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申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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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6년(현종 7)∼1734년(영조 10) = 69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의 유생(儒生) · 유일(遺逸). 초명은 신관(申綰)이다. 희릉(禧陵)봉사(奉事)를 지냈다. 자는 군미(君美)이고, 호는 묵암(黙庵)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신여규(申汝逵)이고,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인데 석봉(石峯)한수(韓修)의 현손이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숙종 ~영조 시대 활동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서, 남인(南人)권대운(權大運) · 목내선(睦來善) 등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의 영수 우암송시열을 제주도에 유배하였다. 이때 신구(申球)는 우암의 제자들과 함께 송시열의 석방을 간곡히 상소하였으나, 숙종은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숙종은 이듬해 6월 송시열을 재조사하기 위하여 서울로 압송하다가, 정읍(井邑)에서 송시열을 사사(賜死)하였다. 신구는 송시열의 제자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죽고 난 다음에도 노론(老論)의 선봉장이 되어 남인과 소론(少論)과 상대하였다. 그는 남인이 지배하는 조정에 벼슬하고 싶지 않아서, 집안에 은거하여 학문 연구에만 전심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남인들이 물러나고, 서인들이 집권하였다. 그러나 남인의 처벌을 둘러싸고 강 · 온 양파로 나누어졌는데, 송시열 계열의 노론은 송시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였고, 윤증(尹拯) 계열의 소론은 앞으로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그 앞서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비문(碑文) 때문에 스승인 송시열과 서로 시비(是非)를 벌이다가 마침내 원수가 되었다. 송시열의 젊은 제자들은 윤증을 많이 지지하였으나, 신구는 오로지 스승 송시열을 위하여 노론의 선봉장이 되어서 소론의 윤증을 공격하였다.

1720년 6월 경종이 즉위하자,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지지하는 노론 사이에 정권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1722년(경종 2) 김일경(金一鏡)의 <신임옥사(辛壬獄事)>에 의하여,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老論) 4대신(大臣)’이 죽음을 당하고 노론이 모두 추방되었는데, 이때 신구도 거제도(巨濟島)로 유배되었다. 연잉군이 즉위할 때까지 거제도에서 4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그의 소론에 대한 투지와 스승 송시열에 대한 지조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함께 귀양 간 사람들도 경의를 표하여 말하기를, “명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명망에 걸 맞는 실제 힘이 있다.” 하였다.[『도곡집(陶谷集)』 권18 「희릉봉사 신공 묘지명(禧陵奉事申公墓誌銘)」]

1724년 8월 왕세제 연잉군이 즉위하여 영조(英祖)가 되었다. 1725년(영조 1) 1월 귀양 간 유생 신구 · 윤현(尹俔) 등을 석방하라고 왕명이 내려져서,(『영조실록』 영조 1년 1월 13일) 귀양지에서 비로소 석방되어 돌아왔다. 신구는 바로 영릉(英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다가 희릉(禧陵)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이 일어나서, 마침내 소론이 쫓겨나고 노론이 정권을 잡았다. 그는 벼슬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유일(遺逸)로 남았다. 집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중요한 국사(國事)에는 반드시 참여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1734년(영조 10) 3월 15일 서울 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69세였다.[『도곡집』 권18 「희릉봉사 신공 묘지명」]

