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御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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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을 그린 초상화.

개설

조선시대 역대 왕의 초상화가 제작되었지만, 임진왜란이나 한국전쟁 등 수차례의 전란 등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태조, 영조, 철종 및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만 남아있다. 어진의 제작은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을 설치하여 도제조(都提調)의 주관 하에 도화서 화원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주관화사는 왕의 얼굴인 어용(御容)을 그리고, 동참화사와 수종화사는 어용을 제외한 복식이나 채색을 담당하였다. 국왕의 초상에 대한 명칭은 영자(影子), 영정(影幀), 영상(影像), 진상(眞像) 등으로 불렸으나 1713년(숙종 39)에 왕의 초상을 도사하기 위해 어용도사도감을 설치한 후에는 ‘어진’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된다. 여기서 도사는 어용을 직접 마주 보면서 그리는 것을 말하며, 어진을 보고 그대로 베껴 그리는 모사(模寫)는 어용모사도감에서 주관하였다.

어진과 관련한 의례는 완성된 어진 위에 표제를 적고 참여한 신하들이 첨배를 올리는 표제의(標題儀), 어탑에 봉안하는 봉안의(奉安儀), 정기적으로 살피는 봉심의(奉審儀)가 행해졌고, 장소를 옮겨 봉안할 때는 이봉의(移奉儀)가 행해졌다.

어진을 봉안하는 곳을 진전(眞殿)이라 하여 영희전에 태조, 세조, 원종, 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 등 역대 선왕의 어진을 창덕궁 선원전에, 태조의 어진은 완산부 경기전에도 봉안하였다. 강화부장녕전(長寧殿)만녕전(萬寧殿)에도 각각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변천

1. 숙종 이전의 어진 모사

1411년(태종 12) 태종은 의정부에 명하여 어용을 봉안하는 것은 송나라 제도를 따르고, 공신의 도화는 당나라 제도를 채택할 것을 명하였다(『태종실록』 11년 5월 18일). 또한 1412년 태조의 어용을 모신 완산, 경주, 평양의 태조 어용전을 진전이라 칭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1월 15일).

1442년(세종 24) 함길도 함흥에 태조 어진을 봉안하였고, 1444년(세종 26) 세종은 태조와 태종의 어용을 그리게 하여 선원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세종실록』 26년 10월 22일).

성종대에는 세조, 예종 등의 어진을 그린 화원 안귀생, 최경에게 신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특별히 당상관에 제수하였고, 관비까지 사역하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세조의 어진을 모사한 안귀생, 최경, 배연을 승직시켰다(『성종실록』 3년 5월 25일), (『성종실록』 7년 5월 27일). 따라서 성종대에 어진을 그린 화원을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545년(명종 즉위) 승정원에서는 성종과 중종이 승하한 후 어용을 그렸던 전례를 들며 인종의 어진이 없으니 빨리 그려야 한다고 요청했다(『명종실록』 즉위년 7월 24일). 또한 1549년(명종 4) 중종의 어용 제작 책임을 맡았던 이성군이관(李慣)이 스스로 대죄를 고하며 왕의 얼굴을 닮게 그리지 못한 화사를 추고할 것을 청하였으나, 명종은 실물을 닮게 그리는 것도 어려운데, 죽은 뒤 근거할 만한 그림도 없는 상황에서 닮게 그리는 것은 어렵다며 추고하지 않았다(『명종실록』 4년 9월 14일).

2. 숙종대 어진 모사

숙종대 어진 모사는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으로 조선전기의 어진과 진전의 대부분이 소실된 이래 조선후기 어진 모사의 출발점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 전반의 체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왕실의 존엄성을 상징하는 어진의 제작과 이를 모시는 진전의 중건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1688년(숙종 14) 세조와 원종 어진을 봉안한 남별전에 태조 어진을 모사해 봉안하고, 영희전(永禧殿)이라 명명하였다. 1695년(숙종 21)에는 영희전에 봉안된 어진들의 좌측에 쪽지를 써 붙이고 쪽지 위쪽에는 붉은 쪽지를 덧붙여 유사 시 어진들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1년 4월 3일). 1699년(숙종 25)에는 평상시 어진을 진전 뒤에 있는 별전에 봉안하였다가 갑작스런 난리가 발생할 경우 영정을 옮기기 용이하도록 만든 흑장통(黑長筒)에 봉안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5년 윤7월 12일).

