼이 나아가 배우기를 힘쓰지 않았다. 13살이 되자 훤칠하게 키가 크며 힘도 세고 용맹을 좋아하여 항상 이웃의 아이 10여 명을 데리고 산림과 늪 사이를 노닐었는데, 늑대를 만나면 때려 죽여 메고 돌아왔다. 이에 어머니가 책망하기를 “네가 일찍이 네 아버지를 여의고 가르칠 사람이 없어 짐승처럼 자라 시서(詩書)에 힘쓰지 않고 감히 이렇게 호랑이처럼 사나운 짓을 하면서 유독 부모가 물려준 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느냐?” 하였다. 이 말에 크게 뉘우치고, 이때부터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학문에 힘써 책을 읽은 지 세 번의 여름과 겨울이 바뀌자 경전(經傳)과 사기(史記)의 은미한 내용과 심오한 뜻을 칼로 실을 자르듯 분석하였다. 매번 향시(鄕試)에서 좋은 성적을 차지하였으므로, 향리에서는 모두 크게 드날릴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스스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성리학 외에도 장자(莊子)와 노자(老子)를 비롯한 제자(諸子)의 학문도 공부하였으며, 특히 손자(孫子)와 오기(吳起)의 병술(兵術)을 좋아하여 군진[戎陣]과 병법[韜鈐]에 정통하였다.[「양덕록 행장」]

양덕록은 타고난 성품이 바르고 올곧으며 장엄하고 정중하였다. 도량[器度]은 밝아서 사리에 통달하고 거대 웅장하며 위의(威儀)는 온화하고 엄숙하며 법도는 정교하고 치밀하여 규문(閨門) 안이 엄숙하기가 조정의 의례와 같았다. 그리고 마음가짐과 자신의 행동은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성실과 신의로 근본을 삼았고 사물을 접하고 일을 처리하면서는 너그러움과 인자함, 강인함과 용맹으로 기준을 삼았다. 또한 의(義)를 보면 곧장 실행하면서 그 이해(利害)와 화복(禍福)을 따지지 않았고, 다른 사람이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이 자신의 도리를 다하였다.[「양덕록 행장」] 그리하여 임진왜란 당시에도 자신의 공을 전혀 내세우지 않았으나, 이원익과 이항복(李恒福) 등은 양덕록을 국사(國士)로 대우하였으며, 관직에 임명하는 명이 내려졌을 적에는 출사를 권면하기도 하였다.[「양덕록 행장」]

한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양덕록은 어디든지 쓰이는 인재라고 여겼는데, 그의 문장이 여유가 있고 화려하며 필체가 물 흐르듯 함을 보고는 문장을 하는 선비라고 일컫고, 그의 단정하고 공손하며 대범하고 의젓하면서 법도를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는 예법을 지키는 선비라고 일컬으며, 그의 군진[戎陣]이 정돈되고 엄숙하며 계책이 넓은 것을 보고는 지혜롭고 의리가 있는 장수라고 일컬으니, 이는 모두 그에 대하여 대강과 얕은 곳을 보거나 알았을 뿐이다. 평소 실질적인 공부는 성학(性學)에서 얻어졌으며 그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며 고장과 국가에 신의를 지키며 성인(聖人)을 높이고 도(道)를 호위하며 유교를 도운 것은 경학(經學)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순연하게 유자(儒者)의 심법(心法)을 지니고 일을 시행하여 관서 부자(關西夫子)로 일컬어졌다.[「양덕록 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평양부(平壤府) 서쪽 시산(匙山)에 있다. 이시항(李時恒)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화은집(和隱集)』 권7 「회헌양공행장(悔軒楊公行狀)」]

한편 양덕록의 첫째 부인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박순유(朴淳儒)의 딸인데, 자식이 없었다. 둘째 부인은 울진 임씨(蔚珍林氏)로 임방로(林邦老)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양의시(楊懿時)인데, 양덕록의 상중(喪中)이던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을 때 쳐들어온 적들이 쇠고기를 부담시키고자 잡아갔으나, 포로가 되어 구차하게 삶을 이어갈 수 없다며 적을 꾸짖는 바람에 결국 살해당하였다. 딸은 최달운(崔達雲)에게 시집갔다.[「양덕록 행장」]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화은집(和隱集)』
  • 『기년편고(紀年便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