숙종 때 서인과 남인의 당파 싸움

조선 시대 가장 당쟁이 격화된 시기는 숙종 시대였다. 숙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효종과 현종 때 추진하였던 <북벌(北伐) 정책>은 청(淸)나라의 성조(聖祖) 강희제(康熙帝) 시대를 맞아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북벌을 위하여 효종이 발탁한 송시열은, 현종 시대에 청(淸)나라에서 강신(强臣)이라고 일컬을 만큼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송시열의 신권(臣權)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숙종은 궁중의 후궁 장희빈(張禧嬪)최숙빈(崔淑嬪)에 대한 애정 관계를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정권 싸움과 연계시켰다. 장희빈이 낳은 경종과 최숙빈이 낳은 영조를 후사(後嗣)가 되는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 대립하여, <기사환국> ·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경종과 영조 때는 소론과 노론이 대립하여, <신임옥사(辛壬獄事)>와 <정미환국>이 일어났다. 이러한 모든 옥사는 숙종의 신중하지 못한 처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1688년(숙종 14) 숙종이 총애하던 후궁 장소의(張昭儀)가 아들을 낳았는데, 이듬해 숙종은 그 아들을 원자(元子)로 삼으려고 하자,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영의정김수흥(金壽興) · 대사간(大司諫)최규서(崔奎瑞) 등은 중전 인현왕비(仁顯王妃)가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원자를 낳을 수 있으므로 후궁의 소생을 원자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숙종은 종묘(宗廟) · 사직(社稷)을 위해서 늦출 수 없다고 하여 원자로 정하고 생모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높였다. 1689년(숙종 15) 숙종은 이에 적극 반대하던 송시열 · 김수흥 · 민유중 등 서인들을 축출하고 권대운 · 목내선 · 김덕원(金德遠) · 민암(閔黯) 등 남인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듬해 제주도에 유배되었던 송시열은 다시 조사를 받으려고,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에 정읍에서 사약(賜藥)을 받고 죽었다. 김만중(金萬重) · 김수항(金壽恒) 등도 죽음을 당하였다. 그해 4월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하려고 하자, 이때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노론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그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 · 오두인 등이 모두 유배되었다. 그해 5월 인현왕후를 폐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당시 남인 정권은 서인의 사상적 원류가 되는 율곡(栗谷)이이(李珥)와 우계(牛溪)성혼(成渾)을 문묘(文廟) 배향(配享)에서 축출하였다. 신구는 여러 유생(儒生)들과 함께 상소하여 출향(黜享)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신구는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유생에 머물고 있었으나, 나이가 24세로서 숙성하여 유생들 가운데 소두(疏頭) 곧 상소의 주동자가 되어 상소를 통하여 사림(士林)의 여론(輿論)을 숙종에게 전달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당파 싸움에서 각 당파는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들의 상소문을 통하여 자기들의 주장을 왕에게 바로 전달하였다. 조선 시대 우문(右文) 정책에 의하여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는 우대하여, 왕이 반드시 읽어보고, 그에 대한 조처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숙종은 후궁 가운데 최숙빈을 사랑하여 연잉군을 낳게 되었는데, 장희빈은 이를 질투하다가, 숙종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694년(숙종 20) 노론의 김춘택(金春澤)과 소론의 한중혁(韓重赫) 등이 폐비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남인의 실권자 민암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 운동의 주동자들을 잡아서 심문하고 숙종에게 보고하자, 숙종은 태도를 바꾸어 인현왕후를 복위하게 하고, 장희빈을 폐위해서, 별궁(別宮)에 유폐하였다. 또 훈련대장(訓練大將)에 신여철(申汝哲)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윤지완(尹趾完)을 임명하여 권대운 · 민암 등의 남인을 몰아내고,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동평군(東平君)이항(李杭)을 잡아서 심문하고 처형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고 남인은 몰락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숙종은 송시열을 싫어하였으므로, 옥사 후에 영의정에 남구만(南九萬)을, 좌의정에 박세채(朴世采)를, 우의정에 윤지완을 각각 임명하여, 소론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노론의 신구는 소론의 견제를 받아서 서인의 집권한 시대에도 등용되지 못하였다.

경종 · 영조 교체 시기에 소론과 노론의 당파 싸움

원래 소론의 영수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절친한 친구인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송시열의 사랑하는 수제자가 되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윤선거는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에 피난을 갔는데, 예친왕(睿親王)도르곤의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그 부인과 아이들은 모두 죽고, 윤선거만 살아서 돌아왔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혼자서 살아남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또 일찍이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예송(禮訟) 논쟁을 벌였을 때 윤선거가 윤휴와 절교하지 않았던 것도 유감으로 여겼다. 1673년(현종 14) 윤선거가 죽자, 아들 윤증이 아버지의 연보와 박세채가 쓴 행장(行狀)을 가지고 가서 송시열에게 아버지 묘지명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시열은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묘지문을 쓰면서 윤선거의 행적을 좋지 않게 썼다. 이 일로 1673년부터 송시열과 윤증은 서로 갈라져서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하였다. 송시열은 고집이 세고 완고하였으므로, 송시열의 젊은 제자들은 윤증의 편에 가담하여 소론이 되었다. 그러나 신구는 스승 송시열의 편에 서서 노론이 되어서, 소론을 공격하는 데에 앞장섰다. 신구는 권상하(權尙夏)처럼 벼슬에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서 유생을 동원하여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또 노론의 의론과 주장을 조정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남인의 처벌을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였는데, 송시열 계열의 노론은 송시열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였고, 윤증 계열의 소론은 앞으로 정국의 안정을 위하여 온건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1716년(숙종 42) 7월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문집(文集)을 간행하였을 때 신구는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유생 60명을 동원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소두가 되어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을 논란하여 그들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윤선거의 문집을 훼판(毁版)하도록 요구하였다. 신구는 그 문집의 내용 중에서 윤선거가 효종을 모독하고 욕보인 사실을 찾아내어 극력 논박하였다. 이보다 앞서 며칠 전에 신구는 출판된 윤선거의 문집을 숙종에게 바치고, 그 문집 안에 효종을 무함한 내용이 들어 있으므로 숙종이 문집을 보고난 뒤에 이 일을 처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신구의 상소에서 말의 논리가 앞뒤가 서로 부합하였기 때문에, 숙종이 그 상소를 받아들여 윤선거의 관작을 추가하여 삭탈하고, 윤선거의 문집을 폐기처분해버렸다. 이때부터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이 그에게 큰 원한을 품게 되었다.[『도곡집』 권18 「희릉봉사 신공 묘지명」]

