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복(戎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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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이하 왕세자, 종친, 문무백관, 군졸 등이 거둥이나 융사(戎事) 등에 착용한 복식 일습.

개설

왕은 능(陵)이나 원(園), 온천 등에 거둥할 때 곤룡포(袞龍袍)를 대신하여 융복을 착용하였다. 문무백관은 왕의 거둥 시 또는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 입었다. 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전쟁 중에 왕 이하 모든 백관이 융복을 착장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전에는 곤룡포나 단령(團領) 속의 받침옷으로 입기도 하였다. 관모와 옷, 허리띠, 신발이 기본 복식이고 그 외에 동개(筒箇)와 등편(籐鞭) 등, 다양한 부속품으로 이루어졌다.

1596년(선조 29)에는 융복의 색상이 정해져,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에까지 이어지면서 당상관과 당하관의 융복 색상은 이때의 융복 색상 전통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정조대에는 군복(軍服)의 착용 사례가 증가하면서 융복의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였으나 정조는 여전히 무비(武備)의 마음가짐과 편리성을 들어 융복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융복은 왕조의 끝까지 군복과 겸하여 입혀졌으며 1883년(고종 20)에 융복 제도를 폐지하였으나 지켜지지 않은 채 1883년 이후에도 융복은 행행(行幸)에서 군복과 구별되게 착용되었다.

연원 및 변천

융복의 구성은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군복과 함께 사용되면서 융복 착용이 차츰 줄어들었으며 결국 군복보다 먼저 소멸하게 되었다.

융복용 철릭의 색상은 신분에 따라 구별되었다. 왕의 철릭은 곤룡포의 색상과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평소에는 다홍색 철릭에 오조룡 흉배를 달았으며 국상으로 인한 복중(服中)의 능행에는 참포에 해당하는 융복을 입었는데 흑립에 흉배 없는 흑색 철릭[無揚黑帖裏, 鴉靑戎服]에 청대(靑帶)를 둘렀다. 왕세자의 철릭의 색상에 대한 논의는 중종대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곤룡포의 색상을 따라 아청색을 사용하였으며, 역시 평상시의 융복에는 사조룡의 흉배를 달았다. 복중에는 왕과 같았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철릭은 백관의 관복의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백관의 융복용 철릭의 색상은 선조대에 정착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왕 이하 백관에게 융복 차림을 하도록 하였다. 색상의 제한은 없었으며 흑립(黑笠)에 광사대(廣絲帶)를 띠고 칼을 차고 입시하였다. 그러나 1596년(선조 29) 3월에는 융복 색상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져 당상관은 평소와 같이 남색을 쓰도록 하였고, 당하관은 흑색을 입도록 함으로써 당상관과 당하관의 융복의 색상을 구분하기 시작하였다(『선조실록』 29년 3월 2일).

인조반정 시기에도 국왕부터 백관까지 모두 융복 차림이었음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너무 오랜 동안 입혀졌던 관계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점차 착용하기를 꺼렸으며 결국 철릭은 무관의 관복으로, 또는 거둥 시의 문무관 융복으로만 착용하게 되었다.

1793년(정조 17)에는 군복의 착용이 증가하면서 융복의 폐지론이 대두되었다. 어가를 호위하는 시위의 복색이 군복과 융복을 섞어 입어 통일성이 없고 융복의 형태가 점차 비활동적으로 변해가는 문제점을 들어 편리한 군복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융복의 오랜 역사와 함흥에 보관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폐지를 보류하였으며, 대신 군사 복식에 적합하지 않게 변해 가는 융복 철릭의 소매를 좁히고 길이를 짧게 하여 본래의 활동성과 기능성을 복구하였다(『정조실록』 17년 9월 25일).

그러나 1864년(고종 1) 7월에 융복을 품계에 따라 착용하도록 하되, 주립(朱笠)과 호수(虎鬚), 패영(貝纓)을 폐지하고 칠사립(漆紗笠)을 사용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1년 7월 10일). 그 후 1883년(고종 20) 1월에 융복을 완전히 폐지하고 군복을 대신 사용하도록 함에 따라 철릭을 기본으로 하는 융복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고종실록』 20년 1월 28일).

형태

융복은 호수를 장식한 입자(笠子)와 철릭, 광다회(廣多繪), 수화자(水靴子) 등으로 구성된다.

