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윤후(黃胤後)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87년(선조20)∼1648년(인조26) = 62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희적(希迪), 호는 월저(月渚)이다. 본관은 황주(黃州)이고, 주거지는 평양이다. 아버지는 이천부사(利川府使)황응성(黃應聖)이고, 어머니 장연노씨(長淵盧氏)는 증 한성부우윤노유(盧濡)의 딸이다. 금평군(錦平君)이의수(李義壽)의 사위다.

광해군 후기~인조 초기 활동

1613년(광해군5) 진사시(進士試)에 1등, 생원시(生員試)에 3등으로 사마시 양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대과에는 거듭 실패하여, 음보(蔭補)로 순릉(順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 1625년(인조3) 39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평안도 지방이 위험해지자, 가족들을 바닷가로 피신시킨 다음, 가동(家童)과 이웃 장정들을 모아 평안도절도사 군영(軍營)으로 갔다. 그러나 후금(後金)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화친(和親)을 맺고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1628년(인조6)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 1629년(인조7)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되어 행 황해도도사(行黃海道都事)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1630년(인조8) 공조 정랑과 호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10) 무장현감(茂長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호조 정랑을 거쳐 예조 정랑으로 옮겼다가, 순천군수(順川郡守)로 나갔다. 1634년(인조12)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문학과 필선으로 승진하였는데,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여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편수에 참여하였다.

인조 후기 청나라 방비와 교섭

1635년(인조13)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임명되었다가, 행 용양위 부호군을 거쳐 성균관 사예로 옮겼다. 1636년(인조14) 황해도관찰사의 좌막(佐幕)으로 나갔다가, 평안도 구성부사(龜城府使)에 임명되어, 원수(元帥)의 종사관이 되었다. 그해 겨울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는데, 청(淸)나라 칸 홍타지는 의주성 · 평양성 등을 피해 서울로 직행한 다음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를 포위 공격하였다. 황윤후가 근왕(勤王)하고자 하였으나 원수는 허락하지 않고, 그가 군사 업무에는 익숙하지 못하다며 본부(本府)로 돌아가 성루(城壘)를 지키게 하였다. 그는 평안도 병력을 영변(寧邊)철옹성(鐵甕城)으로 옮기고 둔창(屯倉)의 곡식들을 재빨리 성 안으로 운반하여 식량을 준비하였다. 삼전도(三田渡)에서 인조가 항복을 하고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맺었다. 그는 제대로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비분강개하였다. 1638년(인조16)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으나 구성부사에 연임되었다. 그가 선정을 베풀고 방어를 철저히 하자, 사람들이 그를 ‘고려 시대 박서(朴犀)’에 비유하여 칭송하면서 그의 유임을 간청하였기 때문이다. 구성 사람들은 그가 떠난 뒤에 쌍비(雙碑)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1640년(인조18)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임명되고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를 겸임하였다. 당시 의주에는 청나라가 조선을 압박하기 위해 병력을 일부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해 4월 황윤후는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의주 나루에서 배웅하였는데, 세자 일행 중 압록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져죽은 사람이 생겼다. 세자시강원 빈객이행원(李行遠)은 황윤후가 배를 잘 정비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이라고 조정에 아뢰었다. 비변사에서 그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사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그를 비호하였다. 1641년(인조19) 순천부사(順天府使)에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고 방어를 공고히 하였다. 1644년(인조22) 원주목사(原州牧使)와 1645년(인조23) 공조 참의를 거쳐 1648년(인조26)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병으로 인하여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도 못하고 4월 25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2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윤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생김새가 단아하고 해맑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장중하고 영특하며, 신중하고 말수가 적었다. 3살때 어머니를 여의자, 할머니 이씨(李氏)의 친정 조카 이원련(李元璉)이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를 데려다가 기르면서 교육하기를 마치 친자식처럼 하니, 황윤후도 그를 친부모처럼 섬겼다. 어려서 이웃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아이들이 참외서리를 하였는데, 황윤후는 혼자서 꼼짝하지 않고 자리에 있었다. 이것을 보고 집의 종이 기특하게 여겨 그릇에 과일을 담아서 가져다가 주니, 그때에야 비로소 안심하고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이때 사람들은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임을 미리 알았다. 집에서 거처할 때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과 의복을 반듯하게 갖추어 입고 지냈으므로, 집안이 마치 조정과 같이 엄숙하였다. 일이 없이 한가로이 지낼 때에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잠자코 그 내용을 음미하느라고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릴 때에는 은혜로 아랫사람들을 대하고, 친구를 만나면 진실하고 화락하게 대하여 은혜를 베풀고 의리를 다하였다. 조정 관리의 잘잘못과 고을 사람의 장단점을 일체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여색(女色)에 대한 경계가 더욱 엄하였다.

그는 뜻을 독실하게 가지고 원대한 도학(道學)의 연구에만 힘을 기울일 뿐, 문장을 아름답게 꾸미는 문학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젊어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여 경전(經傳)과 성리서(性理書)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특히 『논어(論語)』에 더욱 힘을 쏟아서, 반드시 성현(聖賢)이 가르친 뜻을 그대로 실천하였으므로 그가 행동하는 것은 모두 예법에 맞았으며, 일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 사리에 맞았다. 그가 만년에 관서(關西) 지방에서 근무할 때 충(忠) · 효(孝) · 염(廉) · 검(儉)의 글자로써 몸을 보호하는 병부(兵符)를 만들었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관서부자(關西夫子)’라고 일컬었다. 글을 많이 지었으나, 평소 뜻이 겸손하여 문필가(文筆家)로 자처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은 글은 대부분 흩어져서 없어지고 수집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만, 중국 사신을 접대하면서 수창(酬唱)한 시(詩)들이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평안도 평양 북쪽 자화산(慈化山)화원동(花原洞)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행장이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34)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 금평군(錦平君)이의수(李義壽)의 딸로, 자녀는 5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황대요(黃戴堯)는 사마(司馬)를 지냈고, 차남 황대순(黃戴舜)은 생원이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화당집(化堂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수촌집(水村集)』
  • 『지호집(芝湖集)』
  • 『한포재집(寒圃齋集)』
  • 『청성집(靑城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노암집(魯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