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가노부(法駕鹵簿)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국왕의 행차 목적지와 주재하는 행사 및 의식의 중요도에 따라 구분된 행행 의장.

개설

법가노부(法駕鹵簿)는 의장(儀仗)의 한 종류이지만, 법가(法駕)는 의장 이외에 왕의 행차와 왕이 탄 가마, 혹은 왕비(王妃) 및 대비(大妃)의 가마를 상징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중종대 홍문관에서는 국왕의 거둥은 언행(言行)에 법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법가’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법가노부와 법가를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 정조대 화성 원행(園行)시 자궁(慈宮)인 혜경궁(惠慶宮)의 가마를 ‘법가’라고 칭하기도 했다.

노부(鹵簿)는 원래 군주를 시위하던 병사들의 동원 상태를 정리한 문서의 명칭이었다. 노부(鹵簿)의 노(鹵)는 큰 방패를 의미하였으며, 방패를 든 시위군이 외부에서 군주를 보호한다는 말로 그들의 배열 상황을 기재한 문서가 노부였다. 역사적으로 노부는 중국 고대 진(秦)나라에서 기원하였고, 한(漢)나라부터 노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한나라 때부터 노부는 천자의 거가(車駕) 행렬을 의미하였으며, 동원 인원과 의장에 따라 대가노부(大駕鹵簿), 법가노부, 소가노부(小駕鹵簿)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후 당(唐)나라와 송(宋)나라를 거치면서 의례화되고 국가제도로 정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국초에 고려 시대의 노부의례를 준용하였으나, 세종대 오례(五禮)의 정비과정에서 행행(行幸)을 대가노부, 법가노부, 소가노부로 구분하여 정비하였다.

연원 및 변천

세종대 법가노부가 오례의로 정비되기 이전부터 법가노부는 사용되었다. 1398년(태조 7) 9월 초부터 정종(定宗)의 종묘(宗廟) 행행시 사용되었다. 당시는 태종(太宗)이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태조(太祖)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고 정종이 보위에 오른 직후였다. 정종은 법가노부로 종묘에 행행한 후 강신제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내역을 고했다. 정종은 도성(都城) 내만이 아니라 도성 외에 행행할 때도 법가노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400년(정종 2) 해주의 온천에 온행할 때 사헌부 등에서 온행시 사냥을 삼가야 한다며, 법가노부의 사용을 주장하였다. 태종대에도 종묘 행행과 도성 외 사냥과 온천 행차시 법가노부를 사용하였다. 세종대는 신료의 집에 행차할 때에도 법가노부를 갖추었다(『세조실록』 2년 2월 21일).

세종대 정비된 법가노부는 국왕이 선농단에 친히 제향하거나, 성균관에 행행하여 석전례(釋奠禮)를 행할 때, 사단(射壇)에서 활쏘기를 할 때, 무과전시(武科殿試)의 사단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이때 법가노부의 의물(儀物)은 전정(殿庭)의 반의장(半儀仗)과 같았다.

1455년(세조 1) 세조가 단종에게 보위를 선양받고 잠저에서 경복궁에 왕래할 때도 연(輦)을 이용한 법가노부를 사용하였다. 1464년(세조 10) 모화관에 행행하여 명나라의 조칙을 받을 때와 1475년(성종 6) 덕종의 사당인 의묘(懿廟)에서 분황제(焚黃祭)를 거행할 때도 법가노부였다. 또한 중종대 개성에 능행(陵幸)할 때도 법가노부를 이용하였는데, 궁궐을 이동하거나, 공주 등의 사저를 방문하는 경우에도 법가노부였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노부를 모두 소실하여 광해군대는 궁궐의 의장 관련 물건이 소가노부의 절반이었으므로 대가노부는 갖추기 어려워 법가노부를 이용했다. 광해군대는 친경례(親耕禮)를 하거나, 존호(尊號)를 올리거나 국장(國葬) 중 발인(發靷)할 때에도 법가노부를 사용하였다.인조대도 도성 내 행행에서는 법가노부를 사용했는데,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처를 옮길 때도 법가노부였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국왕을 호위하였던 군영(軍營)의 기록에 따르면 법가노부를 갖추고 능행과 원행을 갈 때는 왕이 군대식으로 융복(戎服) 차림을 하였다.그런데 영조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를 정리하던 1744년(영조 20) 경에 이르면 의장고(儀仗庫)에 대가노부와 소가노부의 두 등급의 노부만이 존재하여 법가노부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영조실록』 20년 8월 14일]. 이후 정조대에는 다시 법가노부가 사용되어 조회시에는 법가와 소가를 사용하였다. 특히 정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 행행시에 법가노부를 이용하여 참배하였다.