1) 입자 : 융복의 관모로는 호수와 공작우(孔雀羽)를 꽂은 갓[笠子]을 썼다. 당상관은 자립(紫笠) 혹은 주립(朱笠)을 사용하였으며 당하관은 흑립(黑笠)을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규정은 영조대의 『속대전』에 명시되어 있다. 1864년(고종 1) 7월 행행 때 조신의 융복에 주립과 호수, 패영을 폐지하고 칠사립을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호수와 패영과 함께 당상관이 쓰던 주립은 폐지되었다.

갓에는 공작우와 호수를 장식하였다. 호수는 갓의 전후, 좌우에 꽂는 것으로, 숙종대에 생겨난 새로운 제도이다. 한편 능행에서는 출궁할 때나 환궁할 때는 호수와 삽우를 하였지만 능·원을 배알하는 동안에는 왕과 신하 모두 삽우를 제거하였다. 또한 갓에는 갓끈을 장식하였는데 당상관은 산호를 끼운 밀화영(蜜花纓)을 사용하였고 당하관은 수정영(水晶纓)을 사용하였다. 숙종대 이후에는 입자에 패영과 견영(絹纓, 비단끈)을 함께 사용하였다. 이는 온천 거둥 때 패영이 끊어질까 걱정되어 사용한 것인데, 그 후로는 풍습이 되었다고 한다.

2) 철릭 : 융복의 옷은 철릭[帖裏, 天翼]인데 상의와 하상이 연결된 옷으로 허리에 많은 주름을 잡아 말타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옷이다. 당상관은 남색 철릭을 입고, 당하관은 청흑색 철릭을 입었다. 단 어가가 움직일 때 당하관은 홍색 철릭을 입었다. 시대에 따라 철릭의 상의는 점점 짧아졌고 대신 치마는 길어져서 그 비례를 통해 철릭의 시대를 판정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되었다. 초기에는 그 비례가 1.2 대 1 정도였지만 16세기 후반이 되면 거의 1 대 1의 비례로, 조선후기에는 거의 1 대 3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마치 여자의 저고리와 치마의 비례가 변화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치마 주름은 초기에는 잔주름이던 것이 후기로 가면 넓어지고 치마단 끝까지 눌러 잡은 주름치마의 형태가 된다. 활을 쏠 때 편리하도록 탈착형 소매를 달기도 하였는데 대체로 왼쪽 소매가 분리되는 경우가 많았고 간혹 좌우 소매가 모두 분리되는 경우도 있었다. 드물게 오른쪽 소매가 탈착형인 경우도 있다. 소매통은 점차 넓어져서 착수에서 광수로 변화되는데 16세기 후반이 되면 이미 소매가 넓어지면서 임진왜란 중에 중국 군인들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다시 후기로 가면서 광수(廣袖)가 되었다.

3) 허리띠 : 철릭에는 실띠를 사용하였는데 광대(廣帶)라고 하였다. 광다회대(廣多繪帶)를 말한다. 당상관 융복에는 자색·홍색 광다회를 두르고 당하관의 융복에는 녹색이나 남색 광다회를 둘렀다.

4) 수화자 : 융복용 신발은 수화자이다. 수화자는 흑화와는 달리, 발목이 길고 좁아서 신기는 힘들지만 쉽게 벗겨지지 않도록 배려하여 만든 신발이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1726년(영조 2) 도승지(都承旨) 정형익(鄭亨益)이 무신이 흑철릭을 입고 수화자를 신는 것은 활쏘기에 편하고 걷기에 좋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외에 동개와 등편, 검 등을 갖추었다.

용도

융복은 왕이 궁궐을 벗어나서 거둥을 할 때, 즉 능행, 사냥, 사신을 접견하러 모화관에 갈 때 등에 착용하였다. 왕의 거둥 때 왕을 수행하는 문관과 무관들도 융복을 착용하였으며 서울에 남아 있는 신하들도 융복을 입었다. 사신으로 외국에 갈 때도 융복을 착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國難)이 있을 때에도 왕 이하 백관이 모두 융복으로 지냈다.

참고문헌

  • 『악학궤범(樂學軌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금종숙, 「조선시대 철릭의 형태 및 바느질법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박가영·이은주, 「정조시대의 군사복식과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 『韓服文化』제7권 3호, 2004.
  • 이은주·박가영, 「英祖代 大射禮儀 참여자의 복식 유형 고증」, 『복식』제57권 2호 , 한국복식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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