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익(朴師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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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75년(숙종 1)~1736년(영조 12) = 62세]. 조선 후기 숙종~영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이고, 봉작은 금원군(錦原君)이다. 자는 겸지(謙之)이고, 호는 노주(鷺洲)이며,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고조부가 선조의 부마 금양위(錦陽尉)박미(朴瀰)이며, 고조모가 선조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박필하(朴弼夏)이며, 어머니 남원윤씨(南原尹氏)는 윤반(尹攀)의 딸이다.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민진장(閔鎭長)의 딸이다. 영조(英祖)의 딸 화평옹주(和平翁主)와 결혼한 금성위(錦城威)박명원(朴明源)의 큰아버지이다.

숙종 시대 활동

1710년(숙종 36) 사마시(司馬試)로 생원(生員)에 합격되었다. 1712년(숙종 38)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1713년(숙종 39) 2월 검열(檢閱)이 되었고, 1714년(숙종 40) 4월 설서(說書)가 되었다. 이 해 7월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대료(臺僚)조상건(趙尙健)이 스승인 송시열(宋時烈)을 배반한 윤증(尹拯)을 논란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문제가 발생하자 그는 결연히 조상건을 변호하였다. 1716년(숙종 42) 도당록(都堂錄)에 선발되었고,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 1717년(숙종 43) 1월 교리(校理)가 되었는데, 4월에 70세에 가까운 노부모의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나갔다가, 12월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인 1718년(숙종 44) 4월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다시 교리가 되었다. 당시 대리 청정하던 세자(世子)경종(景宗)을 위해 시무(時務)에 가장 절실한 상소를 올렸다. 그 해 9월 이조 좌랑(佐郞)이 되고, 헌납(獻納)이 되었으며, 다시 부수찬(副修撰)·이조 좌랑·부교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5월 다시 부교리·헌납이 되었다가 응교(應敎)·사간(司諫)·보덕(輔德)을 거쳐 11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다. 1723년(경종 3) 5월 신임(辛壬) 연간의 공신회맹(功臣會盟)에 핑계를 대고 불참한 죄로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해 11월 청하(淸河)로 이배되었다.

영조 시대 활동

영조(英祖)가 즉위하자 1725년(영조 1) 1월 귀양에서 풀려 직첩을 돌려받고, 그 달에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이 해 5월에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어 강화의 외성(外城)을 보수하였다. 1727년(영조 3) 특지로 병조 판서(判書)가 되고, 이어 금원군(錦原君)에 봉하여졌으며, 1728년(영조 4) 대사헌(大司憲)·형조 판서·돈녕부(敦寧府)지사(知事)·공조 판서가 되었다. 1729년(영조 5) 윤7월 함경도(咸鏡道)도과(道科)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즉시 숙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고(推考)되었다. 그 해 10월 예조 판서가 되고, 11월에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1730년(영조 6) 우참찬(右參贊)·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가 되었다. 그는 의금부 지사 때인 같은 해 6월 친국(親鞫)에 불참하여 파직되었다가 그 해 11월 초 다시 경연 동지사가 되었으며, 그 달 중순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731년(영조 7) 2월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그 뒤 우참찬·좌참찬이 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1733년(영조 9) 11월 다시 형조 판서가 되었다. 그 뒤 의금부 지사가 되었는데, 1735년(영조 11) 3월 임금이 지내는 황단제(皇壇祭)에 참여하지 않아 다시 파직되었다가 6월에 대사헌이 되었다. 1736년(영조 12) 5월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가 6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그해 12년 11월 11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 62세이다.

시호와 봉작

시호는 장효(章孝)이고, 봉작은 금원군(錦原君)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암집(燕巖集)』