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정(朴師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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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83년(숙종 9)~1739년(영조 15) = 57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예조 참판(參判)이고, 증직(贈職)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시숙(時叔)이고, 초명은 박사성(朴師聖)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고조부가 선조의 부마 금양위(錦陽尉)박미(朴瀰)이며, 고조모가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박필하(朴弼夏)이며, 어머니 남원윤씨(南原尹氏)는 윤반(尹攀)의 딸이다. 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이택상(李宅相)의 딸이다. 아들 박명원(朴明源)이 영조(英祖)의 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하여 금성위(錦城威)에 봉해졌다.

숙종~영조 시대 활동

1717년(숙종 4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가 일어나자 맏형 박사익(朴師益)소론(少論)들의 공신회맹(功臣會盟)에 핑계대고 참여하지 않았다는 죄로 1723년(경종 3) 5월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그는 향리의 집에 숨어 있으면서 몸을 드러내지 않았다.

1724년에 영조가 즉위하여 노론(老論)이 득세하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때 신임사화에 희생된 노론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 등 4대신의 사당 건립이 논의되었다. 상신(相臣)들은 마땅히 4대신이 수명(受命)한 곳에 각각 건립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그는 한 사당 안에 네 분의 대신을 함께 모실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자, 차자(箚子)를 올려 숙종 묘정에 배향된 소론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윤지완(尹趾完) 등을 철향(撤享)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1727년(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이 득세함에 따라 파직되었다.

1728년(영조 4)에 복직되어 이조 좌랑(佐郞)·수찬(修撰)·응교(應敎)가 되었고, 1729년(영조 5) 부응교(副應敎)·교리(校理)·사간(司諫)·집의(執義)가 되었다. 1730년(영조 6) 2월 경산현감(慶山縣監)이 되었다가 11월 다시 교리를 거쳐 같은 달에 응교가 되었다. 1731년(영조 7) 부수찬(副修撰)·부교리(副校理)·응교·교리·부응교가 되었다가 10월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1732년(영조 8)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1933년(영조 9) 3월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가 8월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1734년(영조 10) 2월 다시 도승지가 되었다. 1735년(영조 11) 6월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는데 소명(召命)을 어겼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736년(영조 12) 1월에 다시 이조 참의가 되었는데, 3월에 추고(推考)되었다. 그 해 7월에 다시 대사간이 되고, 1737년 7월에 이조 참의가 되었다.

1738년(영조 14) 2월 아들 박명원이 영조의 딸인 화평옹주와 결혼하여 금성위에 봉해졌는데, 그 때 박사정은 강화유수(江華留수)였다. 그 해 8월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11월에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1739년(영조 15) 10월 30일 세상을 떠나니 향년 57세이다.

묘소와 추증

묘소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에 있다. 영의정에 증직(贈職)되었다. 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이택상(李宅相)의 딸인데, 4남을 두었다. 1자는 박흥원(朴興源)이고, 2자는 박창원(朴昌源)이며, 3자는 박광원(朴光源)이고, 4자는 박명원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암집(燕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