숙종대 어진 제작에서 주목할 점은 역대 국왕들이 선왕의 어진을 모시는 데 치중한 반면, 숙종은 1695년 7월경에 자신의 어진을 그려 강화도 장녕전으로 봉안하게 한 것이다(『숙종실록』 21년 8월 7일). 이는 왕권 강화의 의지를 보인 것으로 당시 어진 제작의 주관화사는 조세걸(曺世杰), 동참화사에는 장자욱(張自旭)이 숙종의 어진을 관식(冠飾)에 따라 3본을 그렸다.

이후 1713년(숙종 39) 4~5월에 걸쳐 어진도사도감을 설치하여 다시 원유관본 및 익선관본 등 숙종 어진 2건을 제작하여 선원전과 강화부 장녕전에 봉안하였다(『숙종실록』 39년 4월 11일). 이때 도감의 도제조는 좌의정이이명(李頤命)이었고, 주관화사는 진재해(秦再奚), 동참화사는 김진여·장태흥·장득만, 수종화사는 진재기·허숙이었고, 제작 과정을 관리 감독하는 감조관(監造官)은 문인 화가 정유승이었다. 숙종대 어진의 모사는 이후 영조와 정조대 어진 도사의 전례가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3. 영조대 어진 모사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714년(숙종 40)에 숙종은 자신이 8개월간 병상에 있을 때 연잉군(延礽君)과 연령군(延齡君)의 노고를 기려 화원 박동보를 시켜 두 왕자의 초상을 그리게 하여 하사하였다. 이때 그린 영조의 초상은 관대(冠帶) 차림이었다. 이후 1724년(경종 4)에는 왕세제 연잉군의 관복 차림 초상을 그렸다.

영조는 오랜 재위 기간으로 인해 어진 도사를 가장 많이 하였는데, 1733년(영조 9)부터 1773년(영조 49)에 이르기까지 매 10년마다 5회, 왕자 시절까지 포함하면 총 7회에 걸쳐 어진을 도사하였으나(『정조실록』 15년 9월 28일) 도감은 마지막 7회째 한 번만 설치하였다. 1733년 곤룡포 차림의 영조 어용 모본(模本)이 완성되자 그에 대한 공로를 인정하여 화원 박태진(朴泰晉) 등의 품계를 올려주었다. 이때 그려진 어진은 2건으로 관대 차림이 한 폭 더 그려졌다(『영조실록』 9년 10월 12일). 1744년(영조 20)에 영조의 49세(1742년) 때 어진 2점을 강화도 장녕전에 봉안하도록 하여(『영조실록』 20년 8월 20일) 『선원보략』과 어진을 싣고, 모사한 어진 1본을 장녕전에 봉안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0년 12월 1일). 당시 그려진 세 건의 어진 중 2폭은 면류관 차림이었고, 나머지 한 폭은 곤룡포 차림이었다.

1745년(영조 21) 1월 어용을 봉안하는 강화도 전각의 호칭을 의논하여 장녕전 동각에 ‘만녕전’을 세우고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게 하였다(『영조실록』 21년 1월 9일). 1745년 2월 영조의 어진을 노량진을 통해 강화부 만녕전에 봉안하게 하고 봉심의와 관련한 절목을 마련하였다(『영조실록』 21년 2월 20일). 그 밖에 영조의 어진은 1753년(영조 29)과 1757년(영조 33) 각각 사립도포(絲笠道袍)와 관대 차림으로 제작되었고, 1763년(영조 39)에는 원유관(遠遊冠) 차림, 1773년에는 곤룡포 차림의 2폭을 제작하였다.

한편, 영조는 1748년(영조 24) 선원전에 봉안된 숙종 어용의 얼굴 부분에 점 자국이 생기자) 다시 모사하고 영희전을 중건하여 옮기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4년 1월 17일). 그리고 1773년 어진도사도감을 설치하여 1713년에 그려진 숙종 어진을 모사하도록 하였는데, 도감의 도제조는 김양택(金陽澤)이었고, 어진의 초본은 변상벽(卞相璧)이 그렸다(『영조실록』 49년 1월 22일).