한편 <기사환국> 이후 연잉군을 낳아서 숙종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던 최숙빈은 아들의 장래를 위하여 노론의 보호가 필요하였다. 1720년 6월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33세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경종은 나이가 들었으나 자식이 없었으므로, 노론은 최숙빈의 아들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아 소론을 누르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계획하였다. 1721년(경종 1) 노론은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고, 병약한 경종을 대신하여, 왕세제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강행하려고 하였다. 소론의 김일경은 노론의 대리청정 주장을 경종에 대한 불충(不忠)이라고 탄핵하고, 소론의 조태구(趙泰耉)가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상소하여 왕세제의 대리청정도 취소되었다. 1722년(경종 2) 목호룡(睦虎龍)이 노론이 숙종 말년부터 경종을 제거할 음모를 꾸며왔다고 고변(告變)하여, 노론의 4대신 김창집 · 이이명 (李頤命) · 이건명(李健命) · 조태채(趙泰采) 등을 체포하여 죽이고 노론을 모두 조정에서 축출하였다. 이 사건이 신축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이를 <신축옥사>라고하고, 또 옥사가 신축년(1721년)부터 임인년(1722년)까지 8개월간 계속되었으므로 <신임옥사>라고도 한다.

1727년(영조 3) 영조는 소론의 김일경 · 목호룡 등을 죽이고 노론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는데, 이것이 <정미환국>이다. 이리하여 노론이 마침내 정권을 잡았으나, 정권에서 축출된 소론은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일으켜서 노론에 항거하였다. 경종이 연잉군이 올린 음식[게장]을 먹은 후에 승하하였기 때문에 영조는 평생 형 경종을 독살하였다는 혐의와 비난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또 영조는 어머니 최숙빈이 궁중 무수리이라는 출신상의 멍에를 지고 살았다. 영조는 4색 당파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펴서, 나름 정치적 안정을 이루는 데에 성공하였다. 신구는 1734년(영조 10)까지 살았는데, 그 동안 노론의 영고(榮枯) 성쇠(盛衰)를 겪으면서 스승 송시열에 대한 변함없는 지조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조정 밖에서 노론의 버팀목 구실을 하였다.

성품과 일화

신구는 큰 키에 날씬하고 위엄이 있으며, 성품이 고상하고 강직하였으며 용모에 위엄이 서려 남이 범(犯)할 수 없는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농암(農巖)김창협(金昌協)이 일찍이 그를 만나보고, 자제들에게 경계하기를, “신군(申君)은 성격이 준엄하고 강직한 사람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소홀히 대하지 말라.”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신구는 그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죽(粥)도 잇대지 못하였지만, 털끝만큼도 남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조상의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하려고 힘쓰며, 친족들과의 정의도 돈독하여 생활이 궁핍한 가운데도 도와주려고 애썼다. 그의 지극한 효도와 우애의 행실은 세속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가 없었으므로, 향리(鄕里)의 사람들이 그를 만나면 옷깃을 여미고 존경하며, 유일(遺逸)로서 추대하고, 그 효성과 우애에 감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도곡집』 권18 「희릉봉사 신공 묘지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洲) 백양곡(白羊谷)에 있는데, 도곡(陶谷)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18 「희릉봉사 신공 묘지명(禧陵奉事申公墓誌銘)」]

결혼은 세 번 하였는데, 부인 오씨(吳氏) · 최씨(崔氏) · 권씨(權氏)에게 모두 아들이 없어서, 형의 아들 신징하(申徵夏)를 양자로 삼았다. 둘째 부인 최씨에게 두 딸이 있는데, 장녀는 민진하(閔鎭夏)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진사(進士)이중욱(李重郁)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영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당의통략(黨議通略)』
  • 『겸재집(謙齋集)』
  • 『곤륜집(昆侖集)』
  • 『대산집(臺山集)』
  • 『동계집(東溪集)』
  • 『몽와집(夢窩集)』
  • 『백하집(白下集)』
  • 『병계집(屛溪集)』
  • 『서당사재(西堂私載)』
  • 『여호집(黎湖集)』
  • 『오천집(梧川集)』
  • 『정암집(貞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