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세(沈命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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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7년(선조 20)∼1632년(인조 10) = 4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형조 좌랑(佐郞)과 공조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자는 덕용(德用)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심엄(沈㤿)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판(參判)심의겸(沈義謙)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이다. 어머니의 친언니가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인조시대 활동

심명세(沈命世)의 형인 심정세(沈挺世)는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언니와 혼인을 하였는데,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 당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추대에 참여하였다는 죄명으로 고문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5년 5월 18일, 광해군 5년 5월 24일] 그러면서 심명세의 집안도 화(禍)를 당하였고, 이에 심명세는 과거 공부를 버리고 객지로 떠돌아 다녔다.[『계곡집(谿谷集)』 권14 「청운군심공신도비명(靑雲君沈公神道碑銘)」 이하 「심명세신도비명」으로 약칭] 그런 가운데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인조의 이종 사촌이었던 심명세는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고, 이를 인정받아 형조 좌랑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7일, 인조 1년 3월 25일, 인조 10년 4월 4일] 이어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 53명을 녹훈하였는데, 심명세는 김류(金瑬)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으며, 아울러 청운군(靑雲君)에 봉해졌다.[『인조실록』인조 1년 윤10월 18일, 인조 1년 윤10월 19일,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이 발생하자 심명세는 운검(雲劒)이 되어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난이 진압된 후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공조 참판으로 호위장(扈衛將)을 겸하였고, 어영부사(御營副使)를 역임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2년 7월 29일, 인조 2년 10월 11일, 「심명세신도비명」] 이듬해인 1625년(인조 3) 세자빈(世子嬪)을 책봉하였는데, 이때 인조는 윤의립(尹毅立)의 딸을 3차 간택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묵재일기(黙齋日記)』 권2 「편당논변(偏黨論辨)」] 그런데 윤의립의 사촌 오빠인 윤인발(尹仁發)이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였고, 아버지인 윤의립도 역모와 연루되어 면직을 당한 적이 있었다.[『인조실록』인조 3년 7월 28일] 이러한 이유를 들어 심명세는 김자점(金自點)과 함께 윤의립의 딸을 세자빈으로 간택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인조도 공의(公義)를 꺾을 수 없어 마침내 이 혼인은 중단되었다.[『인조실록』인조 3년 7월 28일, ] 이러한 과정에서 심명세는 인조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오만하였다고 하여, 충주(忠州)로 유배되었다.[『인조실록』인조 3년 8월 27일, 「심명세신도비명」] 이후 사간원(司諫院)을 비롯하여 신흠(申欽) 등이 그의 죄를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3년 8월 29일, 인조 3년 9월 6일]

1626년(인조 4)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해 4월 인조는 심명세가 유배를 간지 1년이 되어가는데다가, 인헌왕후가 조카들 가운데 심명세를 가장 아꼈다며 해배한 후에 회장(會葬)에 참여하게 하였다.[『인조실록』인조 4년 1월 14일, 인조 4년 4월 11일] 이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발생하자, 심명세는 훈봉(勳封)이 회복되면서 호위장을 겸하였고, 강화도에서 환도한 후에는 내섬시(內贍寺)제조(提調)가 되었다.[「심명세신도비명」] 그리고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으며, 이후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1630년(인조 8) 선조(宣祖)의 묘소인 목릉(穆陵)에 물이 찬다며 옮길 것을 주장하여 이에 대한 논의를 끌어냈다.[『인조실록』인조 6년 9월 26일, 인조 8년 2월 4일, 인조 8년 2월 30일] 그러나 목릉을 천장(遷葬)하는 과정에서 목릉에 물이 차지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등에서 심명세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인조는 능 위에 물이 있었던 사실을 알린 것이므로 벌을 줄 수 없다며 따르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8년 7월 13일, 인조 8년 11월 24일, 인조 8년 12월 3일, 인조 8년 12월 4일] 한편 심명세는 원주목사를 역임할 때부터 해수(咳嗽)를 앓았는데, 병이 더 심해지더니 1632년(인조 10) 4월 4일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인조실록』인조 10년 4월 4일, 「심명세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심명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사람됨이 조금 고지식하나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였다. 일을 당하여서는 반드시 자기 견해를 고집하였는데, 사람들이 혹 이를 따르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0년 4월 4일] 또한 그 자질과 성품이 밝고 명석하였으며, 곧았고 행의(行誼)가 독실하였다. 계축옥사로 인해 둘째 형인 심정세가 죽고, 맏형인 심광세(沈光世)도 옥사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게 되는 사상(死喪)이 이어지자, 심명세는 그 가족들을 거두어 보살피며, 가사를 경영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너무 슬퍼하여 몸을 상하기를 예에서 보다 더 하였다고 한다. 또한 광해군(光海君) 대에 인조의 동생 능창군(綾昌君)이 유폐되었다가 사망하였을 때, 핍박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친척들이 문상조차 하지 않았으나, 심명세는 직접 염까지 하여 묻어 주었다. 그리하여 원종(元宗)이 그 신의(信義)에 감동하여 항상 눈물을 흘렸다고 전한다.[「심명세신도비명」]

또한 심명세는 재물을 가벼이 여겨 급한 사람의 액란(厄難)을 보살펴 주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을 화에서 구해주고도 자신은 덕을 베푼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왕실과 가까운 척족의 신분으로 인조를 보좌하는 데 더욱 분발하고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일을 만나면 강직한 말과 의논을 하였고, 나무라고 꾸짖는 것은 권귀(權貴)한 이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였다고 한다. 한편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감히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것도 심명세는 서슴없이 다 하였다고 전한다.[「심명세신도비명」]

후손 및 묘소

심명세의 묘소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홍호리에 있으며, 장유(張維)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심명세의 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는 정랑(正郞)이유청(李幼淸)의 딸인데, 1남 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그래서 막내 동생인 심희세(沈凞世)의 아들 심격(沈格)을 후사로 삼았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복집(愚伏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