4. 정조대 어진 모사

정조대에는 도감을 설치하지 않고 1781년(정조 5)과 1791년(정조 15) 어진 제작을 모두 규장각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정조 대왕 행장]. 이는 규장각의 위상 제고를 염두에 둔 것으로, 어진을 제작하는 일의 중대함을 감안하여 규장각 각신의 품격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어진의 제작 기간 중에 정조는 규장각 원내인 희우정과 서향각, 영화당에서 각신들과 어진 제작을 논의하였다. 1781년 정조의 어진은 곤룡포 차림으로 제작에 참여한 화원은 한종유, 신한평, 김홍도였으며, 주관화사는 한종유(韓宗裕)였다(『정조실록』 5년 8월 26일). 당시 어진 제작 기간 동안 정조는 당파를 대표하는 25명의 신하 초상과 기로소의 화상첩, 공훈부의 공신도상첩을 열람하였다. 이를 통해 선왕의 충신들을 치하하고 대를 이어 충성을 승계하게 하는 동시에 군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는 규장각 주합루에 봉안된 어진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각신들을 번갈아 숙직토록 하였던 데서도 확인된다(『정조실록』 5년 9월 19일). 또한 정조는 영조대 10년을 간격으로 어진을 모사한 전례에 따라 매 10년마다 1본씩 모사할 것을 밝혔다(『정조실록』 5년 9월 1일). 이에 1791년 정조의 어진은 강사포(絳紗袍) 차림으로 제작되었다. 도사 작업은 채제공이 감독하였고, 윤동섬(尹東暹), 조윤형(曺允亨)이 표제를 썼으며, 주관화사는 이명기(李命基)였다.

5. 고종대 어진 모사

영희전 제1실에 모신 태조 어진이 오래되어 희미해지자 1872년(고종 9)에 도감을 설치하여 다시 모사하게 하였는데, 어진 모사의 일에 대해서는 이후 종친부에서 택일하고 규정을 정하여 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경기전의 태조 어진도 다시 모사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9년 1월 1일), (『고종실록』 9년 1월 1일). 또한 고종은 태조 어진을 모사한 후 구본(舊本)은 대개 궤봉(櫃奉)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어용이 희미해지고 더 훼손될 것을 염려하여 영희전과 경기전으로 대신들을 보내 구본을 세초(洗綃)한 뒤 섬돌 가에 매안(埋安)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9년 5월 4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현존하는 어진 중에서 조선시대 어진의 전형(典型)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태조 어진의 청색 복색과 정면상이라는 조형 요소는 조선전기 국왕 초상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1872년은 임신년으로 태조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한 후 8주갑 즉, 480년에 해당하는 해로 왕조를 창업한 태조와 수성한 태종의 존호 추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고종은 이때 자신의 어진을 함께 그리게 하였다.

1900년(광무 4) 10월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열성조의 어용을 비롯한 사적이 소실되자 고종황제는 어진모사도감과 선원전의 중건도감을 동시에 합설하여 집행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37년 10월 14일). 당시 어진 모사의 진행은 흥덕전에서 이루어졌고, 신본 태조와 숙종의 어진에 고종이 직접 표제를 썼으며(『고종실록』 37년 12월 21일), 영조와 정조의 어진이 완성되자 직접 작헌례를 친행하는 등 어진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02년(광무 6)에는 사변이 있어 미처 시행하지 못한 어진 도사를 10년 만에 한번 그린다는 전례에 따라 비로소 시행하게 되어 고종의 어진과 세자의 예진(睿眞)을 도화서 화원 조석진(趙錫晉)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고종실록』 38년 11월 7일), (『고종실록』 39년 3월 16일). 현존하는 고종 어진은 조석진이 휘장을 배경으로 붉은색 강사포 차림으로 그린 전신좌상의 정면상과 채용신이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황색 곤룡포에 익선관 차림으로 그린 전신좌상 등이 전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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