순조대인 1827년에는 대가노부, 법가노부, 소가노부의 정의에 변화가 있었다. 대가노부는 중국 황제의 조칙(詔勅)을 맞이하고 묘사(廟社)에 제향할 때에 사용하고, 법가노부는 왕의 초상화, 즉 어진(御眞)을 모신 진전(眞殿)이나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작헌(酌獻)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행차하거나 선농씨와 후직씨에 제례를 행하는 선농사단(先農射壇)에 행차할 때에 사용하였다. 소가노부는 도성 내외를 행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또한 세자의 노부는 법가노부로 사용하였는데, 국왕이 대가노부이면 법가, 국왕이 법가이면 소가노부를 사용하여 세 노부의 등급을 구별하였다(『순조실록』 27년 2월 18일).

절차 및 내용

법가노부는 조선 전기와 후기에 걸쳐 기치(旗幟)와 의물(儀物)이 큰 변화 없이 사용되었으나 가마와 수레, 화약무기와 신병법의 도입에 따라 구성요소와 행렬 배치에 차이를 나타냈다. 예컨대, 노부 의장의 경우 홍문대기(紅門大旗), 주작기·청룡기·백호기·현무기 등의 사신기(四神旗), 황룡기(黃龍旗), 금(金)·고(鼓), 백택기(白澤旗), 삼각기(三角旗)·각단기(角端旗)·용마기(龍馬旗), 천하태평기(天下太平旗), 현학기(玄鶴旗), 백학기(白鶴旗), 표골타자(豹骨朶子), 과(瓜)·부(斧)·필(畢)·한(罕)·등(鐙)·도(刀)·정(旌)·절(節)·당(幢)·봉(棒)·작자(斫子)·용선(龍扇)·봉선(鳳扇)·작선(雀扇), 웅골타자(熊骨朶子), 영자기(令字旗), 금자기(金字旗), 고자기(鼓字旗),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가서봉(哥舒棒), 벽봉기,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 금장도(金粧刀), 은장도, 주작당(朱雀幢)·청룡당(靑龍幢)·백호당·현무당, 은립과(銀立瓜), 금립과, 은횡과(銀橫瓜), 금횡과, 은작자(銀斫子), 금작자, 청양산(靑陽繖), 한(罕), 필(畢), 모절(旄節), 정(旌), 은월부(銀鉞斧), 금월부(金鉞斧), 작선(雀扇), 청개(靑蓋), 봉선(鳳扇), 홍개(紅蓋), 용선(龍扇), 수정장(水精杖), 후전대기(後殿大旗) 등의 의장은 동원되는 수치와 배치된 인원의 소속만 차이가 있을 뿐 시대적으로 큰 변화 없이 사용되었다.

국왕의 이동수단의 경우 세조 이전 단종대까지는 고려조에서 사용하던 수레인 상로(象輅)를 이용하였다. 상로는 코끼리 장식을 한 수레로서 고려조까지 국왕의 행행시 이동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태조부터 단종대까지 이용하였다. 그런데 세조가 단종에게 보위를 물려받으면서 가마인 연(輦)을 사용하였고(『세조실록』 1년 7월 23일), 이후 조선 말기까지 국왕의 이동수단은 가마가 주로 이용되었다. 이외에 말의 안장 위에 얹는 가마인 가교(駕轎)가 이용되기도 했으나 인력을 이용한 가마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병장기(兵仗器)에 있어서도, 조선 전기에는 화약무기의 초기 단계인 총통이 이용된 반면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총(鳥銃)이 등장하였으며, 오위군(五衛軍)과 갑사(甲士) 중심의 시위군이 오군영(五軍營)으로 대표되는 군영군이 호위를 담당하였다. 호위 진법도 장검(長劍)과 궁시(弓矢)기병(騎兵) 중심에서 보병(步兵)인 조총병(鳥銃兵)이 주축이 되는 진영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법가노부의 운용도 화약무기를 사용하는 군영군에 의해 좌우되었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노부의 의장에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의 사신기는 무속신앙에 영향을 주어 민간에서 재앙과 악귀를 쫓는 벽사(辟邪)를 위한 도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園幸乙卯整理儀軌』
  • 『大明集禮』
  • 신명호, 「朝鮮初期 국왕의 車駕變化와 象輅·輦」, 『동북아문화연구』 30, 2012.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幸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최진열,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